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전 이세계에서 엘프의 노예가 되었다-102화 (101/140)

〈 102화 〉 102.

* * *

이틀이 지났다.

내가 두 녀석을 헬스로 단련시키는 동안,

헤일리아는 열심히 결계를 뚫는 중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눈 밑에 다크써클까지 생긴 헤일리아.

그녀의 모습에선 이제는 ‘영원의 도시’의 뒷세계를 좌지우지하던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슨 중독자처럼 결계를 뚫는 것에 집착해 밤낮으로 신성력을 퍼붓는다.

성유물로는 모자라 신관과 성기사들의 신성력까지 동원하기를 하룻밤.

결계는 뚫릴 것 같으면서도 은근슬쩍 두꺼워지길 반복하며 헤일리아를 애끓게 했다.

“대신관님, 이제 한계입니다. 신관 중에는 쓰러지는 자도 나오고 있어요….”

“쓰러진 자는 후송해서 치료하도록 하고, 멀쩡한 사람은 작업에 집중하세요.”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네….”

상당한 신성력을 지닌 헤일리아조차 피곤해질 정도라면,

일반적인 신관들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평소의 헤일리아였다면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원래의 계산대로였다면, 뚫려도 한참 전에 뚫렸을 결계였다.

세레니아가 은근슬쩍 신성력을 교묘하게 투입해서, 시간을 질질 끄는 줄은 모르고,

그저 조금만 더 하면 뚫릴 거라 믿는 헤일리아.

뚫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선을 약을 올리듯 이어가는 세레니아의 솜씨는,

거의 예술에 가까웠다.

“조금만 더어…!”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을까.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신경은 온통 결계에 가 있는 상태.

파고드는 신성력이 결계의 벽을 이룬 신성력을 뚫을락 말락 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제발…. 제바알…!”

애타게 돌파용 신성력 회로를 조작하는 헤일리아.

한계에 다다른 신관들이 늘어나는지,

이쪽에서 뚫어내는 출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결계는 끝끝내 뚫리지 않았다.

“여신님…. 제바알….”

울먹이며 여신님까지 찾는 헤일리아.

간절한 기도가 통해서였을까.

그 순간, 결계의 벽이 뚫리며 금이 쭉 가기 시작했다.

“아…! 아앗…!”

마침내 구멍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 손가락만 하게 생긴 구멍은, 금방 팔목만큼, 머리통만큼, 그리고 엘프 한 명이 드나들 만큼 넓어졌다.

“아아…! 여신님…! 감사합니다…!”

마침내 상대가 바닥을 드러냈다고 착각하고 기뻐하는 헤일리아.

날짜를 되짚어 확인해 보니 대의회 소집일 하루 전이었다.

하루.

고작 하루가 남은 것이지만, 그 시간은 더없이 소중했다.

사실 이 정도면 상대도 잘 버틴 것이었다.

‘그 자’ 남성교단의 사도도, 남자치고는 상당한 인물로 인정해줄 만도 했다.

“성 기사단에 집결 명령을 내리세요. 바로 남성교단으로 진입합니다.”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헤일리아가 왜 남성교단에 집착하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아무튼 며칠간 온 교단이 매달려 깎아낸 길이 마침내 열렸다는 것에,

여신 교단의 신관과 성기사들은 기뻐했다.

마침내 결계 안으로 첫발을 디딘 헤일리아.

그렇게나 빡빡하게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는, 밀도가 낮아지더니 한낮의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진입로.

‘남성의 신’의 신상이 늘어선 계단을, 중무장한 성기사들이 올라간다.

한 교단이 다른 교단의 본산에 침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성기사들은 잔뜩 긴장해 발걸음을 내디딘다.

일단 범죄자를 구속한다고 하였기에 명을 따르기는 하지만,

혹여라도 남성교단의 성직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거나 하라면 항명할 생각을 가진 자도 적지 않았다.

묘하게 불온한 공기가 맴도는 가운데,

남성교단 본산 대성전에 도착한 성기사들.

대성전이라고 해봐야, 여신 교단의 좀 큰 지부의 교회 정도 크기였다.

여기저기 개보수공사를 하던 중이었는지, 외벽은 어수선하고,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헤일리아를 선두로, 무장한 성기사들이 진입한다.

그녀들이 처음 맞이한 것은, 겁에 잔뜩 질린 남성교단의 신관들이었다.

“이게 무슨…?”

“당신들은 뭐죠…?”

평범한 남성교단의 신관들은 자초지종이라고는 하나도 듣지 못했었다.

세레니아가 시킨 대로 했을 뿐.

갑자기 무장한 엘프들이 우르르 들어오니, 겁에 질릴 법도 했다.

“헤일리아 에오론드! 그리고 여신을 따르는 이들이여. 이곳에는 무슨 볼일입니까?”

지팡이를 들고, 세레니아가 교단 위에서 외쳤다.

성스러운 대신관의 복장을 차려입고 신성력을 뿜뿜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정의로워 보이고 위엄이 넘쳤다.

“남성교단에서 범죄자를 은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숨겨도 소용없으니 당장 그들을 내놓으세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여기 있는 거 다 압니다. 결계를 치고 버틴 건 꽤 훌륭했었지만, 이제 끝입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순순히 ‘그 사람’을 내놓으세요!”

“그 사람이라는 게 누구인지요?”

“내 동생을 납치해간, 남성교단의 사도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더는 말해봐야 소용없겠군요. 성기사단! 세레니아 대신관을 구속하도록!”

타 교단의 대신관을 구속하라는 명령에, 성기사들은 움찔했다.

사실 겉모습만 보면 헤일리아보다 더 성스러워 보이는 세레니아였다.

구속하라고 해서, 쉽사리 구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리고 마력과 신성력으로 본산을 샅샅이 수색하도록 하세요. 분명 누군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도 성기사들은 어쩔 줄 몰랐다.

안 따르자니 무섭고 따르자니 그것도 무섭다.

악마나 마수를 상대하는 것이라면 두려움을 모르는 성기사들이었지만,

다른 교단의 대신관이라니….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세레니아에게 다가가는 성기사들.

갈등하는 눈빛을 읽은 세레니아는, 크게 고함쳤다.

“그만!”

신성력이 가득 담긴 고함에, 성기사들은 움찔 멈춰 섰다.

저 정도로 정순한 신성력을 지닌 대신관이 이단이라거나 할 리는 없었다.

교단이 다르다고 해도 선한 신들을 추종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감히 칼을 들이대는 것은 엄두조차 나질 않는다.

“남성교단을 이리 핍박하는 걸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여신 교단 대신관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

“구속하든 뭐 하든 마음대로 하시고, 본산을 어디 한 번 마음껏 뒤져 보시지요.”

지팡이를 놓고, 당당하게 말하는 세레니아.

상대가 항복한다는데, 성기사들의 사기는 오히려 더욱 떨어졌다.

진짜 하면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들었죠? 세레니아 대신관과 남성교단 신관들을 구속하세요.”

“네…. 넵….”

시키는 대로 신관들을 붙잡기는 하지만,

성기사들은 눈에 띄게 꺼림칙해했다.

이렇게 되었다면, 반드시 이곳에서 무언가가 나와야만 한다.

아니면 이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큰 문제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결국 남성교단 본산의 수색이 끝났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수를 쓴 것도 아니었다.

세레니아를 비롯한 남성교단 신관들은 전부 꼼짝 못 하게 억류된 상태.

식량창고부터 시작해서 교단 성물함까지 멋대로 다 뒤져 보았는데도,

헤일리아가 찾던 범죄자는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관님…. 아무래도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것이….”

억지로 밀고 들어온 만큼, 수색에는 여신 교단의 신관들과 성기사들도 필사적이었다.

뭐라도 나와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문서를 뒤져 봐도, 주기적으로 세레니아가 삥(…)을 뜯어간 것 빼고는 수상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세레니아를 고문이라도 한다면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다른 교단의 대신관을…?

구속하는 것만으로도 그 난리가 났었다.

심문이나 고문까지 한다고 하면, 여신 교단의 성기사라도 가만히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건…. 당했군요….”

그제야 헤일리아는 깨달았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저택을 습격당해 ‘세리엘 일기’와 세리엘을 빼앗긴 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저 유괴라고 하고, 범죄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사방을 들쑤셨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남성교단 본산.

남성교단의 사도는, 교묘하게 헤일리아의 시선을 이쪽에 집중시켰다.

이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래서 더더욱 무리수를 두도록.

지금 헤일리아가 저지른 짓은, 특별한 증거도 없이 다른 교단을 침입해 성직자들을 구속한 행위.

이것만으로 탄핵 사유로 충분할 정도였다.

거기에 결계를 뚫는다고 여신 교단의 성유물을 무단 반출해 사용하고,

민간인들을 구속해 심문하고,

타 교단의 성지를 강제로 침입해 수색했다.

그리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생이 유괴당했기 때문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헤일리아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증거 이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성을 잃고 교단의 힘을 남용했다.

결과가 있었다면 과정을 정당화할 수도 있었겠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본래 오히려 손에 쥐고 있던 것마저 모래처럼 흘러내린다.

신관들과 성기사들은 공공연하게 헤일리아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누구나 생각하고 있다.

이제 여신 교단마저 더는 헤일리아를 지지하지 않는다.

이 순간, 헤일리아는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게임은 이곳, 남성교단에 시선을 뺏긴 순간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내일이면 ‘그 자’는 대의회에 출석해 헤일리아의 치부를 드러내고,

집정관을 등에 업고 헤일리아를 여신 교단 대신관의 자리에서 끌어낼 것이다.

“졌구나….”

며칠간 애간장이 다 닳도록 매달려서인지,

오히려 졌다는 것을 안 지금은 마음이 편했다.

“끝났어….”

포기하면 편하다.

증오와 분노가 온몸을 가득 채워야 할 것 같지만,

헤일리아의 마음속을 채운 것은 평온이었다.

며칠 밤을 새운 피곤이 갑자기 몰려오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헤일리아 에오론드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그 말은, 남성교단 본산에서 끝까지 아무것도 나온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패배를 다시 확인한 그녀를 찾아온 것은, ‘공화국의 검’인 이실리아였다.

“집정관께서 헤일리아 대신관님을 호출하셨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가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실리아를 따라 순순히 마차에 오르는 헤일리아.

집정관 관저로 가기 전에, 헤일리아는 남성교단의 신관들을 풀어 주고, 남성교단의 본산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엘프는 고귀한 종족이다.

패배하는 순간에도 추악하게 발버둥을 치는 것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해야 할까.

묵묵히 창밖의 경치를 보며 패배를 되새김질하는 동안, 헤일리아는 집정관 관저에 도착했다.

세계수 심부에 있는 그곳.

이미 자신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더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일까.

의자에 앉아, 집정관인 셀레시아 라 에티에넬을 기다린다.

“왔는가….”

기운이 쭉 빠진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셀레시아의 목소리는 조금 친절했다.

“집정관님.”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빨리 포기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졌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남은 건 저를 교단에서 쫓아내는 일뿐…. 굳이 대의회 시작 전에 저를 보자고 하심은 어째서인지요?”

“내가 보자고 한 것이 아니니라.”

“그럼….”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하시더구나.”

“그분이라면…?”

그분이 누구겠는가.

나였다.

잠깐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다가, 타이밍 맞춰서 나간다.

대체 어떤 여자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오? 생각 외로 예쁜데?”

몸매관리 안 한 숏컷이라고 해서,

남자처럼 스포츠머리를 한 쿵쾅쿵쾅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단정한 보브컷에, 부드러운 상아색의 아름다운 머리카락,

얇은 검은 테 안경을 쓴, 뭔가 피폐한 느낌이 드는 지적인 미녀였다.

게다가 할머니 닮아서인지 가슴도 상당히…!

몸매관리 안 했다는 게 가슴이 크다는 뜻이었나…!

“…당신이….”

“응. 맞아. 내가 남성교단의 사도야.”

“이렇게 보게 되다니…. 하핫…. 뭐죠? 제 마지막을 조롱하려고 온 건가요.”

“그건 아니고,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생긴 게 어떤지 궁금해서.”

“흥…. 제 외모 따위…. 어디 가서 자랑할 수준이 아닌 건 알고 있습니다.”

“아냐. 아주 예쁜데? 엄청 좋아. 내 타입이야.”

“…네?”

“처녀라고 들었는데…? 흠, 내가 좀 따먹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순간 헤일리아는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초면에 뭐?

따먹고 싶어?

남자가?

그걸 또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거 제정신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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