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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47화 (47/131)

〈 47화 〉 기나긴 하루(5)

* * *

나와 앨리스가 상대한 흑룡이 티아마트의 머리들 중 최강이란 것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가장 까다로운 녀석이었는데다, 놈이 티아마트 군단을 이끌고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하지만 금색 머리는 인상이 좀 희미하다.

눈에 띄게 얌전해진 녀석은 창고로 연행되며 열심히 떠들어댔다.

"나 사실 원래부터 항복하고 싶었어. 내가 너희들 덕분에 해방됐다니까?"

"아, 그러셔?"

"정말이야. 까놓고 말해서, 군단도 없이 나 혼자 뭘 하겠어?"

"..."

"나 한국도 정말 좋아해. 대한민국 독립 만세! 와! 싸이, 김연아, 이순신 장군님! 김치는 아직 잘 못 먹지만 빨리 익숙해질게!"

이건 정말... 당혹스럽다.

나와 앨리스는 위엄도 뭣도 없이 필사적으로 울어대는 금발의 용족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거의 생존본능의 노예 수준.

"몬스터가 말을 하는 것도 어색해 죽겠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거야..."

"손흥민! 세종대왕! 예리엘 프로스트..."

"야야, 그만해 인마. 애초에 예리엘은 순수 한국인도 아니잖아."

"와. 나 대놓고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봐."

앨리스는 내 말을 듣곤 피식 웃었다.

예리엘은 살아있는 여신 취급이라서 어쩔 수 없다.

원래의 국적이 살짝 불명확한 탓에, 가만히 놔두면 각국에서 서로 자기나라 출신이라고 우겨댄다.

금발의 티아마트는 내 말투가 묘하게 편한 것을 눈치채곤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너는 그 무서운 여자랑 무슨 사이냐? 그쪽의 여자는 옆에서 싸우던 거 봤는데... 혹시 너도 그 여자의 동료야?"

"아니, 나는 걔 남편인데."

"겨, 결혼을 했어?!"

"사실 얼마 안 됐어."

내가 예리엘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녀석은 눈에 띄게 얌전해졌다.

솔직히 이렇게 위험한 몬스터는 당장 처리해버리고 싶지만...

녀석에게 얻을 수 있을만한 정보가 너무 많다.

그러니까 일단은 살려둬야 한다.

나는 창고로 돌아오자마자 서번트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들 안 죽었지?"

"그렇습니다."

"좋아, 고생했어. 이제 양쪽 전선 모두 안정됐다고 하니까 쉬어도 되겠어."

"수고하셨습니다 마스터."

겨우 쉴 수 있게 된 나는 조금 난감한 기분으로 중장갑 전투복을 살펴봤다.

확실히 성능은 장난이 아니지만, 매튜의 수제작이다 보니 개량은 커녕 유지보수도 빡세다.

내 스마트폰 카메라를 빌린 블랑쉬가 전투복의 상태를 진단해줬다.

[자가진단 결과 장갑판과 구동계 일부 손상, 동력로 출력 저하. 상태가 심각하진 않지만 원래의 성능을 발휘하기 위해선 본사에서의 정비가 필요합니다.]

"뭐야, 언제 고장난 거야?"

[흑룡과 격돌했을 때의 충격으로 손상됐습니다.]

내가 맞은 것도 아니고, 칼로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는데 이 정도인가.

확실히 체급차가 좀 말도 안 되긴 했다.

"이래서 원 오프 타입은 싫다니까... 그냥 부품만 보내주면 안 돼?"

[마스터의 전용 중장갑 전투복은 너무 고가품이라서 장갑판을 포함한 일부 부품 이외에는 예비가 없습니다. 애초에 원 오프 타입이 아니면 그 정도 성능이 나오지 않는다고 마스터 매튜께서 불평하고 계십니다.]

아, 맞다. 아까 매튜 통신 끊어버렸지.

내가 그것을 복구시키자 매튜가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석 에스콰이어를 보냈으니까 그쪽에게 맡겨. 수리하는 김에 겸사겸사 업그레이드 해주지. 그리고 블랑쉬는 당분간 최소한으로 운용한다.]

"역시 할당량을 너무 많이 썼나?"

[그것도 그렇고, 이번 실전 테스트로 괜찮은 데이터를 많이 얻었다. 당분간 이쪽도 업그레이드에 들어간다. 그린 더스트를 좀 더 보내주면 좋겠는데.]

"알겠어. 수고했다 블랑쉬."

[감사합니다 마스터.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통신을 종료하자마자 곧장 금룡의 심문에 들어갔다.

예리엘 쪽도 레이드 보스를 격퇴했다니 여유롭게 물어볼 수 있겠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정좌한 금발의 티아마트가 잔뜩 주눅든 얼굴로 나를 올려봤다.

"잠깐, 뭐든 말할게! 제발 험하게 대하지 말아줘!"

"넌 제발 목소리 좀 줄여라..."

"응, 알겠어!"

빠릿빠릿하게 대꾸하는 녀석을 보고있으니 무척 심란한 기분이 됐다.

명색이 레이드 보스란 녀석이 우리 사무실에 조사받으러 온 헌터들보다 훨씬 협조적이다.

"너는 아까 예리엘이 입은 상처 때문에 분리됐다고 했는데... 그게 대충 얼마나 된 일이지?"

"그게, 한 3년 정도? 우리가 패퇴한지 얼마 안 되서였어. 원래는 대충 침 바르면 낫는데, 그 여자가 입힌 상처는 회복되질 않더라고."

쓸데없이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녀석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물이 났다.

거의 죽기 싫어서 발악하는 수준.

나는 쓰게 웃으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번 침공에는 왜 끼어든 건데? 역시 예리엘에게 복수하려던 거냐?"

"나는 걔랑 안 친해서 잘 몰라. 티아마트 군단은 가장 강한 검은 색 머리가 이끌고 있었거든."

"다른 머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미안, 그것도 잘 몰라. 우린 원래 별로 안 친해서... 어차피 협동은 불가능할거야. 보자마자 잡아먹으려고 달려든다면 또 몰라."

금발 머리의 말이 완전히 거짓말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만약 협동이 잘 됐다면 이번처럼 따로따로 오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덤벼들었겠지.

아직 질문이 산더미같이 있었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묻고 일단락하기로 했다.

이제 겨우 전투가 끝났을 뿐. 처리할 일은 많이 남아있다.

"원래 몬스터들은 이성이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너희는 왜 지구를 침공하고 있는 거지?"

"그게... 나도 원래는 다른 애들처럼 좀 몽롱한 상태였거든? 근데 다른 머리들과 분리되면서 이성을 되찾은 거야. 여기로 넘어오게 된 경위는 나도 모르겠어."

울상을 지은 채 제발 좀 믿어달라고 싹싹 빌듯이 말하는 금발.

나는 그런 녀석에게 목줄을 채웠다.

녀석은 작게 움찔거리면서도 얌전히 있었다.

"그린 더스트 목줄을 채워도 멀쩡한 건가..."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서 신체의 구조가 안정적인 거지. 애초에 변신 상태니까 뭐."

지금 이 녀석은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상태다.

목줄을 차고 있으면 변신을 풀지도 못한다.

"너 얌전히 있어라?"

"멍! 멍! 왈왈!"

"아,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너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니?"

"기껏 이성을 되찾았는데 죽고싶지 않아! 제발 살려줘!"

아예 강아지 흉내까지 내는 녀석.

고분고분해서 좋긴 한데 보고 있으니까 머리가 아프다.

그 때, 김정태가 내게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

"저건 어떻게 하죠? 협회에 넘기실 겁니까?"

"아니. 걔네한테 맡기면 어떤 멍청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잖아. 일단 우리가 데리고 있자. 천천히 정보를 캐내다가 여차하면..."

"알겠습니다. 보관은 여기서 할까요?"

"아니."

나는 위험한 장비로 가득찬 창고를 둘러보며 주저없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저런 녀석을 사육할 수 있을만한 시설이 없다.

"만약 다른 머리가 쳐들어오거나 폭주하면 너희끼리 막을 수 있을 리도 없고... 일단 집으로 데려가야겠는데? 예리엘이 싫어하려나?"

"잠깐, 길드엔 뭐라고 하려고?"

"그냥 헌터펫이라고 우기지 뭐."

앨리스의 딴지에 대꾸하자 우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티아마트가 또다시 개소리를 해댔다.

"멍멍!"

"하지마."

"아, 미... 미안. 근데 거기 밥은 잘 나와? 아니. 그냥 조용히 있을게."

불행 중 다행으로 예리엘은 흔쾌히 녀석의 양육을 허락했다.

[어쨌든 무사하시다니 잘 됐네요. 여기도 잘 끝났어요! 그나저나 저도 하나 허락받아야 할 게 있는데...]

"응? 뭔데?"

[이번에 잡은 레이드 보스의 심장, 회사에 보내줘도 될까요?]

"뭐? 아, 아니... 그걸 왜 갑자기?"

내가 살짝 당황하고 있자 아까 물러났던 블랑쉬가 멋대로 통신에 끼어들었다.

[제가 요청했습니다 마스터. 해당 레이드 보스의 심장은 저와 상성이 매우 좋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 뭐 그렇다면야..."

이번 레이드 보스는 예리엘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들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것을 오라클의 재료로 써먹는다고?

나는 조금 불편한 기분이 됐지만 마스터로서 차마 그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원래 회사의 목적은 오라클의 개발과 존속. 다른 것은 어떻게 되든 좋다는 집단이다.

그런 회사가 이번 방어 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으니, 저거라도 내주는 것이 맞다.

사실 회사 내에서 오라클을 가장 사적으로 잘 써먹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 몸인 것이다.

[감사해요. 그럼 어서 집으로 들어오세요. 저도 지금 들어갈테니까.]

"... 근데 좀 바쁘지 않아? 몬스터 웨이브 뒷처리도 그렇고 아직 이것저것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묘하게 오싹한 느낌에 귀가를 살짝 미루려 했으나, 예리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긴 해도 저는 이미 은퇴한 사람이니까요. 이번엔 뒷풀이나 행사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아, 그... 그렇구나! 맞다, 은퇴했지. 너무 자연스럽게 출동해서 잊고 있었네. 빨리 들어와."

[네에.]

뚝.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옆에서 피로 회복제를 건네주는 김정태.

나는 그것을 받아마시며 용족을 데리고 차에 탑승했다.

"근데 얘는 뭐라고 부르지?"

"럭키 어때? 아니면 골드라든가."

"강아지 이름처럼 작명하지 마..."

옆에서 놀리듯 말하던 앨리스에게 핀잔을 준 나는 그냥 대충 정하기로 했다.

"티아마트의 일부니까 그냥 티아라고 하자. 괜찮지?"

"티아! 티아아!"

"이번에는 포켓몬이냐?"

작은 몸을 웅크린 채 열심히 울어대는 티아.

본인을 반쯤 죽여놓았던 예리엘과 재회하러 간다고 생각한 탓에 살짝 미쳐버린 모습이다.

운전석의 한예진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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