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138.
* * *
“사랑을 잊었다고요?”
“네. 엘프들이 나를 사랑해준 만큼 나도 엘프들을 사랑해줘야 하는데, 그 마음을 잊고 있었어요.”
헤스티아는 대답 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깊은 그 시선에 몸이 잔잔히 울린다.
“….”
“이…. 제약을 받게 되고 나서 생각을 좀 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한 건 뭔가 하고…. 내가 이 세상으로 온 건, 그냥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건, ‘남성의 신’이 사라져 남자가 힘이 없어진 세계에서, 남자의 사랑이 고픈 엘프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해요.”
“….”
“처음에는 좋았어요. 그녀들이 나를 사랑했던 만큼, 나도 그녀들을 사랑했죠. 스스로 생각해도 잘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힘을 얻고 나서, 난 변했어요. 그녀들을 더욱 많이 사랑해주라고 받았던 힘을, 그저 그녀들을 농락하고 희롱하는 데 사용해 버렸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계속해봐요.”
“그녀들을 마음을 나누고 사랑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임신시키고 따먹을 대상으로만 봤어요. 그녀들은 마음을 다 바쳐 진심으로 임신하려고 헌신했지만, 난 그녀들의 몸만을 탐했어요. 쾌락을 위해 그녀들을 처참한 지경으로 만들고, 도구로 보고 물건으로 봤어요.”
“…알긴 아는군요.”
“네. 그리고 헤스티아를 만났죠.”
“….”
“다짜고짜 폭력적으로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강제로 추행했어요.”
헤스티아는 그때 생각이 떠오르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읏….”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그냥 말로만 사과한다고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할게요. 정말로 미안해요. 헤스티아.”
“…후우….”
헤스티아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이지…. 그건 너무 심했어요.”
“잘못했어요.”
“처녀신의 첫 키스를 그딴 식으로 빼앗아가다니…. 정말 최악이야.”
“미안해요.”
“정말이지 첫 키스를 그런 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단 말이에요.”
“…?”
뭔지 모를 야릇한 말에, 죄송해야 하는 내 표정이 조금 씰룩인다.
‘그런 식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다른 식으로는 하고 싶었다는 건가?
순간 발기도 안 되는 자지가 맹렬하게 잔머리를 굴린다.
내 자지의 IQ는 내 뇌의 IQ보다 30 높다.
뇌가 영재라면 자지는 천재,
있었던 사건들의 조각이 스르르 맞춰져 간다.
여신, 헤스티아.
애초에 안개 속에서 은근슬쩍 모습을 드러냈던 것도 그렇고,
처음에 목욕하던 것을 보여주었던 것도 그렇고,
설마 이거 킹능성 있는 건가?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녀가 약간씩 미끼를 던진 것으로 생각해도 괜찮았다.
그 말인즉슨 평범하게만 했어도,
헛짓거리 헛발질 슛 오지게 안 했으면,
어쩌면 자연스럽게 관계가 깊어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걸 박살을 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지만….
‘그녀를…?’
엘프의 여신 헤스티아.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에서도 엄청 예쁘다고 생각했고,
여신이라는 걸 안 지금은 감히 들이대기도 뭐한 상대가 헤스티아였다.
막 들이대다가 된통 깨져 잘못했다고 빌고 있는 것이 지금 상황.
혹시 지금이라도 어떻게 수습을 잘 하면,
혹시…. 다시 좀 어떻게 잘 될 수 있지는 않을까?
나는 살며시 간을 보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해요. 헤스티아. 솔직히 헤스티아가 너무 아름답고 예쁘고 매혹적이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힘에 취해서 막 나간 것도 있긴 하지만, 정말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나 끌려서….”
“흥….”
헤스티아는 가당찮다는 표정이었지만,
은근한 칭찬 때문인지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살살 파고들어 가봤다.
“손만 뻗으면 엘프들이 다 내 것이 되었었으니, 정신이 나가버렸어요. 그런 와중에 지금까지 만난 엘프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헤스티아를 봐 버리고 말았으니, 그만 난폭한 짓을 해 버린 거예요. 변명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전부 내 잘못이고 내 죄지만…. 그래도 헤스티아가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래도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거예요.”
헤스티아는 냉담한 어조로 그렇게 대답했지만,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자지와 뇌가 동시에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미안해요. 정말로.”
“…정말이지….”
헤스티아는 크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더니,
갑자기 귀여운 말을 하기 시작했다.
“거칠게 하는 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도가 있는 법이라고요? 고작 얼굴 몇 번 봤을 뿐인데 다짜고짜 덮치다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건가요? 물론 제가 많이 아름답고 예쁘고 우아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충격이었다고요.”
우아하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걸 지적할 수는 없었다.
의외로 은근히 칭찬한 것이 생각보다 잘 먹혀 다행이었다.
다행히도 애초에 나한테 악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악감정이 생기게 했다면 모를까….
“미안해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요.”
“좀 천천히, 부드럽게 했으면 좋잖아요.”
“맞아요. 내가 너무 매너가 없었어요.”
“나도 아예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이렇게 나오면 정말이지…. 응?”
막 말하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헤스티아.
처녀면서 은근히 밝히는 것이 귀여워 보였다.
물론 헤스티아가 밝힌다는 건 키스 정도 수준까지일 것이다.
이세계에 와서 진도 빨리 나가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지,
키스도 충분히 야한 행위였다.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는 건…?”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척 되물었다.
헤스티아는 당황하더니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그건….”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헤스티아는 민망해하며 마저 말했다.
“그…. 말뜻 그대로예요….”
“그런 소름 끼치는 짓을 저질렀는데,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건가요?”
“…그렇게 막 소름 끼치게 싫은 건 아니에요.”
소름 끼치게 싫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그럼 좋았나요? 하고 물어볼 수는 없다.
나는 정말 천만다행이라는 듯 무릎을 쓸어내렸다.
“고마워요…. 기회마저 안 주지는 않는 거군요.”
“그렇다고 바로 용서해 주는 건 아니니까요.”
“물론이죠. 그렇게 쉽게 용서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계속 말하지만 정말 미안해요. 정말 놀랐을 텐데.”
“너무 갑작스러웠어요. 해온 일을 봐왔기에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런 짓을 할 거라고는….”
“해온 일을 봐왔다구요?”
“읏…. 이건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아, 미안해요, 말하면 안 되는 거라면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하…하지만 정 궁금하면 알려줄 수도 있어요.”
나는 그렇게 궁금하진 않았지만,
어째 물어봐 주었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눈치를 채고 슬그머니 질문을 했다.
“그러면…. 물어봐도 될까요?”
“읏…. 원래는 비밀인데…. 사실 당신을….”
말하면서 엄청 부끄러워하는 헤스티아.
“저를…?”
“당신을…. 내 남편으로 삼으려고 데려온 거라…. 쭉 지켜보고 있었어요….”
“에…?”
“으읏….”
뭔가 엄청 새콤달콤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헤스티아.
남편감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일단…. 이게 무슨 횡재인지는 모르겠는데, 별로 현실감이 없는 게…. 혹시…. 설명을 좀 더 해줄 수 있을까요?”
“그…그게 일단 신계가 개판이 난 것은 알고 있죠?”
“네에. 다 여신이 돼서 균형이 무너졌다고 들었어요.”
“그냥 균형이 무너진 게 아니에요…. 하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TS가 유행이 되었다는 것은 먼저 들었을 거예요.”
“네. 남자 신들이 여신으로 변했다고….”
“그러는 와중에 유일하게 남자로 남은 신이 있는데…. 누군지 알겠나요?”
나는 잠깐 생각해보다가, 여자가 되면 영 곤란할 신 한 분을 떠올렸다.
“남성의 신까지 여자면 안 되겠죠.”
“맞아요. 남신은 그 신 하나만 남고, 전부 여자로 TS해 버렸죠. 여기까지는 균형이 엄청나게 많이 기울었긴 해도, 저울이 망가질 정도는 아니었어요.”
“거기에 더 뭐가 있나요?”
“남자 하나에 여신들 여럿이라면…. 뭔가 떠오르지 않나요?”
“설마….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던가….”
“맞아요. 전에 남자였던 신들이, ‘남성의 신’ 하나를 두고 캣파이트를 벌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신체가 여자지 마음이 여자냐고 비웃던 TS신들도, 하나 둘 껄렁한 남신에게 함락되어서 싸움에 가세했죠.”
“으아…. 원래 덜렁덜렁이들일텐데.”
“문제는…. ‘남성의 신’도 낄 곳 안 낄 곳 안 가리고 마구 찝쩍거렸다는 거예요. 원래 저한테도 엄청 지저분하게 굴었는데…. 전 처녀신이라 단칼에 볼일 없다고 했죠. 그런 놈이 여신 천지인 신계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었답니다.”
“아니…. 하지만 원래 남자….”
“저도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더 좋다던가 뭐라던가 하더라고요….”
“너무 차원이 높은 이야기네요.”
“아무튼, 그렇게 캣파이트를 하다가…. 사달이 났어요. 전쟁의 신이 질투심에 캣파이트가 아니고 스트리트 파이트를 해 버린 거예요.”
“스트리트 파이트라면…?”
“설명하긴 좀 복잡한데, 신계에서 벽돌 비슷한 걸로 통하는 무언가로 머리를 찍었어요.”
“허억….”
“그래도 신이라 그걸로 죽지는 않아요. 다음날이면 멀쩡해지거든요. 근데 빈곤의 신이라고…. 음험한 신이 있는데…. 그때를 노려서, 그 쪽 표현을 빌리자면 nice boat 해버린 것이지요….”
“헉…. 그러면…. 설마 죽은 건가요?”
“진짜로 죽였어요. 죽인 걸로 끝이 아니라 토막까지 내 놨죠. 듣기로는 ‘남성의 신’이 재미삼아 ‘빈곤의 신’을 한번 건드리고, 그 이후로 쭉 무시했었다는 모양인데…. 힘이 약해 어쩌지는 못하고 참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저질러 버렸다고 해요. 그 후에 난리통이 벌어져서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여신들 뿐이라고 신나서 막 날뛴 대가를 마땅히 받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렇게 마지막 남신이 죽으면서 진짜 우주가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우주가 무너져요?”
“세계를 유지할 신이 부족해져서 붕괴해 버리는 거예요. 저는 어떻게 새로 남신을 뽑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세계가 무너져도 역TS는 죽어도 싫다면서 다른 신들이 극구 거부하더라고요. 결국 다들 다른 우주로 도망쳐 버리고, 부서져 가는 세계에 나만 남았죠. 난 내 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거든요.”
“아….”
“이 안개는…. 쓸모없어진 우주를 지워버리는 차원의 정리도구 같은 거예요. 한동안 안개를 계속 연구하며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을까 이리저리 시도 해 봤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어요…. 다만 다른 걸 알게 되었죠.”
“뭔가요?”
“차원에 접촉해, 다른 차원에서 원하는 무언가를 끌고 오는 방법이요. 저는 안개를 이용해 새로운 남신 후보를 찾았어요. 남신의 힘이 남은 조각들을 혹시 몰라서 정령왕들에게 보관시키고 있었기에, ‘남성의 신’의 성체가 될 만한 씨앗을 다른 차원에서 불러올 수 있다면, 남신을 새로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새로 만들어요?”
“네. 그리고…. 음…. 그다음에는…. 둘이서 차츰 신을 늘려가면 세계를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신을 늘려요? 혹시….”
“…잘 알잖아요? 많이 해봤으면서…. 난 잘 몰라요….”
“아…. 그거 맞군요. 그래서 제가 뽑혔던 건가요?”
“뽑은 거라기보다, 조건에 맞는 대상이 나올 때까지 무한히 시도하는 거에 가까워요. 오랜 시간 동안 아무 소득도 없었죠. 제가 제시한 조건이 좀 빡빡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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