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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50화 (50/131)

〈 50화 〉 선상 카지노(2)

* * *

특별 수사대가 티아마트의 머리들 중 하나를 거둬들였다는 소식은 아주 빠르게 퍼져나갔다.

덕분에 오늘 조사가 예정되어있던 헌터들은 전보다 고분고분했다.

평소에도 태도가 결코 나쁘진 않았으나, 오늘은 아주 기어다니는 수준.

앨리스의 옆자리에서 열심히 간식을 깨작이던 티아가 그들 중 한 명을 알아보곤 움찔거렸다.

"아, 안녕?"

"히익... 수사관님. 저 잠깐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뭐야, 왜 저래?"

내가 호다닥 도망치는 헌터의 모습에 티아를 돌아보자 녀석이 내 눈을 살짝 피했다.

"아, 뭔가 기억에 남아있는데... 예전에 내가 다리를 날려버렸던 헌터 같다."

"..."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 때의 나는 완전 심신미약 상태였다니까! 게다가 지금은 치료를 받아서 멀쩡하지 않으냐!"

이 녀석, 뭔가 이상한 것만 잔뜩 알고있다.

그나저나 이건 생각보다 유용하게 써먹을 수도 있겠다.

나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헌터들에게 티아마트는 공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안 그래도 앨리스 한 명으론 좀 모자라거나 위험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다.

물론 티아는 나보다 훨씬 약하지만...

일단은 헌터펫 취급이니까, 남들의 앞에서 당당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아예 작전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야, 너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어. 그리고 헌터들이 내 앞에 앉으면 계속 째려봐. 알겠지?"

끄덕끄덕.

티아의 협조 덕분에 오늘의 조사는 예정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나는 앨리스에게 티아를 맡기곤 야근 겸 출장을 준비했다.

원래는 서지유 혼자 보내려고 했지만, 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솔직히 헌터들끼리 도박을 하는 정도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아예 크루즈쉽 한 대를 도박장으로 써먹고 있다니.

이건 궁금해서라도 가볼 수밖에 없다.

서지유는 내가 변장을 위해서 얼굴을 씻고 오자 화들짝 놀랐다.

"팀장님도 가시려구요?"

"어. 헌터들끼리 모여서 도박 좀 하는 거라면 또 몰라... 한국에 강원랜드가 하나 더 생기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지."

어차피 서지유 혼자 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냉큼 변장을 돕기 시작했다.

눈썹을 조금 덧그리려는 듯, 얼굴을 간지럽히는 감각.

나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영속교 때랑은 다르게 하는 거지?"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횡령죄로 잡힌 거지, 사기죄로 잡힌 게 아니니까요."

"자랑이다."

"... 오늘의 컨셉은 동네 양아치로 해드릴게요."

서지유의 마술이 끝나자 나는 어두운 느낌의 경호원이 되어있었다.

그녀도 정성을 들여서 화장을 마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카드 주세요."

"이미 현금 준비했는데?"

"아니, 변장용 소품 사야죠. 옷이나 가방 같은 거..."

"너 지난번에 산 거 있잖아?"

내가 살짝 당황하고 있자 서지유가 무척 뻔뻔하게 지껄여댔다.

"그거 다시 팔았어요. 명품 리셀은 완전 장기투자 할 거 아니면 적당히 빨리 팔아치우는 게 좋아서... 조금만 지나도 가격이 훅훅 떨어진다니까요?"

"그럼 그 돈으로 사!"

내가 주먹을 불끈 쥐자 뒤쪽에 서있던 티아가 양손을 붕붕 휘둘러댔다.

서지유는 살짝 기겁하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티아가 떠나기 전에 녀석을 붙잡고 물었다.

"야, 근데 너 진짜 다른 머리들 행방 모르는 거 맞지?"

"그놈들의 행방은 내가 더 알고싶다! 지금도 어둠 속에서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알겠으니까 집에 가서 얌전히 있어."

"저, 정말? 오늘 뭐 아무것도 더 안 해도 되는 건가?"

티아가 살짝 놀라며 묻자 나는 뒤늦게 손뼉을 치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맞다, 얘 데려가서 밥 좀 먹여줘. 좀 더 제대로 된 걸로."

"응? 아까보다 더 맛있는 게 있는 거냐?"

"입 다물고 따라와."

앨리스는 묘하게 투덜거리듯 말하며 티아를 데려갔다.

호위 겸 운전기사 역할을 맡은 김정태가 나와 서지유를 안내해줬다.

지난번에 잡은 블랙마켓의 브로커가 사건을 워낙 많이 들고와서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야근이다.

"가시죠, 팀장님."

"현금은 얼마나 준비했어?"

"2천입니다. 더 가져올까요?"

"아니, 어차피 조사니까 그 정도로 충분하겠지."

옆에서 듣던 서지유는 그대로 눈이 돌아갔다.

일단 쇼핑을 하고 온 그녀는 돈 많은 집 아가씨가 되어서 선상 카지노로 향했다.

옆에서 보니까 가방 하나에 800씩 부르던데,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가방 하나 만들어서 800이라... 헌터들이 돈 벌어봤자 진짜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군."

"팀장님 말씀대로 결국 3D 직종, 육체 노동자니까요. 그런데..."

서지유는 내게 몸을 바짝 붙이며 비로소 본심을 드러냈다.

"조사라고 해도 도박은 좀 하게 되겠죠?"

"당연하지. 그래서 자금을 준비했잖아."

"그럼, 만약에 제가 좀 따면 차액만큼 가져가도 될까요?"

이 여자는 돈 벌어서 다 어디에 쓰는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서지유가 진심으로 도박을 해줘야 조사가 수월할 것이다.

"딸 수 있다면 말이지. 그래도 너무 빈티내진 마라? 일단은 부잣집 아가씨 설정이니까."

"좋았어!"

"근데 너 도박 잘 하냐?"

"조금 정도는요. 아, 물론 그것 때문에 횡령했던 건 절대로 아니구요."

그 정도는 이미 알고있다.

만약 도박빚 때문에 횡령을 저질렀다면 팀원으로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래지않아 인천항에 도착한 우리는 부두의 구석에 세워진 대형 크루즈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예상보다 조금 더 커다란 크루즈선의 앞에는 벌써부터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이곳도 나름대로 유명한 곳인 모양이다.

위장용 신분증을 받아든 서지유가 배를 아주 감명깊게 쳐다봤다.

"저, 팀장님. 그런데 이 배는 어떻게 타국 영토로 인정을 받았다는 거에요?"

"지유 씨, 진짜로 시사 문제에 관심 없구나? 나름대로 유명했던 사건인데."

"그런가요? 하지만 벌써 몇 년 전 일이라면서요?"

"한 7년 정도 됐지. 원래 저 배는 테레인이라는 약소국의 배였어. 작긴 해도 나름대로 알아주는 관광국가였지."

근데 그 테레인이 몬스터들의 침공으로 인해서 망했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테레인의 배는 인천항에 무기한으로 정박하게 됐다.

당연히 대한민국은 이들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그럴 수가 없었다.

몬스터들로 인한 난민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민감한 사안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저 크루즈에 전염병이 돈다는 소리까지 있었지. 그래서 제법 오랜 기간 동안 격리에 들어갔어. 저 배가 타국 영토로 인정받은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야. 한국에 전염병이 퍼졌다는 소리가 나오면 여러모로 곤란했거든."

"새, 생각보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군요."

"지유 씨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도박을 즐기면 돼. 그럼 슬슬 가볼까?"

"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곳으로 향했다.

선상 카지노의 앞에는 도박을 즐기러 온 사람들 외에도 수상쩍은 놈들이 바글거렸다.

입장 대열에서 살짝 떨어진 채 손님들을 노리는 눈길들.

내가 자그마한 돈가방을 들고 그들을 노려보자 서지유가 조용히 물었다.

"저 사람들은 뭐죠?"

"도박 자금을 빌려주는 사채업자들."

"아..."

저런 놈들이 대놓고 진을 친 꼴을 보니 벌써부터 불길하다.

강원랜드가 이래저래 말이 많긴 해도, 일단은 공기업인만큼 저런 사채업자들은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데...

이놈들은 아주 당당하게 탑승까지 한다.

'벌써 이 정도인데 안쪽은 어떤 꼴이 되어있을지 원.'

머지않아 배 위의 환전소에 도착한 우리는 2천만원을 모두 칩으로 바꿨다.

그러자 직원이 티켓을 나눠주며 별도의 입구로 안내했다.

다른 손님들은 무척 익숙하다는 듯 별다른 항의조차 없었다.

'군자금 1천 이상은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하는 건가.'

서지유가 쾌재를 부르며 걸어들어가자 곧바로 직원 한 명이 따라붙었다.

아까 보니까 보여준 신분증을 바탕으로 헌터인지 아닌지 확인까지 한 것 같았다.

"오늘은 테레인 크루즈 게임장을 찾아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손님. 저희 게임장은 처음이신가요?"

"그런데요? 뭐 특별한 규칙이라도 있나요?"

"제가 간단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종류의 불법 조작이나 속임수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게임장 내부에서의 다툼이나..."

카지노의 규칙은 상당히 뻔했다.

우리는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본격적인 도박 시설이 있는 내부로 입장했다.

밖에 줄을 길게 선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선상 카지노는 아주 성황리에 영업중이었다.

기존에 있던 기재들을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새로운 기계나 테이블을 들여놓기도 했다.

어떻게든 수용 인원을 더 늘리려고 애쓴 흔적이 보였다.

'하긴. 아무리 대형 크루즈라 해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손님은 많아봤자 수백일테니...'

이게 무슨 배수량 20만톤급 초대형 크루즈도 아니니까 이 정도의 개조는 필수였다.

나는 선내에 바글거리는 손님들을 구경하며 무척 심란해졌다.

손님들이 어찌나 많은지, 인기있는 룰렛이나 테이블 게임 쪽은 건드리지도 못하겠다.

"광고가 많이 잘 된 모양이네요."

"그러게. 일단 좀 돌아보자고."

"네!"

잔뜩 신이 난 서지유와 함께 천천히 선내를 돌아봤다.

중앙에는 테이블을 최대한 빽빽하게 배치해놓았는데, 그게 전부 꽉 차있다.

물론 슬롯 머신이 빼곡하게 들어찬 공간도 있었다.

이쪽은 그나마 여유가 보인다.

나는 그곳에서 별로 그립지 않은 기계를 발견했다.

"오, 바다이야기네? 아직 작동하는 기계가 남아있었다니..."

"아... 이건 저도 들어봤어요. 1위 당첨금이 2000?"

서지유는 잔뜩 신이 나서 앉으려 했으나 나는 그것을 잽싸게 말렸다.

"예상보다 적네. 20년 전 바다이야기 당첨금이 약 200이던가?"

"에이,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도 10배면 괜찮은 거 아녜요?"

"글쎄다. 헌터들이 이거 보고 눈이 뒤집어져서 달려들겠냐?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앗, 그러고 보니 헌터들은 아직 안 보이네요."

이곳 선상 카지노는 나쁜 의미로 기대 이상인 업소였으나...

정작 헌터들을 노린 장치나 게임 따윈 아직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직 실망하긴 한창 이르다.

헌터들의 능력을 감안하면, 그들은 다른 손님들과 별개로 취급하는 것이 맞다.

'어딘가에 전용 구역이 있을텐데... 저긴가?'

나는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안쪽으로 향하는 손님 한 명을 발견했다.

퀭한 눈에 피로로 찌든 얼굴.

과연. 그를 따라가자 내부에 마련된 별실이 보였다.

입구에 설치된 기재가 제법 익숙하다.

"저건... 마력 감지기네. 헌터 협회 본사에도 설치되어 있는 거야."

"접근해볼까요?"

"아냐, 근처에서 게임하면서 기다려."

우리는 일반 손님으로 왔으니 섣불리 쳐들어가서 좋을 것이 없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지유가 때마침 비게 된 자리로 향하는데...

돌연, 그녀의 옆에서 핼쑥한 남자가 와락 달려들었다.

앙상하게 메마른 두 팔은 그녀가 들고있는 명품백을 노리고 있었다.

"그거 이리 내놔!"

"꺄, 꺄앗!"

퍽!

나는 늦지 않게 끼어들어서 놈을 간단히 때려눕혔다.

아무리 화려하고 깔끔하게 치장을 하고 있어도, 이곳은 결국 도박장.

그리고 손님의 대부분은 도박중독자들이다.

도박 자금이 떨어지면 경범죄 정도는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인종들!

선상 카지노의 화려한 겉모습에 속아넘어갔던 서지유는 내게 안긴 채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뒤늦게 달려온 보안 요원들이 곧바로 상황을 눈치채곤 놈을 끌고나갔다.

"죄송합니다 손님!"

"아니, 당신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칩만 2천만원을 샀는데 써보기도 전에..."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열심히 연기를 하고있자 서지유가 내 팔을 끌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아직까지 떨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100% 연기라고 볼 순 없었다.

겨우 남들의 눈을 피한 그녀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새삼 인사했다.

"고, 고마워요."

"처음부터 이러려고 따라온 건데 뭘. 좀 진정됐어?"

"전혀요. 저는 무슨 칼에 찔리는 줄 알았어요!"

다시 호들갑을 떨어대는 서지유를 안아주자 그녀의 떨림이 급격히 진정됐다.

나도 배운지 얼마 안 된 것이지만, 인간의 체온에는 제법 신비한 힘이 있었다.

덕분에 겨우 진정한 서지유가 얼굴을 붉히며 뒤늦게 항의했다.

"부... 부인도 있는 분이 이러셔도 되는 거에요?"

"평소처럼 건방진 소리 하는 거 보니까 멀쩡해졌네. 나갈까?"

"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서지유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지노의 직원들에게 진상을 부리며 도박장으로 돌아갔다.

직원들이 서비스 칩을 건네주고 사라지자, 나는 아직까지 살살 떨리고 있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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