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화 〉 137
* * *
상황이 나쁠수록,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법.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꿈속의 그녀가 여신이라는 가설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진짜면…. 어쩌지?”
다음에 만나면 덮치겠느니 괴롭히겠느니 했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짜 여신이라면….
결국 나는 그날 밤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
새벽에 나간 이실리아는,
약재상과 물약상을 돌며 온갖 비약들을 전부 구해왔다.
한눈에 봐도 상당히 희귀해 보이는 약재들.
돈이 어디서 났냐고 하니, 혹시라도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시에 사용하라고 받은 돈이 있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온갖 비약과 영약을 맛본다.
예전에 한 번 알아본 적 있는,
곤충인지 식물인지 모를 무슨 무슨 가루라던가,
성스러운 동물의 다른 의미로 성스러운 부위를 말린 것이라던가.
수상쩍은 것들을 꾸역꾸역 씹어 삼킨다.
맛은 번데기나 말린 오징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질깃질깃 쫀득쫀득한 것이, 의외로 맛있어서 더 찝찝하다.
“어떠신가요? 효과가 있으실까요?”
“잠깐만요…. 아니요, 없는 것 같아요.”
“아직 준비한 게 많으니 좀 더 시도해 보시죠.”
처음에는 가루라던지 말렸다든지 아무튼 가공되어 있는 것들이었지만,
갈수록 원본 그대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보존한 것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생물학적인 위험도가 높아지는 게 피부로 느껴지지만,
눈 딱 감고 삼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검붉은 포션 안에 뭔가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눈을 딱 감고 단숨에 마셔버린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괴악한 맛.
노릿하니 화끈한 맛에 오독오독한 건더기가 목구멍에 걸린다.
억지로 삼키고 나니 구강청결체를 삼킨 것처럼 속이 화끈하다.
오장육부가 다 뒤틀려 세척당하는 느낌이다.
“으윽….”
헛구역질하는 걸 보고 이실리아가 오해했다.
“효과가 있으신 건가요?”
“아니요, 속이 안 좋아서.”
“부화 직전 불사조의 알을 데친 건데…. 이것도 소용이 없다면….”
아까 목구멍에 걸린 게 부리였나?
맙소사….
“…뭘 먹었는지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요….”
불사조 곤계란이라니.
혹시나 했지만 역시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생전 못 먹어볼, 아니 안 먹어볼 것들만 잔뜩 맛보았을 뿐,
저주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어요.”
버린 입맛을 헹구기 위해 냉수로 입을 가글하고 돌아오니,
이번에는 세레니아가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세레니아는 나를 욕실로 데려가서는,
아주 조금 민망하다는 듯 귓가에 속삭였다.
“원래는 그…. 사도님이 모든 힘을 모으셨을 때 제가 마지막에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만.”
“뭐…뭔데?”
“특수제작한 성수를 몸에 바르고, 신성력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의식입니다.”
“음….”
“일단 옷을 벗어 주시지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옷을 훌러덩 벗는다.
내가 옷을 벗는 것을 보고 세레니아도 마주 옷을 벗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세레니아의 알몸.
눈부시게 하얀 몸은, 지금은 투명하게 아름다웠다.
첫인상이 오징어 냄새만 아니었어도 좀 달랐을 텐데….
세레니아는 기도를 하며 성수를 자신의 벌거벗은 몸 위에 뿌렸다.
성수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세레니아의 몸을 맴도는 신성력을 따라 회오리쳤다.
“시작하겠습니다.”
대체 뭘 하려나 싶었는데,
세레니아가 가까이 다가왔다.
몸 주변을 휘돌고 있던 성수가,
내 몸에도 미끈하게 휘감겨 든다.
기분 좋게 따스하니 미끌거리는 성수에는,
정력과 반응에 녹아나는 신성력이 가득 담겨 있었다.
“흐읍…!”
눈을 질끈 감고,
성수채 몸을 내게 비비는 세레니아.
몽클한 몸과 매끈한 성수가,
내 주변을 맴돌며 온갖 사악한 것을 밀어낸다.
따끈따끈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한 신성력.
그러나 정력과 녹아드는 일은 없이, 투명한 막이라도 있는 듯 서로 뒤엉키기만 할 뿐이었다.
“이게…. 저주군요.”
신성력을 모아 투명한 막을 뚫으려는 세레니아.
성수가 모여, 한 점에 소용돌이친다.
나도 정력을 마주 끌어올려 그 점에 맞부딪쳤다.
힘과 힘이 맞닿으며, 저주가 압축된다.
“음…?”
사악한 저주라면 단번에 부서져야 정상일 터,
그러나 투명한 막은 오히려 더 단단해져 신성력을 튕겨냈다.
아니, 튕겨냈다기보다도 오히려 힘을 흡수해서 단단해지는 느낌이다.
“이건…. 하아….”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악한 저주가 아니었다.
엘프 여신이 내게 내린, 정당한 천벌이고 봉인이었다.
신성력으로 부딪히자 오히려 봉인이 강해진 것이 그 증거였다.
어쩌면 사악한 힘으로 공격하면 부서질지 모르지만,
이미 반신의 경지에 올라선 내 정력과 맞먹는 사악한 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내 몸 안에 깃든 정력도 일종의 신성력인 이상 사악한 힘과 부딪히면 무사하진 못할 것이었다.
그렇다.
세계가 말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왜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세레니아가 듣던 말던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는 엘프를 따먹는다.
그러라고 이 세상에 온 것이었다.
엘프를 따먹는다.
막 따먹는다.
골라서 따먹는다.
처녀만 따먹는다.
임신시키며 따먹는다.
좆집들을 따먹는다.
그런가?
아니다.
엘프들이 언제부터 내 좆집이었나?
절대 아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임신하고 싶어 하는 가련한 영혼들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남성의 신’의 사도가 되었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초심을 잃었다.
임신하고 싶어 안달이 난 엘프 눈나들과.
기분 좋게 으쌰으쌰하며 서로 즐기고 껴안고 입 맞추던 처음.
수십 번을 싸도 임신 한 번 하기 힘들어 침대 위에서 수없이 뒤엉키던 그때.
남자인 내가 가슴 만지는 것에 기뻐하던 순수한 엘프 눈나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그저 엘프들을 임신시키는 도구로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 좋으라고 골라서 질싸하는 좆집.
처녀와 거유만 골라서 박는 좆구멍.
나는 그녀들을 그저 도구화하고, 내 쾌락에 사용할 노예로만 생각했다.
그녀들이 내게 준 크나큰 사랑을, 나는 그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내 힘의 원천은, 그녀들의 기쁨이다.
내가 ‘남성의 신’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에게 남자의 기쁨을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엘프들이 내 노예가 아니었다.
내가 엘프의 노예였다.
거기서부터 시작했고,
지금 굴러떨어져 거기로 돌아왔다.
여신을 몰라보고 강제로 키스.
가슴까지 주무르며 능욕했다.
내가 소피엘을 그렇게 대한 적이 있었나?
개목줄을 살짝 걸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두근거리고 흥분하지 않았었나?
언제부터 엘프를 막 따먹을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된 걸까?
내가 그녀들을 좆집으로 대하면 나도 그녀들에게 보지쑤시개 이상이 될 수 없었다.
감정 없고 임신만 시키는 인스턴트 쾌락이 가득한 섹스.
그건 내가 추구하던 섹스가 아니었다.
외로운 누님의 자취방에서 팔베개를 해주며 이마에 키스를 해주던 그때.
나는 절대 그녀들은 임신질싸하고 휙 집어던지는 일회용 오나홀로 취급하지 않았다.
무엇이 나를 변하게 한 것일까?
힘.
힘이다.
정력왕의 힘.
아직 고작 절반을 모았을 뿐인데.
지나친 힘에 취해 나는 나를 사랑해준 엘프들을 그렇게 취급했다.
내게 사랑을 바치고 헌신한 그녀들을, 먹고 버리는 성노예 취급했다.
반대로였다.
‘남성의 신’이 사라진 세계.
남자의 위상이 추락한 세계.
내가 할 일은, 남자에 굶주린 그녀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며 즐거움을 찾던 그 순간.
바로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내가 이쪽 세상에 떨어진 것이었다.
그게 내가 할 일이었다는 것을,
인제 와서야 깨달았다.
“아….”
“사도님?”
“세레니아. 이실리아. 미안해요.”
“에…?”
“이건 저주 같은 게 아니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아무 말 말고 나를 따라와 줄 수 있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세레니아와 이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안개가 자욱이 깔린 숲속으로,
나는 홀로 걸어 들어갔다.
숲 입구에 남긴 세레니아와 이실리아는 내가 뭔 일이라도 당할까 봐 엄청나게 불안해했지만,
내 굳은 결심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미친 짓이다.
마수가 득시글거리는 안개 속으로,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걸어 들어가다니,
그러나 나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
이런다고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임신제는 고작 며칠밖에 남지 않았고,
내 자지는 여전히 발기불능이었다.
나는 실수했다.
정력에 취해 여성을 존중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
섹스섹스는 해도 좆집취급은 하면 안 됐다.
그녀,
이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안다.
헤일리아.
엘프의 지고한 여신.
내가 그녀를 함부로 대했기에, 그녀는 나에게 화가 났다.
이제 화난 그녀를 찾아 안개 속으로 들어간다.
몽롱하니 짙게 깔린 안개.
넘실대는 정력 덕에 내게 스며들지는 못하지만,
닿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느낌이다.
안개에 닿은 부위가 시리다.
정력이 없었다면, 굳어가는 시간에 갇혀 혼돈 속에 사라졌을 것이다.
이 안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오직 마수들 뿐,
희끄무레한 안개 저편에서, 노란 안광이 번뜩이며 짐승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누가 보면 자살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하겠지만,
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여신의 첫 키스를 빼앗고 가슴을 주물렀음에도,
여신은 나의 정력을 봉인하는 것에 그쳤다.
힘을 믿고 함부로 까부니, 힘을 봉인한 것뿐.
더 심한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은,
뭔지는 모르지만, 아직 내게는 쓸모가 남아있기 때문일 거다.
안개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여신이, 내가 가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나를 안개 속에서 죽게 놔둘 리가 없다.
만약 그녀가 여신이 아니라면 내가 하는 짓은 그냥 지능 부족 자살 시도지만,
난 그녀를 믿었다.
힘에 빠져 엘프들을 따먹을 대상으로만 보던 눈에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특별했다.
엘프들은 원래 아름답긴 하지만,
그녀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보고 있으면 존재 자체가 빛나는,
나도 모르게 끌리는 마치 중력과도 같은 매력.
그런 그녀가 그저 범상한 존재일 리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숲으로 들어간다.
새하얗게 낀 안개 속에서, 방향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간다.
계속 간다.
남자답게 간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영롱한 목소리,
안개 속에서, 순식간에 스르륵 그녀가 나타났다.
“위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나를 보자마자 왈칵 화를 내는 헤스티아.
그러나 자세히 보면, 짜증보다는 걱정이 더 많이 섞여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헤스티아.”
“…뭘 사과해요?”
“전부요. 힘에 취해서 함부로 군 거, 처녀 신의 첫 키스를 지저분하게 빼앗아간 거, 엘프들을 아껴주지 못한 거….”
“….”
“나는 평범한 남자였어요. 이세계에서 전이해 왔죠. 이쪽 세계에 떨어져서, 예쁜 엘프들하고 마음껏 하다 보니, 잠깐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었어요.”
“그게 뭔데요?”
“사랑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