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8화 〉 237. (P)경계의 안쪽에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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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단 단장 직속 암살팀 서열 7위.
코드네임 ‘러스티네일’.
강력한 신체능력과 뛰어난 전투기술에 더불어 온갖 것들을 부식시키는 막강한 초능력까지. 그녀는 명실상부 강력한 초인이었다. 초인 등급은 당연히 S급이었으며, 그 초능력 덕에 무기를 든 상대나 도심지에서의 싸움에서 특히 위력적인 면모를 보였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시점에서의 이야기.
5년 전, 2015년의 러스티네일은 마찬가지로 강력한 초인이긴 했으나, 당연히 그 실력은 2020년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암살팀 멤버이긴 했으나 이제 막 들어온 신참이었으며, 그 서열 또한 당연하게도 최하위인 12위.
객관적으로 보면 암살팀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뛰어난 실력자인 것일 테지만, 러스티네일은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단장이야 그렇다 쳐도, 같은 팀 안에서도 자기를 ‘12위’라며 낮잡아보고 거드럭거리는 자가 11명이나 있다는 상황이, 그녀에겐 불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슬럼에 왔다.
자신에게 부족한 강함을, 실력을, 그리고 경험을 얻기 위해서.
‘청부업자로 개업한 지 오늘로 딱 일주일인가.’
러스티네일은 임시로 빌린 사무실 창가에 앉은 채 믹스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슬럼에 온 첫날부터 삼대 세력의 실력자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건만, 어째 도통 의뢰가 들어오질 않는 현실을 자조하며.
‘실력은 확실히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지금 슬럼은 삼대 세력끼리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중이라 청부업 수요도 많을 테고. 그런데 어째서…….’
슬럼에선 힘이 곧 법이고 권력이다. 당연히 강한 초인에 대한 수요는 늘 넘쳐난다. 정식 조직원으로서든, 혹은 조직 바깥의 청부업자로서든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일주일째 파리만 날리고 있는 실정.
러스티네일은 실전 경험도 쌓을 겸 용돈벌이도 같이 해보려 한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생각을 잘못한 것인가 싶었다.
범죄의 온상이라 들었던 슬럼이 이렇게 재미없는 동네였을 줄은 몰랐다고. 그녀의 얼굴에 차츰 후회가 떠오른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청부업은 때려치고 아무 조직이나 골라서 쳐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똑똑.
굳게 닫혀있던 문에 울린 노크 소리.
그 순간 줄곧 어두웠던 러스티네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들어와.”
끼익.
문으로 들어온 건 강진윤의 오른팔 곽준효였다. 그 얼굴을 확인하자 러스티네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머, 며칠 전에 싸웠던 오빠네. 오늘은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을까?”
낮잡아보려는 의도가 다분한 질문에 곽준효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러스티네일과 싸우러 이곳을 찾아온 게 아니었다.
“……청부업자라고 들었다. 혹시 지금 맡고 있는 의뢰는 있나?”
“나한테는 안타깝게도, 그리고 그쪽에겐 다행스럽게도 하나도 없네. 보시다시피 파리만 날리고 있는 상황이라.”
“그렇다면 잘 됐군. 네게 의뢰하고 싶은 일이 있다.”
“그래? 그럼 일단 거기 앉아.”
러스티네일이 손짓한 소파에 곽준효가 털썩 앉았다. 그 맞은편에 싱글벙글한 얼굴로 앉은 러스티네일이 무릎에 얹은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그래서, 의뢰라는 건?”
“어떤 고아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 둘을 납치해줬으면 한다.”
“고아원이란 게 혹시 슬럼만의 무슨 은어인가? 아니면 액면 그대로 고아원이라는 소리?”
“진짜 고아원이다. 늙은 원장 한 명이 운영하는 코흘리개 애들 열댓 명 있는 고아원. 경계할 건 납치 대상 둘 밖에 없어.”
“그 둘은 초인?”
“그래. 한 명은 추정 D에서 C급 사이. 다른 한 명은 A급 언저리다. 가능하겠나?”
살인보다는 제압이 어렵고 제압보다는 납치가 어려운 법. A급 초인을 목숨에 지장 없이 제압한 뒤 납치한다는 행위는 당연히 그만한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실력이란 곽준효가 생각하기를, 적어도 준 S급 수준.
그 정도면 슬럼 안에서는 물론이요, 바깥 사회에서도 초인 중 상위 50명 안에는 들 수준이었다. 이에 곽준효는 과연 자신을 쓰러뜨린 이 풋내기 청부업자가 그 정도 수준이 되는지 궁금했으나.
“……두말하면 잔소리지. 충분히 가능해.”
러스티네일은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잠시의 고민조차 거치지 않은 채.
“타깃들을 옮길 때 쓸 차량 하나. 그리고 초인구속용 TBT합금 수갑을 둘 구해줘. 그리고 뭐든 좋으니 은색 금속을 20kg 정도. 헬스장에서 쓰는 바벨 바 정도면 딱 적당할 것 같은데, 가능할까?”
“가능하다. 내일까지 준비해서 가져다주지.”
“그럼 일도 바로 내일 시작하고?”
“아니, 결행일은 이쪽에서 알려주겠다. 그 고아원의 주인……. 원장이 아니라 실질적인 소유주인 남자가 꽤 성가신 자라서. 결행일은 그 남자가 없는 날로 정해야만 한다.”
“성가시다? 어떤 사람이길래?”
러스티네일의 질문에 곽준효가 생각에 잠겼다. 어떤 말로 표현해야 ‘그 남자’의 성가심을 잘 설명할 수 있을지.
“……오은수라는 이름은 들어봤겠지.”
“당연히 알고 있지. 성철파의 부두목이잖아? 근데 설마……. ……그 사람이 고아원 주인이라고?”
“그렇다.”
“하핫! 깡패 부두목과 고아원 주인이라니.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있을까.”
“동감이다.”
생긴 건 사람 한둘쯤 눈도 깜빡 안 하고 패죽일 것처럼 생겼으면서,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면서 고아원 운영이라니. 경쟁 조직의 중역인 곽준효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은수의 그 짓거리는 무슨 말로도 포장할 수 없는, 명백한 위선이었으니.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는 남자다만, 실력만은 확실한 남자기도 하다. 성철파라는 거대 조직의 부두목 자리는 거저먹은 게 아니니까.”
“엄청 강한가보네?”
“그래, 강하지. 네 말대로 엄청.”
“그래봐야 나한테는 안 될 것 같은데?”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는 놈을 수도 없아 봤다. 그런 놈들이 오은수에게 덤비는 것도 몇 번이고 봤지.”
그렇지만, 언제나 마지막에 서있던 건 오은수 그 남자였노라고.
“피할 수 있는 위험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그러니 결행일은 오은수의 동향을 토대로 이쪽에서 정하겠다. 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으면 돼.”
“꼭 내가 그 남자보다 약하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게 의뢰주의 요망이라면야 뭐.”
러스티네일이 오른손을 스윽 내밀었다. 악수를 권하는 제스처.
“의뢰를 받아들이지. 잘 부탁해. 문어다리 오빠.”
“……그런 기둥서방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이내 곽준효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
납치 결행일은 자신들 쪽에서 통보하겠다.
곽준효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결행일까지 러스티네일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고아원의 구조, 주변 지형과 지리, 타깃의 인상착의와 행동거지 등. 의뢰 완수를 위해선 조사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어디 보자…….’
러스티네일이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고아원을 살폈다. 러스티네일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청부업자였지만 그 행동거지에서는 숙련된 프로의 느낌이 물씬 났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암살팀.
이런 식의 잠복과 감시, 미행은 그녀의 전문분야나 다름없었다.
‘저 둘이 납치대상이란 말이지.’
러스티네일은 한창 정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타깃이 둘 다 미성년자라더니 정말 남자 쪽이든 여자 쪽이든 교복 없이도 학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위화감이 있다면 남자 쪽의 몸이 이상하리만치 단련되어 있다는 점이 있겠다만은.
‘생긴 것만 보면 딱 선남선녀 커플이네. 의뢰인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랬고. 도대체 저런 애들이 어쩌다 용문의 분노를 산 건지….’
러스티네일은 슬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슬럼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류태현과 강진윤 패거리의 전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껏해야 용문의 구역에 그의 몽타주가 걸린 수배서가 굴러다니는 걸 본 정도.
‘뭐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난 그냥 의뢰만 해결하면 되니까. 돈도 벌고, 실전 경험도 쌓고…….’
러스티네일은 모르고 있었지만 ‘실전 경험을 쌓는다’라는 목적으로 봤을 때 류태현은 그야말로 완벽한 상대였다. 강진윤 패거리와 동귀어진하다시피 한 그의 전투력은 현재 슬럼 안에서도 극히 높은 축에 속했으니까.
허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그녀 입장에선 추정 A급이라는 류태현조차 애송이로 보일 뿐이었다.
고작 저 나이로 A급 언저리라고 평가받는 것부터가 엄청난 일이었지만, 그 정도야 러스티네일 본인 포함 암살팀 전원이 달성한 업적이었으니.
“꺄히히히힛! 오빠! 좀 더 높이! 좀 더 세게!”
“오케이! 꽉 잡고 있어!”
“꺄아아악!! 엄청 높다!!”
“태현아! 너무 높이 올라가게 하지 마! 잘못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떨어지기 전에 내가 받아낼 테니까 걱정마! 자, 더 높이 간다!”
“꺄아아아아!!”
정원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저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러스티네일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부러움, 혹은 그리움.
뭉클한 감상에 잠긴 그녀의 정신이 머릿속을 뒤적이며 과거의 기억을 쫓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차린 그녀가 고개를 홱홱 저으며 상념을 지웠다.
‘일하는 중이잖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애써 그렇게 되뇌어보지만, 어디 상념이란 게 사람 마음대로 전등 스위치마냥 켜지고 꺼지는 것이던가.
●●야! 이쪽으로 와! 너도 우리랑 같이 놀자!
어느새 다시금 재생되기 시작한 어릴 적 기억에 러스티네일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차라리 그냥 치고받고 싸우기만 하면 되는 일이면 이런 감상에 젖을 일도 없을 텐데. 짜증나 죽겠다고.
“하아…. 씨발, 좆같네 진짜….”
무심코 작게 불평을 뇌까린 그녀가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정원을 감시했다.
그 순간.
“!!”
러스티네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나무 뒤로 숨긴다.
‘망할, 눈이 마주쳤어.’
그녀의 뇌가 방금 전 본 광경을 다시금 재생한다.
정원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던 아이들.
그들 가운데 있던 류태현이, 정확히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던 모습을.
‘씨이발. 괜히 입으로 욕을 해서. 근데 확실히 마주친 건가? 그냥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 거 아니야? 저기랑 여기 거리가 얼만데, 그 작은 소리를 들었을 리가’
부스럭.
애써 해보려던 낙관적인 판단은 그 발소리에 송두리째 사라졌다.
부스럭. 부스럭.
수풀을 가르고 나뭇가지를 밟으며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 그것은 정확히 러스티네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일단 도망치느냐. 아니면 싸우느냐. 그녀의 얼굴에 고민의 기색이 떠오른다.
우선 도망친다면 확실하게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녀는 암살팀, 전투만큼이나 도주 또한 특기였으니까.
그러나 그 과정에서 류태현에게 자신의 모습이 노출될 것이며, 수상한 자의 등장에 류태현은 당연히 경계할 것이다. 그 경계심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지, 납치 계획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녀로선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싸워야하는가.
싸운다면, 류태현은 확실히 이길 수 있었다. 같이 있는 권은하는 D급 언저리니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
허나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첫 번째는 납치에 필요한 물품들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점.
차량이나 수갑 등은 이미 진즉에 받았다. 문제는 그것들이 지금 그녀의 수중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어디까지나 정찰을 위해서였으니까.
거기에 더해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오은수의 동향이었다. 오은수는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저녁 시간대 즈음, 즉 바로 지금 이 시간대에 고아원에 들른다. 머무는 시간은 10분 20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매일 확실하게 고아원에 오는 것이 그의 평소 일과였다.
그리고 오늘 오은수에게는, 적어도 곽준효에게서 전해듣기로는 특별한 일정이 없다.
즉 그는 곧 이곳에 도착한다.
‘곽준효의 말에 따르면 오은수의 강함은 거의 S급 수준…. 하지만 그건 과장이 섞인 평가일 거야.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넘쳤던 90년대랑 달리, 지금 슬럼은 쇠퇴할 대로 쇠퇴했으니까. 사전에 조사했던 정보에 따르면 슬럼 안에 S급 초인은 각 조직의 수장들뿐. 오은수는 부두목에 불과하니까 실력은 기껏해봐야 A급 상위 정도겠지. 그렇다면…….’
싸워서 이길 수 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야 어느 정도 위험이 따르기야 하겠다만, 방심했을 때 기습한다면 어렵지 않게 승리를 따낼 수 있겠지.
부스럭.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어느새 류태현은 그녀가 있는 곳 지척까지 다가왔다. 지척까지 다가온 채 멈췄다.
단번에 그녀가 있는 곳을 확인하지 않고 멈췄다는 건 즉, 그녀의 존재를 확실하게 눈치 챘다는 소리.
“…….”
적막한 숲속에 긴장감이 감돌다, 이내 러스티네일의 입에서 진한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정말이지, 왜 하필 입으로 욕을 뱉어선.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구나.”
타앗!!!
그 말과 동시에 러스티네일이 나무 그늘에서 뛰쳐나왔고.
직후, 노을빛으로 물든 적막한 숲속에 굉음이 울려퍼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