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28화 (28/131)

〈 28화 〉 회사(1)

* * *

멸망까지 약 320일.

나는 회사의 정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휴가를 제출했다.

나와 예리엘의 국외 여행 신청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통과됐다.

아무렴. 예리엘 프로스트가 신혼 여행 좀 가겠다는데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문제는 앨리스의 국외 여행 신청 또한 같이 통과됐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행 항공권을 들고 국제공항에 도착한 나는 예리엘의 손을 잡고 최대한 태연히 걸었다.

예리엘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외모는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옆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앨리스도 있어서 도저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예리엘의 정신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그녀는 드물게도 내게 투덜거리며 여행용 캐리어를 끌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등석까진 필요없다니까요."

"10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이야. 좀 편하게 가서 나쁠 건 없잖아."

"하지만 예산이..."

"이거 회사에서 사주는 거니까 그냥 타자. 응?"

내가 싹싹 빌다시피 말하자 겨우 납득하는 예리엘.

그러자 이번에는 앨리스가 난리였다.

평소보다 가볍게 차려입은 그녀는 나와 예리엘의 안전을 책임지는 호위 담당으로서 냉큼 물어왔다.

참고로 김정태는 서지유와 이서우를 보호해줄 겸, 한국에 잔류하게 됐다.

"그런 걸 대놓고 받아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참고로 여기가 우리 목적지야."

나는 지갑 속에서 제법 오래된 사원증을 꺼내서 보여줬다.

앨리스는 그것을 받아들곤 눈썹을 살짝 떨었다.

사원증에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반도체 제조회사의 이름이 쓰여있었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저 사원증은 100% 진짜다.

"뭐야 이게? 너 언제 여기 입사했어?"

"북두칠성 사건이 대충 정리된 이후, 좀 방황하던 시기에. 너 지난번에 뉴스 제대로 안 봤구나?"

"이거 진짜야?"

"위조 경력 같은 게 아냐. 실제로 업무도 했어. 대 헌터용 보안체계 구축 작업이었지."

예리엘은 이미 알고있었다는 듯 엷게 웃었다.

하긴, 오라클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 회사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앨리스는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눈치였다.

"그럼 '회사'라는 게..."

"말 그대로 그 회사지."

나는 옛 직장이 있었던 캘리포니아를 이번 신혼 여행 장소로 선택했다는 설정이다.

겸사겸사 회사 관광도 하려고 했지만, 그냥 얌전히 호텔에 처박혀서 사랑을 나누게 됐다는 시나리오.

덕분에 예약해놓은 호텔도 최고급이다.

물론 실제로는 남들 몰래 정기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럼 오라클의 본체는 이 회사의 본사에 있는 거야?"

"그래."

너무도 깔끔한 긍정에 기가찬 앨리스.

"그, 조금 더 어둡고 외진 곳에 숨겨놓을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어차피 오라클의 운영을 위해선 대규모의 시설이 필요하단 말이지. 주로 냉각 문제 때문에."

"아..."

고성능의 컴퓨터들이 대개 그렇듯, 오라클도 발열을 잡기 위해서 고생깨나 했다.

그 밖에도 유지보수에 필요한 게 많아서 그냥 본사 지하에 놔두고 있다.

옛말에 나무를 숨기려면 숲 속에 숨기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우리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예리엘은 의외의 부분을 지적했다.

"둘이 사이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안심이에요."

"그런가?"

"네. 특히 앨리스의 반응이 많이 부드러워졌네요."

"아, 아니거든?"

앨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으나... 사실 나도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다.

확실히 지난번의 대화 이후로 눈에 띄게 분위기가 나아졌다.

그 전까지 녀석은 나를 미치광이 살인마요, 범죄자를 잡기 위해선 무엇이든 하든 인간말종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이 크게 틀린 소리도 아니다.

하지만 내게도 최소한의 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조금 더 순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낯뜨거운 소리 그만하고 얼른 탑승 수속 시작하자. 우리같은 헌터들은 오래 걸리니까..."

시간에 거의 딱 맞춰서 탑승 수속을 시작한 우리는 무난하게 태평양을 건넜다.

그런데,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 돌연 화장실에 가던 승객 하나가 덜컥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예리엘은 승무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 혹시 응급 처치가 가능한 능력을 가진 헌터나 의사분이 계시면..."

"제가 한 번 살펴볼게요."

"아앗, 감사합니다."

예리엘은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곤 엷게 웃더니 정지 능력으로 그를 얼렸다.

저걸로 상태가 더욱 악화되진 않을 것이다.

"정확히 3시간 뒤에 풀릴 거에요. 그 전까지 이송할 수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

나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연극에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건 미국 측에서 준비한 일종의 입국심사인 것이다.

아무래도 진짜 예리엘이 입국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모른 체 하고 있을 수도 없고... 유명 헌터도 참 불편하겠어.'

작은 소란을 거쳐서 샌프란시스코의 호텔에 도착한 우리는 냉큼 짐을 풀어놓았다.

다행히 호텔은 거의 전세를 내다시피한 상태.

다른 숙박객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 회사 관계자들이다.

우리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한예진이 고개를 깍듯이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마스터. 여행은 편안하셨나요?"

"그럼 바로 준비할까?"

"네!"

나는 한예진과 단둘이 자리를 옮겨서 그린 더스트를 만들어냈다.

원래는 조금 더 일찍 보급을 해줬어야 하는데 어차피 정기회의가 예정되어 있어서 뒤로 미뤘던 것이다.

스스슷...

"좋아, 이걸로 선물은 준비가 끝났고... 회사에선 별 말 없지?"

"네. 내일까지 푹 쉬시다 모레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부... 부인과 함께 회의에 참석하시는 것도 전달해놓았습니다."

"잘했어. 그런데... 내가 주문했던 물건은?"

"물론 완성됐죠!"

아직 예리엘을 많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은 한예진.

나는 그녀의 선물을 받아들곤 음험하게 웃으며 침실로 이동했다.

예상만큼 호화롭진 않아도 깔끔한 침실에는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어때? 괜찮아?"

"너무 마음에 들어요. 딱 제 취향이네요."

"성녀님께는 너무 소박한 게 아닌가 싶은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여긴 안전한 건가요?"

갑자기 보안 문제를 걱정하는 예리엘.

나는 좀처럼 없었던 질문에 허둥지둥 설명해줬다.

"당연하지. 주변 건물들까지 모두 확보해뒀어. 정태가 없는 게 좀 아쉽지만, 수석 에스콰이어가 직접 지휘했어."

"에스콰이어들의 대표가 따로 있었군요? 그럼 안심이네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에리엘.

이젠 내가 선물해준 목줄이 없으면 허전한 모양이다.

아쉽게도 그걸 들고 세관을 통과할 자신은 없었다.

대신 나는 나름대로 선물을 준비해뒀다.

"평소에 쓰던 건 없지만... 대신 이건 어때?"

"아앗?"

내가 한예진에게 주문했던 것은 한 쌍의 반지였다.

정교하게 세공된 백금 반지를 베이스로 작은 보석을 박아넣은 물건.

예리엘은 곧바로 보석의 정체를 알아봤다.

이것은 같은 무게의 금이나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비싼 것이었다.

"이, 이건..."

"최고순도의 그린 더스트를 최대한 에메랄드처럼 가공했지. 내 컨디션이 최고조였을 때 뽑아냈던 걸작이야. 방사능 차폐도 확실하니까 걱정할 필요없고... 참고로 이렇게 돌리면 기능을 켜고 끌 수가 있어."

나는 보석 부분을 손가락으로 돌려보며 시범을 보여줬다.

이 기믹을 실현하기 위해서 회사의 힘까지 빌렸다.

다행히 예리엘은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멋져요. 세상에 이런 결혼 반지라니..."

"타이밍이 좀 늦었지만, 받아줄래?"

"받아도 되는 건가요? 정말 고마워요. 이런 멋진 선물을 주시다니... 너무 기뻐요."

그녀는 기꺼이 반지를 착용한 다음 냉큼 보석을 돌렸다.

나는 그것을 다시 한 바퀴 돌려서 꺼버리며 그녀를 말렸다.

"시, 식사 해야지."

"아... 그렇죠."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나와 함께 방을 나서는 예리엘.

앨리스와 합류하여 훌륭한 식사를 즐긴 우리는 조용히 실내 수영장으로 향했다.

은은한 조명으로 근사하게 밝혀진 실내 수영장에 들어선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예리엘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모습에, 나는 칭찬보다 걱정의 한 마디부터 하게 됐다.

"그거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로 입지마."

"그럴게요."

예리엘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중.

분명 전세내놓았던 수영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비키니 위에 셔츠를 걸친 앨리스는 예리엘을 보고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달려들었다.

그녀의 몸매에 비하면 너무 과감한 수영복이 아닌가 싶었지만, 골반이 도드라져서 나름대로 느낌은 있다.

"여기에 다른 사람 왔으니까 얼른 벗어!"

"어머, 언니랑 타인이 되고싶은 거야?"

"됐으니까 얼른!"

앨리스는 아예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찰싹 달라붙은 우리들의 사진까지 찍어댔다.

이 건방진 녀석을 진짜 쫓아내야하나 싶던 중.

내 정신이 아득해지는 협박이 시작됐다.

"다, 당장 갈아입지 않으면 이 사진을 뿌리겠어!"

"... 그러니까, 지금 부부끼리 오붓하게 있는 사진을 뿌리겠다고 협박하는 거냐?"

저 녀석, 야한 만화를 너무 많이 봤군.

그런데 앨리스는 쓸데없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 걸? 예전에 언니랑 악수했다가 다음 날 언니 극성팬에게 칼 맞은 헌터도 있었으니까!"

"저, 정말?"

"네에..."

예리엘이 불행한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진짜로 있었던 일인 모양이다.

아무래도 예리엘과 길드의 명예를 위해서 보도를 제한했으리라.

이어진 설명은 더욱 기가 찼다.

"심지어 저와 악수를 했던 건 여자였어요..."

"미쳤네."

"그래도 괜찮아요. 서방님의 곁에는 제가 있으니까."

"아아앗!"

아무리 여신 취급을 받는 예리엘이라지만 그 정도의 극성팬이 있었다니.

하지만 예리엘은 앨리스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그녀의 앞에서 보란듯이 입을 맞췄다.

앨리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내 귀를 즐겁게 간질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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