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077. 한겨울의 약점(4)
* * *
안수호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량 뒷좌석에서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의 대련을 복기하는 중이었다.
“…….”
그녀는 패배했다.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대련에서 패배한 것이 불쾌하고 부끄러웠다. 안수호 앞에선 태연한 태도를 보였으나, 그와 헤어져 혼자 생각에 잠기니 패배 직후엔 느끼지 못했던 불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본래 익숙지 않았던 불쾌감. 그러나 요즈음 들어 익숙해지고 있는 바로 그 불쾌감.
한겨울은 본래 패배와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다. 패배감 따위 느낄 상황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그린하우스에 입학한 뒤로, 류태현과 몇 번이나 대련을 거치며 그녀는 거듭해서 패배했다. 처음에는 패배의 충격에 잠도 못 이룰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익숙해졌다.
익숙해졌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불쾌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한겨울에게 있어서 패배란 그런 것이었다. 그녀가 라이벌로 생각하는 류태현이라면 설령 패배한다 한들 ‘다음에 이기면 되지!’하고 훌훌 털어버리겠지만, 한겨울은 그럴 수 없었다.
설령 다음에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해도, 오늘의 패배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한겨울이 사는 곳은 그린하우스 인근에 마련한 별장이었다. 기실 말이 별장이지 그 규모는 어지간한 저택 이상이었다. 드높은 담벼락으로 에워싸인 웅장한 별장의 모습은 드라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재벌가의 저택 그 자체였다.
곱게 정돈된 정원 사이로 난 벽돌길을 터벅터벅 걸어간 그녀가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40년 가까이 한 씨 일가를 위해 일한 노집사였다. 어디까지나 고용인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 있어선 가족이나 다름없는 자였다.
“오셨습니까, 둘째 아가씨.”
노집사가 가볍게 목례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동시에 그가 한겨울에게 작게 속삭였다.
“……조금 전에 첫째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 말에 한겨울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노집사는 한겨울이 자신의 언니 한여름을 껄끄러워함을 알고 있었다.
“첫째 아가씨께선 지금 서재에 계십니다. 곧바로 방으로 향하신다면 마주치실 일은 없겠죠.”
“……고마워요.”
노집사의 배려에 감사하며 한겨울은 곧바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의 대련으로 기분이 꿀꿀한데 껄끄러운 언니까지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돌아왔네?”
분명 서재에 있어야 할 한여름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한겨울의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서재는 2층이고 그녀의 방은 3층이었다. 우연히 마주칠 위치는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시점에서 이 만남은 다분히 한여름의 의도에 의한 것임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야?”
“오후에 있던 회의가 갑자기 몇 시간 밀려서. 아카데미에 들른 참에 겸사겸사 얼굴이나 볼 겸 왔어.”
4학년이 되고 길드 인턴 생활을 시작한 한여름은 거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설령 집에 돌아온다 해도 그녀는 한겨울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겨울에 대한 한여름의 태도는 무관심 그 자체였다. 그런 한여름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필시 무언가 할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한겨울이 불안한 눈치로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자, 한여름이 그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한겨울에게 물었다.
“그 안수호라는 경비대원이랑 만났다며? 뭐하다 왔어?”
그렇게 물은 한여름의 시선이 한겨울의 복장을 주욱 훑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전투용 수트에 디펜시브 코트까지. 그 복장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했다.
한겨울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런 복장으로 얼버무리는 것도 무리고, 애초에 자신의 언니라면 이미 대강의 전후사정은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그녀가 한여름의 시선을 넌지시 피하며 대답했다.
“훈련……을 좀 하다 왔어.”
“훈련? 다른 트레이너들 놔두고 굳이 경비대원하고?”
“그건……”
한겨울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한여름 입장에선 이미 자신의 수행비서를 통해 전해들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겼니?”
그리하여 안수호와 대련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라고 한겨울이 말하자, 한여름이 곧바로 그렇게 되물었다.
“…….”
한겨울은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패배를 시인한 것과 그것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질문에 거짓으로 답할 수도 없었다. 한여름이 마음만 먹는다면 대련의 결과 따위 손쉽게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졌어.”
“그래?”
한겨울의 고백에도 한여름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것이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자신에게 기대 따윌 하지조차 않았던 것인지.
한겨울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언니는 자신과 대화하는 걸 시간 낭비로 여긴다. 그럼에도 굳이 방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면서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여름을 보며 한겨울이 입술을 달싹였다.
“한겨울.”
그때,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한겨울의 귓가를 울렸다.
“네가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지 싶어서 그동안은 별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한 마디만 해야겠어.”
한여름의 차가운 시선이 한겨울을 꿰뚫었다.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녀로부터 뿜어진 차가운 냉기가 한겨울을 감싸고 있었다. 한여름의 찰치에 새하얀 서리가 끼기 시작하고, 복도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 이하로 떨어졌다.
그 변화에 한겨울이 살며시 떨었다. 그저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겨울이 살며시 자신의 언니를 올려다보자, 싸늘한 두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겨울.”
“……응.”
“넌 부끄럽다는 생각도 안 드니?”
한여름은 한심하다는 듯 자신의 여동생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사회의 정점에 서왔어. 할아버님께선 이 나라 권력의 정점에 오르셨고, 아버님께선 기업을 세워 부의 정점에 오르셨지.”
차분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러나 담긴 감정은 한없이 날카로웠다. 차가운 비수처럼 날이 선 감정이 한겨울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한씨 집안의 사람이라면 응당 사회의 정점에 서야 해.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너랑 나는 초인으로서 아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 그래서 할아버님도 아버님도 우리 둘한테 거는 기대가 크셔.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도 그 꼴이야?”
“…….”
“나는 두 분의 기대에 착실히 부응했어. 나는 명실상부 그린하우스의 정점에 섰고, 머지않아 초인 사회 전체의 정점에 오를 거야.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한여름이 한겨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까드드득! 거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어깨가 얼어붙는다.
“흐읏!”
“그런데 넌 뭘 하고 있지?”
한겨울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비단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년기 시절부터 학습된 공포가, 몸에 밴 두려움이 그녀의 몸과 정신을 뒤흔들었다.
“어디서 굴러다녔는지도 모를 놈한테 학년 1위 자리를 내준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멋대로 경비대원을 끌어들여 대련을 벌였다가 꼴사납게 져버리고.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언니. 나는…….”
“내가 네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우리 집안의 일원으로서, 내 동생으로서 적어도 부끄러운 모습만 보이지 말라는 게 그렇게 어려워?”
한여름은 완벽했다. 반면 한겨울은 뛰어나긴 하되 완벽하진 않았다. 한여름은 그런 자신의 동생이 실망스러웠다. 한겨울의 성취는 분명 객관적으로 봤을 때 뛰어난 수준이었으나 알 바 아니었다. 한여름은 언니로서, 한씨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동생 또한 자신처럼 오롯이 완벽하길 바랐다.
그렇기에 요즘 한겨울이 보여주는 모습이 한여름은 실망스러웠다. 그 실망감이 차디찬 냉기로 바뀌어 한겨울의 몸을 잠식했다.
“…….”
한겨울은 무어라 변명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인 채 벌벌 떨었다. 늘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본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지막 기회야.”
그런 한겨울에게 한여름이 얇디 얇은 동앗줄을 던져주었다.
“그간의 일은 학기 초라서 이래저래 헤맸다고 생각할게. 그렇지만 적어도 이번 중간고사에는 우리 집안 사람으로서 어울리는 결과를 내도록 해. 그 누구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감히 넘어설 생각조차 품지 못하고 그저 우러러보도록.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응. 알겠어.”
장황하게 말했지만 간단히 말해 류태현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란 소리였다. 한겨울은 한여름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셈이었다. 애초에 오늘 안수호와 대련에 임한 것도 류태현을 이기기 위해서였으니까.
다만, 그럼에도 한여름이 한겨울에게 그렇게 못 박은 것은 최후통첩의 의미가 강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것은 한여름이 언니로서 여동생에게 내리는 마지막 기회였다.
“만약 이번에도 네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한여름이 말끝을 흐리자 한겨울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언니를 올려다보았다.
“……굳이 말 안 해도 알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여름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사방을 잠식하던 한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의 초능력에 대한 완벽한 컨트롤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방문 앞에 홀로 남겨진 한겨울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언니의 뒷모습을 쫓았다.
“…….”
그 시선에는 분함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흐음……”
한편, 한겨울에게 싸늘한 일침을 날린 한여름은 안수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한겨울은 한여름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미치지 못하긴 하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강한 초인이기는 했다. 한여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실망스러운 동생일 뿐이지만 어지간한 초인은 그녀의 앞에서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겠지.
헌데 일개 경비대원에 불과한 안수호가 그런 한겨울과 대련해서 승리했다는 사실이 그녀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이중던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단순히 도망을 잘 쳤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안수호라는 남자에 대해 조금씩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민채령처럼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강함을 품고 있는 것인지 순수하게 궁금했다.
“……조금 조사해볼까.”
곧 있을 던전 공략 회의에서는 당연히 안수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 터. 회의를 준비한다는 차원에서도 그에 대해 알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한 한여름이 자신의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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