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기나긴 하루(4)
* * *
무섭게 밀려드는 마력의 파도 속에서 형상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잘 빠진 여성형의 몸매는 분명 매력적이었으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인간으로 오해할 여지는 아예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티아마트는 조금 더 위엄있게 생긴 녀석이었지만, 직접 봤던 적은 없어서 확신을 못하겠다.
"야, 쟤 진짜 티아마트야?"
"분위기는 비슷한데... 뭔가 약하네."
"!"
정체불명의 보스는 내 옆에 버텨선 앨리스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다음 순간, 전신에서 들끓어오르는 살의가 마력의 형태로 우리를 덮쳤다.
아무래도 앨리스를 알아본 눈치.
나는 수류탄을 하나 던져서 밀려드는 파도를 막아냈다.
그린 더스트는 최소한으로 썼다지만 저런 확산형 공격은 충분히 막을 수 있다.
파아앗!
녹색의 불씨와 마력의 파도가 공중에서 충돌하여 환하게 빛났다.
직후, 파도 속에 잠겨있던 놈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
해무 속에서 본모습을 드러낸 놈이 용의 머리를 드러내며 포효했다.
"예리엘 프로스트의 동료! 나를 잊었다곤 못하겠지!"
"쟤 원래 말도 했어?"
"아니."
앨리스도 무척 당혹스런 얼굴로 회중시계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능력과 내 능력은 상성이 매우 나빴다.
애초에 내 능력과 상성이 좋은 능력이 거의 없다.
"야, 그린 더스트 좀 치워봐!"
"옆으로 흩어지자."
"좋아."
파밧! 사악!
우리가 양쪽으로 갈라지자마자 그림자가 단두대처럼 종으로 날아들었다.
칼날을 받아들인 아스팔트 도로는 깨지는 것이 아니라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이렇다할 소음조차 없이 깊게 파여나간 도로.
나는 절단면을 보곤 능력의 정체를 짐작했다.
'그림자로 지우거나 빨아들이는 건가? 티아마트의 능력 중 하나군.'
티아마트는 사상 최강의 레이드 보스였던만큼, 능력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저건 티아마트의 머리들 중 가장 까다롭다고 여겨졌던 검은 색 머리의 능력!
나는 재차 날아드는 칼날을 그린 더스트 단검으로 막아내며 앨리스에게 물었다.
고순도의 그린 더스트 결정은 그림자의 칼날이 닿기도 전에 그것을 지워버렸다.
"야, 저거 옛날에는 어떻게 잡은 거야?"
"언니의 정지 능력으로 얼려두고 죽어라 팼어. 검은 색 머리는 제대로 놔둔 적 없어. 시작부터 끝까지 얼려놓았지."
"이런..."
예리엘도 저 능력이 가장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던 건가.
사실상 6개의 머리들 중 최강이라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고작 머리 하나에 너무 고전하는 것도 좀 아니다.
나는 원석 느낌의 그린 더스트 단검이 살짝 깎여나간 것을 보곤 속으로 혀를 찼다.
결국 촉매가 아니라 소모품의 일종이다보니 장기전은 불리하다.
원래 순도가 높을수록 오래 버티는데, 상대의 마력이 너무 강하다.
[마스터. 아군 호위 부대가 접근 중입니다.]
"오지 마! 휘말린다. 어차피 후딱 끝낼거야."
[알겠습니다.]
나는 무서운 기세로 거리를 좁혀오는 흑룡에게서 몸을 피하며 오라클에게 말했다.
내게서 완전히 멀어진 앨리스가 본격적으로 능력을 사용했지만, 소환이 되기 무섭도록 그림자에 삼켜진다.
앨리스의 소환물들은 대부분 지면에서 솟아오르는 방식이라서 상성이 매우 나빴다.
대형 버스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의 흑룡이 지체없이 나를 쫓았다.
"콰아아아!"
쿵, 쿵! 쩌어억...
한쪽 발을 내딛을 때마다 도로가 박살나는 수준의 체중.
제대로 붙으면 중장갑 전투복이든 뭐든 절대 못 버틴다.
흑룡은 머리를 옆으로 살짝 비튼 채 깨물기를 시도하며 돌진.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하며 단검으로 옆구리를 길게 그었다.
촤아악!
가죽에 닿자마자 두부처럼 갈라지는 비늘의 갑주.
그러나 나는 마음 편히 기뻐할 수가 없었다.
단 일격에 칼날이 절반 정도 소모됐는데, 정작 치명상을 입히진 못한 것이다.
체급차가 너무 커서 칼날이 급소까지 닿질 않았다.
다만 생명에 지장이 없을 뿐... 고통은 상당한 듯, 흑룡이 크게 몸부림쳤다.
나는 다급한 와중에도 앨리스에게 정중히 물었다.
"쟤가 너랑 극상성인건 알겠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줄 수 없니?"
"나와라!"
평소라면 단번에 싫은 소리를 해댔을법한 앨리스가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소환을 감행했다.
그래도 앞서 시간을 좀 들인 보람이 있는 듯, 살인토끼 따위와는 체급부터 다르다.
빛무리와 함께 소환된 것은 붉은 눈을 지닌 거대한 용이었다.
"재버워크냐?"
"내 소환물 중 유일하게 비행형이지."
괴상하면서도 위압적으로 생긴 재버워크는 날개를 지닌 덕에 그림자에 삼켜지지 않았다.
두 마리의 용은 서로를 보자마자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덕분에 여유를 조금 얻게 된 나는 주저없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재버워크를 돌격시킨 뒤 내쪽으로 합류한 앨리스가 그것을 보곤 이상 눈을 파르르 떨었다.
"뭐, 뭐야 그게?"
그녀가 당황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이번에 꺼내든 그린 더스트 조각은 순도가 높긴 커녕, 탁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척 봐도 품질이 좋지 않은 불량품.
나는 살짝 부끄러운 기분으로 변명했다.
"나도 매번 명품만 뽑을 수는 없거든?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가끔씩 이런 것도 나오는 거지."
"왜 하필이면 지금 뽑기에 실패하는 건데..."
"방금 뽑은 거 아니야."
"뭐야? 그럼 굳이 불량품을 가져온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 불량품에는 불량품 나름대로의 사용법이 있으니까."
쿠웅!
아쉽게도 흑룡을 가로막던 재버워크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앨리스를 뒤로 제치며 불량품 그린 더스트 덩어리를 오른손에 들고 조준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흑룡이 재차 내쪽으로 돌진했다.
"쿼어!"
지축이 울리는 가운데, 어렵사리 정신을 집중한 나는 그린 더스트를 앞으로 던지곤 황급히 몸을 날렸다.
"피해!"
"엇?!"
키잉!
앨리스를 안고 옆으로 뛴 직후.
등 뒤에서 강렬한 열파가 몰아쳤다.
살인적인 폭풍에 휩쓸린 흑룡은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크아아!"
폭풍의 소음과 열기가 놈의 비명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중장갑 전투복을 입고있는데도 등 뒤가 화끈하게 익어버리는 기분.
만약 내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앨리스는 심한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나마 우리쪽은 잔열만 살짝 받았을 뿐인데 이 정도다.
"와, 와앗!"
쿠우웅...
겨우 코너에 진입한 나는 고개를 비죽 내밀려고 하던 앨리스를 억지로 품에 안았다.
"나가지 마. 피폭당한다."
"뭣? 방금 그거 설마 핵분열 같은 거야?"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오히려 핵분열 생성물 같은 거지."
앨리스가 가락은 대충 잘 짚었다.
사실 내가 아까 꺼내들었던 불량품 그린 더스트는 평소보다 방사능이 너무 강하게 나와버린 물건이었다.
나는 흑룡의 생명이 사그라지는 소리를 감상하며 대략적인 원리를 설명해줬다.
"원래 그린 더스트의 방사능은 인체에 아주 치명적이진 않고, 그마저도 비교적 약한 편이야. 반감기는 약 10년 이상. 다시 말해서 10년 동안 천천히 절반 정도가 붕괴된다는 뜻이지."
"그, 그럼 아까 그 불량품은..."
"방사능 수치가 극히 높게 나온 불량품이지. 그린 더스트의 원래 기능인 마력 공유 결합 해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방사성 물질로서의 위험성은 훨씬 높아."
그린 더스트를 포함한 방사성 물질들은 원래 가만히 놔둬도 천천히 붕괴하는데...
적지 않은 경우, 이 과정은 고열의 발생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무기로 쓸 수 있는 수준까진 아니다.
그린 더스트의 반감기는 약 10년 이상.
물론 이것도 방사성 물질 치곤 매우 짧은 편이지만,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중에선 제법 긴 축에 속한다.
그래서 나는 능력을 이용하여 불량품 그린 더스트의 붕괴를 가속시켰다.
"원래 10년, 20년에 걸쳐서 천천히 흘러나와야 할 분량이 1초 안에 압축돼서 터져나오는 거지."
"세, 세상에 그런..."
그 위력은 보다시피 추정 S랭크의 레이드 보스를 일격에 소멸시킬 정도다.
내가 괜히 서울 정도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전투복의 가이거 계수기가 미친 듯 울어대는 것을 보면서도 자세한 수치를 살피곤 안심했다.
"예상보다 훨씬 낮군. 흑룡의 몸이 방사선을 대부분 흡수해줬어. 방사능 억제에 특화된 헌터들이 오면 어렵지 않게 수습할 수 있을 거야."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그린 버스트군요?]
"그린 버스트?"
"매튜가 그렇게 부르더라고. 난 별론데. 그나저나 블랑쉬 너는 이미 영상자료로 본 적 있지 않냐?"
[이렇게 직접 보는 건 다르죠.]
"어차피 너한테는 똑같은 영상자료잖아..."
[너무하셔요! 그래도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 흥미진진한걸요.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직접 관람의 힘인가봐요.]
"그게 그렇게 되냐?"
나는 비로소 앨리스를 놓아주며, 근처까지 굴러들어온 흑룡의 머리 중 일부분을 집어들었다.
초고열의 폭풍에 휩쓸린 흑룡은 시체도 온전히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멀쩡한 몸통 부분은 검게 타버린 채 매캐한 연기를 내뿜는 중이고, 팔다리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아스팔트의 중앙부는 완전히 녹아내려서 거의 다 증발해버렸으며 가장자리도 액체 내지는 유리처럼 변했다.
원래 아스팔트라는 게 저렇게 깨끗하게 녹아버리는 것이었나 싶다.
"후우, 그나저나 저놈은 뭐였지? 정말로 티아마트의 일부분이었던 건가?"
"일단 티아마트였던 건 확실해."
내게 와락 안겼던 앨리스가 얼굴을 붉히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던 찰나.
전투복의 센서가 또다시 삐익삐익 울어대기 시작했다.
블랑쉬는 순식간에 진지한 어조로 돌아왔다.
[조금 전과 유사한 마력 패턴 접근! 하지만 반응은 훨씬 약합니다.]
"또 온다고?"
철컥!
우리가 다시 전투 태세를 갖추자 코너에서 금발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전의 흑룡보다 훨씬 작은 키에, 빈약한 몸매.
장난스러우면서도 사악한 웃음을 머금은 녀석이 살짝 지쳐있는 우리를 보곤 즐겁게 지껄였다.
"설마 이 정도 몬스터 웨이브로 지친 거야? S랭크 헌터란 것도 허접하네."
"..."
아까전의 흑룡보다 훨씬 뛰어난 언어능력을 보여주고 있건만, 그것이 썩 반갑진 않았다.
나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녀석을 내려다봤다.
화려한 옷차림의 금발 여인은 자그마한 뿔과 꼬리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쪽도 티아마트의 머리 중 하나인 건가.'
"이번엔 금색이네?"
"아, 뭐야. 벌써 다른 녀석을 만난 거야?"
살짝 입을 가리며 놀란 체 하는 금발.
나는 녀석이 용으로 변신할 것에 대비하여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이번 녀석은 좀 말이 통하는 상대 같아서 일단 정보를 얻으려고 시도했다.
"너희들은 뭐야? 정말로 티아마트 군단이냐?"
"보면 몰라? 내가 바로 티아마트 그 자체다 이 바보 헌터야!"
안쓰럽게도 가슴을 쭉 펴며 성질을 부리는 금발의 용.
녀석은 고맙게도 본인의 정보를 술술 불어줬다.
"지난번에 그 무서운 여자에게 입은 상처가 덧나서 6개의 머리가 모두 분리됐거든. 덕분에 이 몸은 다른 난폭한 자매들에게서 겨우 해방됐다는 거지. 솔직히 조금 정도는 감사하고 있어."
"아... 그래?"
이 녀석들, 머리마다 각각 다른 자아를 가지고 있었던 건가?
확실히 연구 보고서에서 그런 가설을 본 것 같다.
어쨌거나 예리엘에게 패퇴했던 티아마트가 이토록 약해졌다면 다행이다.
지금이라면 나 혼자서도 거뜬히 해치울 수 있다.
내가 금색 머리도 처치하기 위해서 손을 살짝 들어올리자, 금발의 시선이 나와 앨리스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흑룡의 거대한 시체를 발견한 녀석은 살짝 얼빠진 얼굴이 됐다.
"자... 잠깐만. 저거 뭐야?"
"보면 모르냐? 네 '난폭한 자매들' 중 하나다."
내가 녀석의 표현을 존중해주고 있자 금발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제자리에서 움찔움찔거리던 녀석이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흰색이었어?"
"왜, 흰색이 너희들 중 최약체인 모양이지?"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열심히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하는 금발은 거짓말을 진짜로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흑룡의 머리 파편을 툭 던져줬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머리와 고열에 타들어간 눈구멍을 발견한 금발이 동작을 멈춘 채 잠시 침묵했다.
"..."
아무리 그래도 가족의 시체를 던져주는 건 좀 너무했나?
내가 작게 후회하며 격분한 놈과의 전투를 각오하던 찰나.
녀석이 갑자기 양손을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항복!"
"뭐?"
"너희들에게 항복할게! 부디 제네바 협약에 따라서 정중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어!"
"..."
잔뜩 겁먹은 금발의 얼굴은 도저히 농담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앨리스와 나는 무척 황망한 심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