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기러기의 노래(1)
* * *
불행 중 다행으로, 앨리스는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도 예리엘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겠지.
내가 애써 떳떳하게 업무를 진행하려는데 돌연 아직 켜지도 않았던 업무용 노트북이 저절로 켜졌다.
옆에 있던 앨리스가 살짝 놀라거나 말거나. 나는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물론 머릿속은 나도 그녀 못지않게 심란했다.
'오라클? 갑자기 뭐지?'
파란 화면 위에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공지였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그 내용을 확인하곤 화면을 전환시켰다.
[시스템 점검으로 인하여 마스터 이제현 및 휘하 인원들의 할당량 70% 감소]
'큭. 매튜, 이런 건 정기 회의에서 미리 말했어야지... 너한텐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거냐?'
개발 담당 마스터인 매튜 마누엘이 벌써 행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공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앨리스가 옆에서 조용히 물었다.
다행히 아침이라서 사무실은 적당히 바빴다.
"할당량이 뭐야? 갑자기 왜 줄어든다는 건데?"
"지난 회의에서 논의됐던 오라클 인공지능 부여 작업... 그걸 시작해서 오라클의 기능이 제한되는 거야."
"아하. 그럼 마음대로 못 써?"
"쓸 수는 있지만, 조금 더 신중하게 써야하지."
이건 스마트폰으로 따지면 데이터 전송량이 팍 줄어든 것이나 다름없다.
긴급 상황에 대비하여 할당량을 20% 이상 남겨둬야 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평상시엔 오라클의 연산능력이 거의 10%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리엘도 공지를 받곤 내게 메세지를 보냈다.
[수사대 대원들과의 업무 연락은 어떻게 하죠?]
[그건 할당량 거의 안 써. 당신은 평소처럼 해줘.]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현재 대원들은 예리엘에게 업무지시도 받고 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애써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분간 오라클 없이 해볼까."
"할 수 있어?"
"내가 못 할 것 같냐?"
사실 대부분의 범죄들은 굳이 오라클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특수대는 합법적으로 통신 내역을 조회할 수 있고, 기지국과 연계하여 스마트폰 위치추적까지 가능하다.
물론 큰바다 이재한 때처럼 집에 가만히 앉아서 결정적인 증거물을 입수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예 못 할 것 같진 않다.
"어차피 오라클이 필요한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게 자주 일어나면 그게 바로 세기말이지."
"근데 좀 있으면 진짜로 세기말이잖아?"
"아직 10개월 넘게 남았거든?"
나는 앨리스와 평소처럼 작게 투닥거리며 대원들에게 업무를 분배했다.
며칠 동안 푹 쉰 나는 감을 좀 되찾을 겸, 가장 큰 사건을 골랐다.
"정태야?"
"네, 팀장님."
"제일 골 때리는 걸로 하나 가져와줘."
"마침 좋은 게 있습니다."
김정태는 내 부활에 희희낙락하며 냉큼 파일을 하나 건네줬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앨리스가 무척 걱정스레 물었다.
"이번엔 또 뭔데?"
"그냥 평범하게 헌터가 엮여있는 살인 사건이야."
납치 강간에 공매도 주식 사기, 조폭이 엮인 연예계 성접대에 사이비 교단까지 수사해보니까 이 정도는 아주 정상적인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부사항을 살펴본 나는 얼굴을 조금 굳힐 수밖에 없었다.
사건이 엄청 거창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내 양심을 찔러대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현역 헌터가 아내를 살해했는데... 불륜 때문에 이혼 소송 중이었네?"
"네에? 누가 불륜을 했는데요?"
그나마 좀 한가하던 서지유가 목소리를 높여서 묻자, 이서우와 다른 팀원들까지 자연히 주목하게 됐다.
나는 마음 속에서 그녀를 씹어대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살해당한 아내쪽이 외도를 저질렀어."
"이야.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좀 너무하지만, 심정은 이해가 되네요."
덜컥!
나와 앨리스는 서지유의 말에 가슴이 무척 아팠다.
그러자 이서우도 웬일로 본인의 감상을 드러냈다.
"그 사건은 이미 유명합니다. 불륜은 용서받을 수 없죠."
"야. 그래도 꼴랑 그 정도로 사람을 죽여대면 어떻게 하냐?"
내가 아내쪽을 변호하듯 말하자 두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팀장님께서 웬일이래요? 평소엔 유죄추정부터 하시던 분이."
"그야 팀장님은 불륜 같은 건 꿈도 못 꾸시겠죠."
"아아. 하긴, 팀장님의 부인께선 예쁘고 돈도 많고 성격까지 좋으니..."
"..."
이거, 내가 점점 쓰레기가 되어간다.
앨리스도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했던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불륜인 것이다.
당시에는 예리엘의 암묵적인 허락 비슷한 게 있다고 생각해서 그냥 얼렁뚱땅 넘어갔는데...
그게 알고보니 앨리스의 거짓말이었다.
물론 나도 유혹에 넘어가버렸으니 앨리스를 일방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팀원들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심지어 부인께서 먼저 프로포즈까지 하셨으니..."
"얘, 얘들아. 일하자. 일."
"넵."
겨우 그들을 진정시킨 나는 시선을 사건 파일로 되돌렸다.
피고인은 이미 범행 직후 구속된 상태.
게다가 범행 당시를 촬영한 영상까지 있다.
'이건 뭐... 그냥 기소만 하면 끝나는 수준인데?'
공공장소에서 칼로 찌르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염동력으로 심장을 부쉈다.
피고인은 염동력 능력을 지닌 헌터이니 이미 범죄 사실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
관련 자료를 열람하고 피고인을 심문하러 가자 앨리스는 물론이고 서지유까지 나를 따라왔다.
"지유 씨, 할 일 없어?"
"팀장님을 보좌하는 게 제 업무죠."
"커피 심부름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군."
그렇다고 다른 일을 시키기도 좀 뭣해서 일단 함께 구속실로 내려갔다.
피고인, 김우주는 상당히 핼쑥한 인상이었다.
원래는 조금 더 살집이 있지만 식사에 거의 손을 대지 않은 듯한 모습.
그는 나를 대면하자마자 살짝 겁에 질렸다.
이젠 내 이름과 얼굴도 꽤 알려진 모양이다.
"이, 이제현 수사관님?"
"안녕하십니까 김우주 씨. 서로 편하게 가..."
"수사관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애들 엄마, 제가 죽인 것 아닙니다!"
"..."
나는 의외의 사태에 살짝 당황했다.
이미 결판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건인데 이토록 강하게 혐의를 부정하다니.
길드의 변호사가 이렇게 시키진 않았을텐데?
그를 조금 진정시킨 뒤에 사건의 개요를 정리해봤다.
"김우주 씨, 31세 A랭크 헌터. 대형 길드 소속의 염동력 능력자. 배우자와 이혼 소송 중이었으며, 휘하의 자녀는 2명. 각각 8세와 7세. 틀린 사항은 없죠?"
"그... 그렇습니다."
"사건 당일, 김우주 씨는 각자의 변호사를 대동한 채 이혼 소송 중이던 배우자와 카페에서 면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화 도중 언성이 격해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구요."
"트, 틀린 사항 없습니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슨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몰라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배우자 분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도착 전에 사망. 사망 진단 당시 심장이 완전히 뭉개져 있었습니다. 다른 외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죠.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말싸움 도중 감정이 격해져서, 김우주가 염동력으로 심장을 짓뭉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협회 측에선 김우주를 즉시 체포했다.
부검 결과 심장에서는 마력 반응까지 나왔다.
일단 김우주의 부인이 염동력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주장을 하고싶으신 거죠?"
"제,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제가 죽이지 않았다구요!"
"김우주 씨. 조금 진정하시죠.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잘 들립니다."
"아앗... 죄송합니다."
내가 주의를 주자 금방 쪼그라드는 김우주.
확실히 감정변화를 주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목소리에서는 절절한 억울함이 느껴졌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혹시라도 심신미약 따윌 주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럼... 염동력을 사용한 것은 본인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뇨. 그것도 아닙니다. 제가 짬이 얼마인데 그런 실수를 하겠습니까? 아무리 감정이 격해져도 능력을 함부로 휘두르진 않습니다."
이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김우주는 해외 파견까지 다녀온 엘리트 헌터.
이제와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 보긴 힘들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 있었던 헌터는 김우주 씨 한 분밖에 없습니다. 범행에 쓰인 능력의 계통도 일치하구요."
"그, 그게 중요한가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이런 류의 헌터 범죄에선 피고인의 능력을 중요하게 보니까요."
나는 내가 변호사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면서도 성실하게 설명해줬다.
범죄능력.
비단 헌터 업계에서만 쓰이는 말은 아니고, 말 그대로 '용의자가 위법 행위를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를 보는 것이다.
다만 헌터 범죄에선 의미가 조금 다르다.
만약 피해자가 얼어죽었는데 용의자가 텔레파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용의자는 범인으로 인정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범죄에 사용된 능력과 용의자의 능력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나는 그를 과하게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염동력으로 심장마비를 연출하려고 했는데, 힘이 지나쳐서 심장이 파열됐다...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볼 수도 있죠."
"그러니까, 저는 염동력을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는 염동력으로 죽었구요."
"수사관님. 만약 제가 범인이었다면, 그렇게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을 겁니다. 그 여자를 좀 더 은밀하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수천가지는 더 있었다구요!"
나는 김우주의 항변을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아내가 사망하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김우주인데, 굳이 그곳에서 범행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의심스럽긴 하다.
"비슷한 능력을 지닌 헌터에게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고 싶은 겁니까? 염동력은 비교적 흔한 능력이긴 하죠."
"바로 그겁니다! 역시 수사관님은 알아주시는군요!"
김우주는 동앗줄이라도 잡은 듯한 얼굴이 되어서 나를 올려봤다.
나도 오늘따라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서 그에게 재차 물었다.
"불륜을 저지른 부인을 심판하고 싶진 않으셨던 겁니까?"
"물론 심판하고 싶었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살인까지 저지르겠습니까? 저희는 이미 이혼 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 알겠습니다. 이 건은 조금 더 조사해보죠."
나는 결국 그런 소리를 하며 심문실을 나섰다.
사실은 나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라도, 무턱대고 죽여도 될 리가 없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도 피의자의 결백을 믿고 싶어졌다.
"티, 팀장님? 이 건을 조금 더 조사한다니..."
"김우주 씨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하잖아. 지금 있는 거라곤 정황 증거밖에 없고. 거의 현행범 취급이긴 하지만, 현장에는 헌터 전문가도 달리 없었어."
"그야 그렇지만요."
"지유 씨는 가만히 있어."
앨리스도 모처럼 나와 일심동체가 되어서 구속실을 나섰다.
서지유는 내 변화에 할말을 잃은 채 졸졸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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