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238. (P)경계의 안쪽에서(4)
* * *
류태현 vs 러스티네일.
2015년 당시의 두 사람이 싸운다면 승부의 향방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두 사람의 초인으로서의 면모를 찬찬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첫 번째, 신체능력.
초인의 신체능력은 대개 초인등급과 정비례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2015년 당시의 두 사람의 등급을 단순 비교하자면, 단연 러스티네일 쪽이 압승이었다.
러스티네일의 초인등급은 A. 반면 류태현의 등급은 고작 C에 불과했다. 평범하게 힘 대 힘으로 맞붙는다면, 설령 러스티네일이 근접전이 장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류태현 쪽이 일방적으로 유린당하겠지.
허나 그 차이는 두 번째 비교 항목에 의해 상당히 좁혀진다.
그 두 번째란, 바로 초능력.
류태현의 초능력은 ‘신체강화’라는 심플한 능력. 그렇기에 심플하고, 또한 확실하게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을 줄여줄 수 있었다.
당시 류태현이 최대 출력으로 능력을 발동했을 때 그 신체능력은 B급에서도 상위, 강진윤과의 전투에서 잠재력이 일시 개화했을 땐 너끈히 A급에 다다랐다. 그 정도면 러스티네일보다 앞선다 할 수 있겠지.
물론 러스티네일 또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부식’이라는, 무적의 능력은 아니지만 상황이 받쳐준다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초능력.
상황.
그렇다. 문제는 바로 상황이었다.
러스티네일의 초능력이 최대의 위력, 효율을 발휘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가 필요했다.
가령 상대방이 금속제 무기를 사용한다든가. 혹은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가 주변에 금속이 넘쳐나는, 이를테면 건물 안이나 도심지의 거리라든가.
만약 그런 식의 전제 조건이 갖춰진다면 러스티네일은 류태현이 가까스로 따라잡은 간극을 다시금 손쉽게 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전투의 승리는 그녀가 가져가게 되겠지.
하지만 류태현에겐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5년 전 가을 고아원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진 두 사람간의 전투에서는, 그 ‘전제 조건’이라는 게 하나도 충족되지 않았다.
파앗!!
나무 그늘에서 기습적으로 출수한 일격.
날카로운 손날이 류태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의 주먹 또한 러스티네일의 어깨를 훑고 지나간다.
파바바바바밧!!
직후 눈으로 쫓을 수 없는 공방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다. 주먹과 손날이 바람을 가르고 새된 파공성이 숲속 가득 울려 퍼진다.
퍼억!!
퍼억!!
그리고 이내 동시에 격돌하는 일격.
수풀을 헤치며 두 사람의 몸이 주르륵 밀려나고, 그제야 류태현은 상대방의 모습을 명확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너 뭐하는 자식이야?”
“알 거 없어.”
“왜 스토커마냥 고아원을 엿보고 있는 건데?”
“알 거 없다니까.”
“당장 바른대로 말해! 그러지 않으면”
“아 글쎄!! 알 거 없다니까!?”
짜증 섞인 외침과 함께 다시금 그녀가 류태현에게 달려들었다. 가드 위로 꽂힌 묵직한 충격에 류태현의 몸이 부웅 날아 산비탈을 굴러 떨어진다.
“이 자식이”
퍼억!!!
자세를 가다듬을 새도 없이 날아든 발차기에 그의 몸이 다시 한 번 밀려났다. 정신없이 구르다 겨우 멈춰서자, 발을 딛고 선 곳은 어느새 고아원 담벼락 바로 옆.
“태현아?! 무슨 일이야?!”
“오지 마 은하야! 적이야! 적이 왔어! 얼른 애들 데리고 들어가!”
“적, 이라고…?”
권은하의 시선이 숲속으로 향한다. 수풀을 헤치며 천천히 걸어내려오고 있는 러스티네일을 발견하자 그녀의 얼굴에 차츰 경악이 떠오른다.
“아는 녀석이야?”
“……아니, 전혀.”
“그래. 어쨌든 저 여자가 우리를 적대하는 건 확실해. 애들 데리고 들어가서 얼른 오은수한테 연락해!”
“그렇겐 안 되겠는데.”
타앗!!
그 말과 함께 러스티네일이 공중으로 도약했다. 나무 높이를 넘어 허공에 떠오른 그녀가 정원 한복판에 쿵 착지한다.
“안녕 친구들? 언니랑 재밌는 놀이 할래?”
우뚝 굳어버린 아이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는 침입자.
“당장 안으로 도망쳐 얘들아!”
권은하의 외침에 아이들이 혼비백산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허나 러스티네일이 그걸 두 눈 뻔히 뜨고 바라만 볼 리가 없었다.
“얘들아! 언니랑 놀자니까?”
“그만둬!!”
퍼엉!!
아이들에게 달려들려던 러스티네일의 측면에서 권은하가 폭발을 일으켰다. 주홍빛 화염과 자욱한 연기가 그녀의 상반신을 가득 뒤덮었다.
그러나.
투확!
연기를 가르고 튀어나온 손이 권은하의 목을 틀어쥐었다.
“꺄, 흑?!”
“이야기로 듣긴 했는데 정말 약하네 너. 아프지도 뜨겁지도 않아. 이래서야 그냥 눈속임용 폭죽이지. 안 그래?”
“은하야!!”
“은하 누나아!”
“언니이!”
러스티네일에게 목을 잡힌 채 괴로워하는 권은하. 그런 그녀를 보며 류태현과 아이들이 소리쳤다.
다급하게 뛰어오는 류태현과 건물로 들어가다 말고 권은하를 걱정하는 아이들.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러스티네일의 입가에 싱긋 미소가 떠올랐다.
촤르륵!
러스티네일이 옆에 있던 그네 사슬을 있는 힘껏 뜯었다. 그러자 사슬 전체가 순식간에 시뻘건 녹으로 뒤덮였다.
“흐읍!”
직후 그걸 기세 좋게 휘두르자, 촘촘히 연결되어 있던 고리들이 끊어지며 휘두른 궤적을 따라 사방으로 날아갔다. 달려오던 류태현과, 머뭇거리던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퍼버벅!
류태현의 몸에 파편 몇 개가 격돌했다. 별 데미지는 없었다. 그는 튼튼했으니까.
그렇지만 아이들 쪽은 그렇지 않았다.
퍼버버버벅!
“꺄아아아악!!”
“아악! 아파아아!!”
“얘들아!!”
다급히 외친 류태현의 표정에 분노가 차올랐다. 그가 있는 힘껏 러스티네일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렀다.
“이 자시이이이익!!!”
휘익!
그러나 주먹이 격돌하기 직전 러스티네일이 잡고 있던 권은하의 몸을 류태현 쪽으로 돌렸다. 류태현이 다급하게 주먹을 멈추려했지만 관성을 무시할 순 없었고, 결국 류태현과 권은하의 몸이 엉망진창 얽히며 두 사람이 바닥을 굴렀다.
“무작정 달려드니까 그렇지. 하마터면 친구 얼굴을 직접 박살낼 뻔 했잖아?”
“이 개자식아!! 지금 뭐하는 짓이야?!”
“뭐가?”
“애들은 관계없잖아! 왜 쟤들한테까지 손을 대는데?!”
“내 알 바야?”
목을 잡고 켁켁 대는 권은하와 그런 그녀를 부축한 채 분노하는 류태현. 그리고 건물 앞에 쓰러진 채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아이들.
러스티네일은 그 일동을 쭈욱 눈으로 훑더니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쉬워지겠는데.”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온 의미심장한 중얼거림.
그 중얼거림을 들은 순간, 류태현의 뒷목에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다들 안으로 도망쳐!!!”
류태현의 외침과 러스티네일이 건물로 달려든 건 거의 동시였다. 그의 외침에 뒤늦게 원장과 다른 아이들이 다친 아이들을 수습해 들여보내려 했지만, 제 시간에 맞출 수는 없어보였다.
“멈춰 이 자식아!”
그렇기에 그들이 대피할 시간을 버는 게 류태현의 역할이었다. 아이들을 덮치려던 러스티네일은 지척까지 다가온 류태현의 존재 때문에 결국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휘리릭 몸이 반전하며 날카로운 은광이 번뜩였다.
서걱!
기습적으로 내지른 나이프가 류태현의 옆구리를 베었다. 고통에 신음하는 것도 잠시, 어지럽게 몰아치는 궤적이 류태현의 전신을 압박했다.
‘강하다…!’
가까스로 공격을 흘려내고 받아내면서 류태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러스티네일은 강했다. 그가 지금껏 싸워왔던 그 누구보다도. 그 전까지는 강진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눈앞의 여성이 보이는 강함은 그와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강진윤과 싸웠을 때는 그의 상태가 만전이 아니었다. 만약 멀쩡한 상태에서 싸웠다면 꽤나 괜찮은 전투를 벌였을 터. 적어도 그날 그랬던 것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진 않았으리라.
허나 지금 류태현은 바로 그 만전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횡무진 휘몰아치는 칼날에 류태현은 자신이 밀리고 있음을 느꼈다.
강진윤의 나이프 기술이 거칠고 매서웠다면, 이 여자의 기술은 빠르고 주도면밀했다. 정제된 움직임으로 정확하게 빈틈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 모습은, 그녀가 강진윤 같은 깡패들과 달리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임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서걱!!
또 한 번 나이프가 살갗을 가르고 핏물이 튀어올랐다. 벌써 몇 군데나 베였는지 온몸에 격통이 들끓었다. 류태현의 얼굴에 진한 초조함이 떠오른다.
앞서 말했듯, 류태현과 러스티네일의 강함을 비교하기 위해선 그들의 초인으로서의 면모 하나하나를 살펴봐야 한다.
단순 신체능력과 초능력만을 비교했을 때, 이 시점에서의 두 사람은 사실상 박빙.
그러나 승패는 비단 신체능력과 초능력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 외에도 고려할 요소는 얼마든지 있었다.
서걱!!
이를테면 기술.
서걱!!
혹은 경험.
서걱!!
혹은 성격이나 성향 같은 정서적 요인까지.
두 사람의 물리적인 강함은 얼추 비슷했으나, 러스티네일은 정신적인 면에서 류태현을 확실히 앞서고 있었다. 그 차이는 전투가 이어질수록 류태현의 몸에 점점 늘어만 가는 상처로 드러났다.
“허억…!”
류태현이 숨을 크게 헐떡였다. 고작 1분여의 공방에 얼마나 지쳤고, 또 얼마나 다쳤는가.
부상은 그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고 이는 더욱 두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만들었다. 절벽 끝으로 밀려나는 듯한 초조함이 그의 심장을 꽈악 옥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질 수밖에 없다.
적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 전투에서의 패배가 결코 좋은 결과를 불러오진 않으리란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고로 져선 안 된다.
져선 안 되니까, 무언가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두근.
극한에 몰린 상황 속에서,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퍼억!!
“크윽?!”
옆구리를 얻어맞은 러스티네일이 신음했다. 허를 찌른 일격에 목구멍에서 신물이 올라오자 그녀가 태세를 정비하려 몸을 뒤로 물렸다.
‘뭐지 방금 건? 뭔가 좀 전보다 빨라진 것 같은’
그 생각이 채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류태현이 달려들었다. 상당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 속도는 전투 시작 때보다 더욱 빨라져 있었다.
퍼억!!
다시금 꽂힌 일격. 막아낸 팔 뼈 전체가 지이잉 울리며 짜릿한 고통을 선사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러스티네일의 표정에 돌연 초조함이 떠올랐다.
‘착각이 아니야. 주먹이 더 빨라지고 무거워졌어. 초능력인가? 이제 와서?’
류태현의 공격은 본래도 빠르고 무거웠다. 그러나 러스티네일이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범위 내였고, 그 움직임은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전문가인 그녀라면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는 정도.
퍼억!!
“크흑?!”
그러나 어째서인지 점차 강해져가는 그의 공격은, 이제 러스티네일로서도 더 이상 대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기술의 조잡함을 힘과 속도로 찍어누르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공격.
‘이래서야 정면에서 싸워 제압하는 건 좀 힘드려나…? 으음, 좋아. 그냥 쉬운 길로 가자.’
러스티네일의 눈이 사방을 훑었다.
정원에 있는 건 세 사람. 전투 중인 두 사람과 빌빌대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권은하. 그 외에는 전부 건물 안으로 진즉에 피신한 상태였다.
‘권은하를 인질로…. 아니지. 저래도 초인이야. 괜히 붙잡았다가 내 발목이라도 잡으면 성가셔. 그렇다면 역시 애들이지. 듣자하니 고아원 애들 중에 초인은 한 명도 없다 그랬으니까…….’
허나 대놓고 건물로 들어가려 하면 류태현에게 빈틈을 내보이는 꼴이었다. 이에 러스티네일이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으며 조금씩 위치를 이동해 건물을 등지고 섰다. 그 움직임에 담긴 의도를 류태현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자아, 와라. 얼른!’
힘겹게 공격을 흘리고 넘기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후우웅!!
크게 궤적을 그리며 날아드는 주먹에 러스티네일이 씨익 웃었다.
퍼억!!
주먹이 러스티네일의 가드 위로 꽂히고, 그녀의 몸이 뒤로 크게 날아갔다.
아니, 정확히는 주먹에 닿음과 동시에 그녀가 뒤로 도약했다.
와장창!!
창문이 깨지며 러스티네일의 몸이 건물 안으로 처박혔다. 그 모습에 공격이 성공했다며 기뻐하던 류태현이 뒤늦게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다.
“젠장!!”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흥분감이 가라앉고 초조함이 뇌리를 물들인다. 안쪽에서 들리는 우당탕탕 거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비명에, 류태현이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곧바로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얘들아!!”
곧바로 안으로 뛰어든 류태현이 비명이 나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고아원의 가장 안쪽. 평소 식당으로 사용하는 넓은 다이닝 룸.
벌컥!!
그곳까지 다다르는 데에 걸린 시간은 채 10초도 되지 않았다.
허나.
“……후우, 작전 성공.”
그가 들이닥쳤을 때 안쪽의 상황은 이미 그의 우려대로 흘러가 있었다.
방 한복판에 선 러스티네일의 손아귀에는 올해로 12살이 된 남자아이 한 명이 붙들려있었다. 그 반대편에는 늙은 원장이 나머지 아이들을 지켜서고 있었으나, 러스티네일은 그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야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까.
“그러게 주먹을 좀 잘 보고 휘둘렀어야지. 흥분해서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쓰나.”
“민수한테서 당장 손 떼!”
“네가 지금 명령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당장 손 떼라고! 그 애는 관계없잖아! 그냥 고아원 애라고!”
“아까부터 애들은 관계가 없다느니 뭐니 마음대로 지껄이는데…….”
러스티네일이 남자아이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아이의 얼굴에 진한 공포감이 떠오른다.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거든?”
뿌득!!
“아아아아아아악!! 아읍! 으흐으으으읍!!!”
새된 비명을 내지르는 아이의 입을 러스티네일이 거칠게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 틈새로 새어나오는 신음과 흘러넘치는 눈물에 류태현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한다.
“어때? 이제야 좀 네 입장을 알겠어?”
“너 이 자식…!”
“이자식이고 저자식이고 나발이고. 이해했으면 저항은 포기하지 그래? 이 꼬마애 남은 아홉 손가락이라도 지키고 싶다면 말이야. 아, 혹시 남자애 비명은 약발이 잘 안 듣나? 얜 죽이고 저기 귀여운 여자애들로 다시 해줘?”
“…………원하는 게 뭐야 이 개자식아.”
“일단 밖으로 나가. 천천히. 도망치거나 저항할 생각 말고. ……거기 너도 같이.”
러스티네일이 뒤늦게 따라들어온 권은하에게 말했다. 인질의 존재 때문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건물 바깥으로 나가 정원 한복판까지 걸어갔다. 그러자 러스티네일이 두 사람에게 멈추라 지시했다.
“자, 이 꼬마애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두 사람 다 내가 하는 말을 잘 따라줘야 할 거야. 일단……. 어디보자…….”
러스티네일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갑작스러운 전투와 이어진 인질극에 머릿속이 복잡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기에.
“일단 내가 지금 너희 둘을 어떤 사람 앞까지 데려가야 하거든? 그러려면 너희 둘을 일단 제압해야 하는데……. 거기 너, 잠깐 이쪽으로 와봐. 천천히.”
러스티네일의 지시에 류태현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3미터 정도 남겨뒀을까 그녀가 류태현에게 추가로 지시했다.
“그 자리에 엎드려. 두 팔은 등 뒤로 올리고.”
수갑이라도 채우려는 심산인가. 류태현은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면서도 일단 순순히 따랐다. 당장은 인질 때문에 그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으니.
스윽.
류태현에게 다가간 러스티네일이 그의 왼팔을 붙잡곤 한쪽 발로 그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일단 적어도 수갑을 채우는 동작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안, 내가 수갑을 깜빡하고 안 가지고 와서.”
“잠깐, 너 뭘 하려는”
우드득!
러스티네일이 류태현의 등을 발로 누르며 어깨 관절을 뽑았다. 러스티네일은 이어서 오른팔 어깨 또한 뽑아버렸다.
“이걸로 팔은 됐고. 근데 넌 발도 빠르니까….”
우드득!!
러스티네일이 류태현의 발목을 비틀어 꺾었다. 극심한 격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류태현은 한치의 신음도 흘리지 않았다.
“……비명 한 번 안 지르다니 나보다 열 살은 어린 놈이 깡도 좋네. 야, 거기 너. 일로 와서 얘 부축해서 나 따라와.”
“…….”
“얼른. 안 그러면 이 남자애 죽인다? 왜, 내가 못할 것 같아?”
러스티네일이 나이프로 남자아이의 볼을 쿡쿡 찔렀다. 송글송글 뺨에 맺히는 핏방울에 권은하가 입술을 잘근 씹으며 류태현을 부축했다.
“자, 이제 그대로 산길을 타고 아래로……. 아니지. 반대편 능선 쪽으로 가자고. 괜히 다른 사람하고 마주치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지시한 러스티네일이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곽준효에게 연락했다. 두 사람을 옮길 차량을 받기 위해서였다.
“여보세요? 고아원 있는 산 북쪽 기슭으로 차 한 대만 보내줄 수 있어? 어어, 그 폐병원 있는 골목. 필요하니까 그렇지. 류태현이랑 권은하. 그 둘 데리고 지금 갈 예정이거든.”
러스티네일은 한가롭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뒤따른 반응은 결코 한가롭지 않았다.
이런 망할……. 도대체 왜 오늘 결행한 거냐. 결행일은 이쪽에서 알려준다고 했을 텐데.
“시끄럽네. 성공했으면 된 거지. 얼른 차량이나 보내. 그 오은수인지 뭔지 오기 전에 떠야 하니까”
이미 늦었다. 오은수는 이미 그쪽으로 향하고 있어. 10분 전 놈을 감시하던 부하가 보고한 내용이다.
“뭐? 그게 뭔 소리야. 그 인간이 고아원에 들르는 건 보통 오후 8시쯤이라고 그랬잖…….”
현재 시간은 오후 7시가 좀 지난 시점. 오은수가 일을 마치고 고아원에 들르기까진 본래 1시간이나 남았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1시간이나 일찍 이곳에 오고 있는가.
“…………아.”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의문이랄 것도 없었다.
그래. 어쨌든 저 여자가 우리를 적대하는 건 확실해. 애들 데리고 들어가서 얼른 오은수한테 연락해!
그녀의 뇌리에 류태현의 외침이 스쳐 지나간다.
류태현이나 권은하에겐 오은수에게 연락을 넣을 시간 따위 없었다. 그러나 고아원 안에는 고아원 원장이 버젓이 있었고, 그녀가 아니더라도 10살 넘은 아이들이라면 전화 정도야 얼마든지 다룰 수 있었다.
당연히 권은하가 싸우는 동안 그들은 오은수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 간단한 사실을 이제서야 알아차린 러스티네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진짜, 아직 한참 멀었구나.”
어이없는 실소에 자조하는 러스티네일.
그러나 실수를 알았으면 만회하면 되는 법.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고아원을 뜨기 위해 두 사람을 재촉했다. 오은수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뜨기만 하면 어쨌든 임무 성공이었으니까.
그러나.
쐐애애액!!
멀리서 들려온 바람 가르는 소리에 러스티네일이 문득 고개를 들었고.
콰앙!!!
다음 순간, 거센 굉음과 함께 그녀의 고개가 휘리릭 돌아갔다.
“커흑?!”
붙잡고 있던 아이마저 놓친 채 그녀의 몸이 지면을 뒹굴었다.
오은수가 벌써 도착한 것인가. 곧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주위를 살폈으나, 어째 주변에 오은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 아니, 아니야. 오은수는 이미 도착했어. 안 보이는 건 그 남자의 능력 떄문에’
퍼억!!
생각을 이어가려던 찰나 다시 한 번 커다란 충격이 그녀의 후두부를 가격했다. 앞으로 넘어지다시피 뛰쳐나간 러스티네일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버텨야 해. 어떻게든 1분만 버티는 거야! 1분만 도망치면서 버티면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퍼억!!
“우웁!”
명치에 꽂힌 충격에 그녀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구역질이 왈칵 올라오며 다리가 풀리려고 했지만, 러스티네일은 애써 무릎을 붙잡고 몸을 피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지면이 쾅 울리며 커다란 흙먼지가 일어났다.
여전히 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러스티네일은 필사적으로 기회를 엿보며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보이지 않는 공격들은 자비없이 그녀의 몸을 두들겼다.
‘30초. 아니, 40초 지났나? 슬슬 제한시간일 텐데. 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시야 구석의 허공에 물감이 번지듯 사람의 형태가 번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자의 정체는 오은수.
그는 자신의 초능력 ‘투명화’를 발동한 채 러스티네일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막 1분이라는 제한시간이 끝나 능력이 해제된 참이었다.
‘찾았다!’
타앙!!
그의 출현에 러스티네일이 곧바로 지면을 박찼다. 오른손에 쥔 나이프를 꽈악 붙잡은 채, 그녀가 오은수의 급소를 노리고 나이프를 내질렀다.
그 움직임에 망설임은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오은수를 이길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를 얕잡아보며, 기껏해야 투명화 능력 원툴에 불과하다며 지레짐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미숙한 판단이요.
그것이 그녀의 패인이었다.
휘리릭! 퍼억!!
뱀처럼 휘어진 주먹이 러스티네일의 팔을 타고 올라와 그대로 그녀의 턱을 후려쳤다. 반면 그녀의 나이프는 허망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퍼억!! 퍼억!! 퍼어억!!
이어지는 연격에 러스티네일이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절도 있게 내지르는 잽과 묵직한 스트레이트. 간결한 동작이었지만 그만큼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이었다. 겨우 공격의 틈을 노리고 나이프를 내질러보아도, 완벽에 가까운 위빙으로 어렵지 않게 피해내곤 다시금 주먹을 내질러댔다.
퍼억!!
“커헉!!”
그쯤 되자 러스티네일은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었음을 자각했다.
초능력빨 따위가 아니다. 설령 투명화 초능력이 없었어도 자신은 이 남자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존심 높은 러스티네일마저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오은수의 기량은 막강했다.
퍼어억!!
털썩.
결국 러스티네일은 1분도 걸리지 않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허망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녀의 머리채를 오은수가 우악스럽게 틀어쥔다.
꾸우욱.
동시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이 꽈악 들어가기 시작하는 주먹.
아마도 1초 뒤, 자신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칠 주먹을 올려다보며 러스티네일이 생각했다.
오은수. 슬럼의 삼대 세력 중 하나인 성철파의 부두목.
자신에게 이번 의뢰를 맡겼던 곽준효가 그를 두고 S급 수준이라 일컬은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구나.
“이런 씨, 이발….”
정말 자신은,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며.
퍼억!!!
자신의 미숙함을 자조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은 그녀의 얼굴에 오은수의 주먹이 꽂혔다. 붉은 핏물이 확 터지고, 러스티네일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했다.
“후우우우우우…….”
오은수는 그제야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달려왔는지 그의 몸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그렇게 잠시 숨을 고르던 오은수가 이내 고개를 돌려 류태현 쪽을 바라보았다.
오싹.
그 순간 류태현은 맹수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처럼 섬찟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오싹함은 1초도 가지 않았다.
“어이, 꼬맹이. 상태가 말이 아닌데, 이년한테 아주 호되게 당했나 보다?”
“…….”
그렇게 묻는 오은수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았다. 여느 때와 같은, 가볍고 경박하기 그지없는 오은수였다.
그러나.
“게다가 은하랑 민수도…. 보아하니 고아원 안에도 또 다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정말이지, 여기가 무슨 보물창고도 아닌데 왜 이 외진 곳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지 원……. 뭐 아무튼.”
그 경박한 언행의 이면에는 펄펄 끓어오르는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쓰러진 러스티네일을 툭툭 발로 치며 건드리던 오은수가 이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년은 누가 보내서 왔다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