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082. 월요일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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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은 싫어♪ 싫어! 섹시한 그녀가 있는 토~요~일~ 밤이 나는 좋아!”
그린하우스 외곽 순찰로.
태양이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 경쾌한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며 채소연이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월요일은 싫어♪ 싫어! 화끈한 우리가 있는 토~요~일~ 밤이 나는 좋아!”
“하아.”
순찰은 뒷전인 그 모습에 안수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하늘을 만나고, 지예원을 만나고, 복잡해져만 가는 머리를 싸맨 채 끙끙 앓던 일요일이 지난 월요일.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했던 안수호는 출근하자마자 일하기 싫다며 찡찡대는 파트너의 존재에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나마 나아졌으나, 갓 출근했을 때엔 정말 떼쓰는 어린아이가 따로 없었다. 물론 그 나아진 모습조차도 안수호의 심기를 살살 건드리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채소연. 순찰 중이잖아. 이 순찰만 끝나면 그대로 퇴근인데 조금만 진지하게 임할 수 없냐?”
“뭐래? 난 진지하거든?”
“퍽이나 진지하다 시발.”
“뭘 모르네! 이게 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적을 방심시키기 위한 기만책이거든?!”
그딴 멍청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적이 방심할 리가 만무하다.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약 자신이 그린하우스에서 범죄를 저지를 악당이라면 채소연의 모습을 보고 방심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장난 시계도 두 번은 맞는다더니.’
안수호는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멍청함을 자랑하는, 대가리에 나사가 빠진 수준이 아니라 아예 나사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것 같은 자신의 파트너를 보며 씁쓸하면서도 어딘가 편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채소연의 저 순진무구함……을 가장한 멍청함에 유일한 순기능이 있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어떠한 걱정 근심조차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것이리라.
“……퇴근 카드는 찍고 나왔냐?”
“찍었지요~”
“놓고 온 물건은?”
“전혀 없지요~”
“혹시 못 끝낸 일……은 순찰 나오기 전에 내가 다 해줬구나.”
“그렇지요~”
퇴근 시간대와 겹치는 시간대에 순찰이 잡힌 경비대원들은 보통 순찰이 끝나면 그대로 퇴근하곤 한다. 순찰 결과야 이상이 없으면 전화로 약식 보고하면 그만이니, 고작 1분도 안 걸릴 보고 하나 때문에 넓은 부지를 오고 갈 바에야 그냥 그대로 퇴근하라는 경비대 차원에서의 배려였다.
하여 이 시간대에 근무가 잡힌 경비대원은 순찰 전에 모든 퇴근 준비를 마치는 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 부분에선 채소연 또한 남들과 같았다.
“안수호! 오늘 끝나고 뭐해?”
“예원이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지예원은 내일 용인으로 떠난다. 떠나면 당분간은 보지 못할 테니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보자, 대충 그런 의미였다.
“그래? 그럼 나도 갈래!”
“넌 갑자기 왜?”
“지예원 이번에 팀장님 임무 땜에 딴 데로 간다며?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해야지!”
다소 막무가내인 요청이었으나 안수호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안전가옥에서의 생활이 지예원과 안수호의 사이를 가깝게 해주었다면 그것은 채소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가까이서 부대끼면 결국 정이 생기는 법. 분명 최악의 첫 만남을 가졌던 두 사람은 어느새 나름 친구라고 부를만한 돈독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채소연이 오면 분위기가 가라앉을 걱정은 없겠네. 적어도 떠나기 전날만큼은 웃으면서 보내주고 싶었으나 잘 됐어.’
채소연은 이래 뵈도 훌륭한 분위기메이커였다. 그녀가 있으면 자신도 그렇고 지예원도 그렇고 복잡한 고민은 잠시 미뤄둔 채 즐겁게 마지막 날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안수호가 생각했다.
“그래, 그럼. 가는 길에 같이 마실 거나 사가자.”
“마실 거? 술?”
“그래도 나름 송별회 비슷한 자린데 술이 있어줘야지.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과음은 못 하겠지만.”
“그럼 맥주 정도만 간단히 사가면 되겠네! 아, 저녁은 뭐 먹을 거야? 지예원 걔가 요리해? 아니면 배달 음식?”
“자기가 한댔어. 무슨 멕시코 요리 하나 배워서 해주겠다고 했는데. 맥주랑 잘 어울릴까 모르겠네.”
“세상에 맥주랑 안 어울리는 요리는 업서!”
“?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순찰을 마친 두 사람은 맥주와 어울리는 요리에 대한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정문을 나섰다.
“엥? 저건 또 뭐래?”
채소연이 정문 대로변 한 켠에 선 검은색 리무진을 가리켰다. 척 봐도 부자들이나 타고 다닐 것 같은 차에 그 앞에 정갈한 정장을 차려입은 채 가만히 서있는 미모의 여성. 그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모습에 지나가던 학생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리무진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시선을 사로잡힌 건 두 사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리무진은 우연찮게도 두 사람의 진로 정면에 위치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리무진과 의문의 여성을 보며 안수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한겨울인가?”
안수호의 머릿속에 있는 그린하우스 관계자 중 저런 삐까번쩍한 차를 타고 다닐 사람이래 봐야 한겨울 정도가 다였다. 실제로 한겨울은 원작에서도 전용 리무진을 통해 등하교를 한다는 묘사가 있었고.
“한겨울이면 그 싸가지 재벌 3세?”
“싸가지라니…….”
“왜. 싸가지 맞잖아. 그때 카페에서 걔가 떽뗵거리면서 나한테 대들던 거 기억 안 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꼬꼬마가 감히 으른한테 대들어서는”
“그땐 너도 어른답지 못했잖아.”
“아 몰라! 아무튼 한겨울인지 초겨울인지 그 싸가지 꼬맹이 다음에 만나면 내가 아주 그냥 버릇을 단단히……!”
그때,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외치던 채소연과 리무진 앞에 서있던 여성의 눈이 마주쳤다.
‘설마 들었나?’
라고 안수호가 생각한 순간, 정장 차림의 여성이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울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채소연이 침을 꿀꺽 삼키며 반사적으로 반걸음 물러섰다.
“실례합니다.”
두 사람 앞에 선 여성이 점잖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여성이 신은 힐 때문에 여성과 채소연의 키 차이는 거의 30cm 가까이 났다.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지는 여성을 올려다보며 채소연이 살짝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답했다.
“그, 그그 제가 말한 걸 어떻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는데, 그쪽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혹시 그린하우스 경비대 특수대책과 소속 안수호 대원님 맞으십니까?”
“엣?”
“저 말입니까?”
졸지에 지목당한 안수호가 눈을 껌뻑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안수호입니다만…….”
“저희 아가씨께서 안수호 대원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혹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가씨면 한겨울……학생 말인가요?”
역시 한겨울 쪽 사람이었나. 그리 생각한 안수호가 그렇게 되물었으나 여성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겨울 아가씨는 아닙니다.”
“그럼 누구……아.”
한겨울에게 고용된 자가 아님에도 한겨울에게 존칭을 쓴 여성의 대답에 안수호는 곧바로 그녀가 말하는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한여름 아가씨의 개인 비서를 맡고 있는 신아영이라고 합니다.”
“한여름?”
채소연이 그건 또 누구냐는 듯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안수호는 그런 채소연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한여름이 어째서 나를?’
혹시 한겨울과의 일 때문에 그런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으나 안수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여름은 한겨울의 언니이긴 했으나 동생에겐 기본적으로 무관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겨울에 관한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을 아까워한다는 게 옳겠지. 하여튼 ‘그 한여름’이 한겨울과 관련된 일로 자신을 찾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거 말곤 건덕지가 없는데.’
한여름은 원작에서도 어느 정도 비중을 가진 레귤러 캐릭터긴 하였으나, 현 시점에서 안수호와의 접점은 그야말로 0에 가까웠다.
허나 그의 생각이 어떻든 한여름의 비서가 그를 찾은 것은 사실.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걸 극도로 혐오하는 그녀가 그를 찾았다는 건 즉,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한여름 학생이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랬죠.”
“그렇습니다.”
“저는 이 뒤에 일정이 있습니다만, 혹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길어봐야 2, 30분 정도겠죠.”
“2, 30분…….”
그 정도면 지예원과의 약속에도 차질은 없을 터.
“채소연.”
그렇게 생각한 안수호가 채소연을 넌지시 불렀다.
“응?”
“아무래도 술은 너 혼자 사러가야 할 것 같다.”
“으응. 알겠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던 채소연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뒤로한 채 안수호가 신아영의 안내에 따라 리무진 뒷좌석에 올랐다.
“어?”
그러자.
“안녕하세요?”
정장 치마 아래로 매끈하게 드러난 다리를 도도하게 꼰 채, 한여름이 옅은 미소와 함께 그를 맞이했다.
***
부우우우우웅.
중후한 울림과 함께 리무진이 출발했다. 차가 워낙 좋은 덕인지 아니면 운전기사가 뛰어난 덕인지 리무진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렸다.
안수호는 어색한 시선으로 한여름을 바라봤다.
언뜻 보면 동생인 한겨울과 닮은 인상.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면 세부적인 부분에서 많은 차이가 났다.
먼저 머리카락 색. 한겨울이 짙은 선홍색 머리카락인데 반해 한여름은 그보다 조금 탁한 회색이 섞인 붉은색이었다. 눈동자 또한 머리카락과 동일한 적안인 한겨울과 달리 푸르스름한 빛이 섞인 자안이었다.
이목구비는 한겨울과 마찬가지로 미인상이었으나 그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전체적으로 한겨울이 기가 드센 표독스러운 미소녀라면 한여름은 그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특히 아래로 처진 눈꼬리와 길게 빠진 속눈썹이 부드러우면서도 농밀한 어른의 매력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를 꿰뚫으려는 듯 형형하게 빛나는 안광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한기 때문에 한여름은 한겨울보다 부드럽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보였다. 고슴도치가 사방팔방으로 가시를 세운 듯한 날카로움이 아닌, 시퍼렇게 날이 선 한 줄기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절 기다리고 계실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리무진 안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런 한여름의 눈치를 살피던 안수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똑 부러지는 경어였다.
“저는 시간 낭비를 싫어하거든요.”
한여름 또한 안수호에게 경어를 썼다. 그러나 안수호와는 달리 어딘가 여유가 느껴지는 어투였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이런저런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제가 따로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릴 바에야 이렇게 차 안에서 만나는 편이 시간을 훨씬 절약할 수 있잖아요. 게다가 차 안이면 다른 사람들의 눈이나 귀를 신경 쓸 필요도 없고.”
그 말이 안수호에게는 이제부터 다른 이의 눈이나 귀를 신경 써야만 하는 이야기를 꺼내겠다는 선전포고로 들렸다. 안수호가 살짝 불안한 눈치로 앞쪽에 앉은 운전기사와 신아영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두 사람은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입이 무거우니까. 이 안에서 나눈 이야기가 행여 저들을 통해 새어나갈 일은 없어요.”
그 말 한 마디로 불안함이 가시진 않았으나 안수호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한여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며.
“그래서, 한여름 학생……께선 왜 저를 찾으신 겁니까?”
“당신이 좋아서요.”
“예?”
당황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안수호가 되물었다. 반면 한여름은 평온한 표정 그대로였다.
“어떤 계기로 당신이란 사람에게 아주, 아주 약간의 흥미를 품게 됐어요. 그래서 당신에 대해 조금 조사해봤는데, 어째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당신이 마음에 들고 좋아지는 것 있죠?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오해가 될만한 발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건넬 제안도 있고요.”
신아영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한여름이 넌지시 안수호를 바라봤다.
“제안……이라니. 아니, 그보다. 저에 대해 조사를 하셨다고요? 흥미가 생겨서?”
“네. 아마 당신도 짚이는 구석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말해도 안수호는 한여름이 자신에게 흥미를 가질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싶었다. 정말 한겨울과 관련된 이유 때문인가.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세상의 한여름은 한겨울에게 나름대로 관심을 쏟는 것일까.
그러나 안수호의 그런 예상은 한여름의 다음 말에 곧바로 부정당했다.
“일리아나 파우스트.”
그녀가 꺼낸 단 한 사람의 이름에 의해.
“저랑 같은 아카데미 4학년생인데, 이 나라에서 유명하진 않지만 알 사람은 아는 아주 뛰어난 탐정이자 조사원이죠. 그 탐정에게 당신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어요. 정확히는, 저번 이중던전 사태 때 당신의 정확한 행보에 대해서.”
한여름의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찢어졌다. 그 순간 안수호는 한여름으로부터 익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아.
이 여자, 민채령과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고.
“무슨 수를 썼는지 고작 하루 만에 의뢰를 완수한 그 탐정도 대단하지만, 당신도 그 못지않게 꽤 대단한 사람이더라고요?”
검은 리무진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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