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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1위 헌터의 남편이 됐다-2화 (2/131)

〈 2화 〉 서장(2)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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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해서 혼내주기.

제네바 협약과 학교 폭력 예방법을 비롯한 수많은 조약 및 볍률에 의하여 엄격히 금지된 행위다.

그러나 예리엘 프로스트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아주 가뿐히 실행해버렸다.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던 와중에, 아주 어렵게 그 자리를 벗어난 나는 즉시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네, 마스터.]

통화 연결음 한 번 없이 즉답하는 상대방.

나는 운전석에 몸을 던져넣으며 빠르게 말했다.

저 뒤쪽에선 은퇴 기념식을 촬영하던 기자들이 내 차를 막아설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집에 가서 모든 장비와 자료를 처분해. 일 끝나면 불이라도 질러."

[가스 누출로 할까요?]

"아니. 그건 좀 어색하잖아. 그냥 예리엘의 극성팬이 불이라도 지른 걸로 하자고."

[... 도대체 어디서 들킨 걸까요?]

"이제와서 고민해봤자 소용없어. 이미 일어난 일이야."

부우웅!

집에 증거가 될만한 것은 거의 없지만 일단 소각하기로 했다.

주차장의 출구를 막아서려던 기자 한 명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자 스마트폰 건너편의 부하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 여자도 죽일까요 마스터?]

"지금 죽이면 누가 의심받겠냐? 애초에 그게 그 여자 노림수야."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빨리 처리해. 아, 참. 내 워해머 모델들은 따로 챙겨서..."

[혹시 이상하게 생긴 플라스틱이랑 석고 조각들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거 맨 먼저 버렸는데...]

거 참 빠르기도 해라! 내가 붙잡혀있었던 사이에 미리 가있었던 건가?

나는 미련없이 내 콜렉션을 포기하기로 했다.

뚝.

전화를 끊은 뒤에는 곧바로 현재 방영중인 뉴스를 찾아봤다.

은퇴식 행사 덕분에 도로 통제가 들어가있어서 길은 탁 트여있었다.

도로 통제 표지판을 박살내며 이동하던 나는 뉴스의 내용에 기가 찼다.

무슨 케이블도 아니고, 공영방송이란 작자들이 벌써부터 내 프로필을 줄줄 읊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33세 남성 이모씨로, 8년 전에 수원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그러나 이모씨는 그로부터 불과 2년 뒤 중대한 직무위반을 이유로 해임 처분을 당했습니다.]

[이모씨는 당시 한국 최대규모의 길드였던 북두칠성의 비리를 파헤치고 있었다는 것으로 알려져서 뒤늦게 시민들의...]

"염병."

그 짧은 시간에 얼굴만 보고 잘도 여기까지 조사했다.

내가 조금 전에 사람을 죽였더라도 이렇게 난리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예리엘 프로스트의 고백을 받은 남자'라는 특종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원래 범죄자들의 신상은 철저하게 보호해주면서, 죄없는 시민들의 정보는 사정없이 까발리는 것이 언론이라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억울했다.

"나도 사실은 어엿한 범죄자란 말이다... 다른 쓰레기들처럼 보호받을 권리가 있어."

내가 분통을 터뜨리며 도착한 곳은 시내의 적당한 호텔이었다.

숙소는 조만간 불타버릴 예정이니까, 이곳에 묵는 것이 낫겠지.

호텔의 종업원들은 내 얼굴을 보고 살짝 당황했으나 접객의 프로답게 굴어줬다.

벌써 얼굴이 이만큼 퍼지다니. 예리엘의 이름값이 참 대단하긴 하다.

'당분간 성형수술 같은 건 어림도 없겠군. 어찌어찌 감시를 떨쳐낸다 해도 업자가 도망쳐버릴테니.'

이래서야 신분세탁 같은 건 물건너갔다.

나는 옷을 좀 풀어헤치곤 TV를 돌려봤다.

불행히도 오늘의 뉴스는 이제 막 불이 붙어가는 중이었다.

현역 시절에 열애설 한 번 돌지 않았던 예리엘 프로스트가 은퇴를 선언한 직후에 곧바로 청혼했다니,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제대로 당했네."

이제와서 그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할 수도 없다.

일단 상황이 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때마침 뉴스에서 급보가 흘러나왔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내용인지라 놀랍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이태원에 위치한 이모씨의 자택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띠리리리!

나는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잘 처리했어."

[마스터! 저거 제가 한 거 아녜요!]

"... 뭐? 그럼 장비랑 자료들은?"

[그것들은 모두 처분했는데, 제가 불을 지르기 전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했어요. 아무래도 헌터 능력인 것 같습니다.]

돌겠다.

설마 진짜로 예리엘 프로스트의 극성팬이 불을 지른 것인가?

만약 헌터 능력으로 불을 질렀다면 증거도 제대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됐으니까 이만 쉬어."

[죄송합니다 마스터.]

더 이상 뉴스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오늘은 이만 목욕을 하고 잠들었다.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옷을 걸치곤 객실을 나섰다.

모처럼 비싼 호텔에 왔지만 조식 뷔페를 이용할 여유따윈 없었다.

내 객실 앞, 복도에는 매니저로 보이는 직원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쓰게 웃으며 로비로 내려갔다.

짐작대로, 내 소재는 밤새 알려진 상태였다.

호텔의 로비에는 아침 일찍부터 달려온 헌터들이 잔뜩 있었다.

차마 완전무장을 하진 못했지만, 저마다 창이며 칼 따위를 하나씩 지니고 있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5성급 호텔에서도 이러는 건가.'

자기들 딴에는 언제 어디서나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한다고 하지만...

이래서야 나처럼 선량한 범죄자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가 없다.

그러나 감히 그들을 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시대의 헌터들은 명백한 특권계층이다.

나는 체크아웃을 위해서 카운터로 향하며 로비를 천천히 둘러봤다.

로비의 구석진 테이블에는 오래전에 몰락한 북두칠성 길드의 전 길드원 몇몇이 흉흉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다른 헌터들은 대부분 심심풀이 겸 별 생각없이 온 것 같았다.

그나마 기자와 카메라맨 등은 호텔 측에서 쫓아내준 것 같아서 다행이다.

긴장감 속에서 체크아웃을 마치자 괜히 죄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직원들.

그대로 몸을 돌리자 전 북두칠성 길드원들이 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보아하니 나 때문에 북두칠성 길드가 몰락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불행히도 그들이 옳았다.

만약 내가 검사 시절에 그들의 비리를 파헤치지 않았다면, 북두칠성은 여전히 대한민국 1위의 길드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제현 전 검사님. 잠시 같이 좀 가주시지."

"제가 왜 가야하죠?"

"간밤에 자택이 홀라당 타버리셨던데, 순순히 같이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

설마 이놈들이 어제 불을 질렀던 건가?

확실히, 북두칠성의 전 길드원들이라면 내게 앙심을 품을만하다.

놈들은 내가 순순히 따르지 않자 억지로라도 끌어낼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다른 헌터들이 이걸 말려야하나 싶으면서도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던 중.

굳게 닫혀있던 로비의 대문이 활짝 열렸다.

입구를 통제하고 있던 직원들을 지나치며 입장한 것은 작은 키의 헌터였다.

정장도, 캐주얼도 아닌 기이한 느낌의 옷을 입은데다, 길게 기른 금발과 옷의 곳곳에 리본을 줄줄이 달고있는 여성.

원래는 귀여웠을 얼굴은 스트레스로 험악하게 변해있었다.

무슨 깡패처럼 오만상을 찌푸리며 저벅저벅 걸어온 그녀가 전 북두칠성 길드원들에게 짧게 말했다.

"야, 꺼져."

"칫..."

"운 좋은 줄 알아라."

다 큰 남정네들이 자기 가슴께 정도밖에 안 오는 여자에게 겁먹고 물러났지만, 그것을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리스 윈터는 어제 은퇴식에서 예리엘 프로스트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여자다.

당연히 같은 길드 소속이고, 성깔이 무척 더럽고 사나워서 예리엘 말곤 아무도 못 말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윈터킹덤 길드의 비공식 마스코트 겸 주력 멤버인 그녀는 다음으로 내게 손짓했다.

"예리엘 언니가 너 데려오래."

"..."

아쉽게도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제는 너무 경황이 없기도 했고, 가만히 있으면 맞아죽을 것 같은 분위기라서 일단 도망쳤지만...

이대로 나 혼자 어떻게 해볼 수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리엘 프로스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좀 궁금하기도 했다.

곱게 앨리스를 따라나선 나는 운전기사가 딸린 차에 탑승했다.

차는 예리엘과 그녀가 소속된 길드, 윈터킹덤의 본사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묵직해서 잘 흔들리지도 않는 차 안에서 앨리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너 언니랑 도대체 무슨 사이야?"

"... 본인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무말도."

"그럼 저도 말 안 하는 게 낫겠네요."

앨리스는 끄응, 하고 불만스럽게 신음했으나 무어라 더 하진 않았다.

높게 솟은 고층빌딩에 도달한 우리는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상층으로 이동했다.

'예리엘 프로스트는 은퇴했다면서 멀쩡히 길드 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건가.'

사실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아까 봤던 것처럼, 헌터란 놈들은 마음만 먹으면 5성급 호텔 로비에서도 깽판을 칠 수 있는 놈들이다.

그런 세계의 정점에 도달했던 예리엘이 이제와서 평범한 주택을 이용할 수는 없겠지.

이런 길드 건물이라면 보안도 확실하다.

실제로 길드 건물에서 거주하는 헌터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런 금싸라기 땅의 고층빌딩을 주거용으로 쓰는 것은 보통이 아니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거야?'

띠링!

곧이어 엘리베이터가 멈춰서자 생글생글 웃고있는 예리엘과 그녀의 생활공간이 드러났다.

대문은 우리를 위해서 활짝 열려있었다.

누가 보면 길드 본사가 아니라 고급 아파트인 줄 알겠다.

"아, 어서 오세요 제현 씨. 어제 제 고백이 너무 갑작스러웠죠? 저도 좀 반성하고 있어요."

"정말요?"

내 반문에 앨리스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예리엘은 그저 웃었다.

나는 호랑이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온 듯한 기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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