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71.
* * *
"이게 그렇게 좋단 말이지.."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들어올려 본다.
그 장면에, 속에서 뭔가 불끈불끈한다.
아이고 이 눈나야, 흥분시키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면 덮칩니다."
"앗.. 안 돼..♡"
"정말 안되는 것 맞아요?"
"하.. 학교에서는 안 되는데..♡"
"목소리가 암컷 목소린데..?"
"아 암컷..? 내, 내가? 아.. 아니야.. 절대 안 돼."
"알겠어요. 칫. 꼭 약속 잡아요. 아, 오늘 밤은 어때요?"
"오늘 밤은 곤란해.."
"왜요?"
"오늘 임신하면 다른 엘프들이 학교에서 몰래 한 거라고 생각할 거 아냐."
"그거 좋은데요?"
"안 돼♡ 나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긴 한데..♡"
"아.. 잠깐 화장실 들렀다 갈까요?"
"응? 급해?"
"급하긴 급하죠."
"진작 말하지.."
"아니, 에로리나 따먹고 싶어서요."
"아니 그런..♡"
"응..? 화장실에서 교감 전용 자지노예가 되서 뒷치기로 퍽퍽 따먹어 줄게요."
"그..그런 말 하면 못 써..!"
"진짜 안 되는 건가.. 해준다고 하는데도."
"그.. 이상한 것도.. 싫은 건 아니지만.. 나는 지위가 있는 만큼, 나름 나를 임신시키는 남자를 위해서 이런저런 준비를 해주고 싶어.."
"준비..? 뭔데요? 반지 같은 건 싫다구요..?"
"그..그래?"
"보석, 반지, 목걸이, 피어싱, 다이아몬드, 순금, 백금,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요."
"그, 그렇구나. 음. 참고할게."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걸까.
생각해보니 업소에서 일할 때 몸값도 마련했던 눈나다.
월급도 상당히 쎌 테니, 좀 심각한 걸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미리 말해둬서 다행이야..
아무튼 그렇게 약속을 잡고, 견학을 마쳤다.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아르피엘과 같이 돌아가는데,
마차에 한 명이 더 탔다.
"아리엘..?"
"아.. 네, 오빠..♡"
수줍게 대답하고 아무 말 못하는 아리엘,
아르피엘이 대신 설명을 해 주었다.
"오빠. 임신 시킨 기념으로 아리엘과 데이트 한 번만 해 주세요."
"데이트?"
"아리엘이 남자하고 데이트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해서요."
"아, 그러자 그러면. 어차피 딱히 할 것도 없었고.."
그렇게 우리는 시내로 나갔다.
아르피엘은 쇼핑을 하겠다면서 씨익 웃더니,
아리엘과 나만 남겨놓고 쏙 빠져버렸다.
"실컷 즐겨..♡"
"고마워 아르피엘..!"
맛있는 건 절대 혼자 먹지 않는다.
좋은 건 나눠 먹는다.
살짝 나사가 나간 것 같지만,
선량(?)하기 그지없는 아르피엘의 모습이었다.
'다 들려..'
나는 대화를 못 들은 척 애쓰며, 마차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엘프들로 붐볐다.
"오..오빠! 임신시켜주신 기념으로, 최선을 다 해 오늘 하루 즐겁게 해드릴게욧!"
아리엘의 기세가 대단하다.
"으, 응 그래. 일단 손 잡을까?"
"하햣..♡"
"왜? 왜 이상한 소리를 내고 그래?"
"남들이 다 보는 데서 손을 잡는다니.. 부끄러워요..♡"
나는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었지만, 조용히 넘어갔다.
따지면 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즐기자.
그런데 손을 잡는다더니, 아리엘은 아예 팔짱을 끼고 붙어왔다.
꼭 낀 팔에서는..
어떤 푹신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일단 저기, 까페로 가요! 제가 뭐 마실 걸 사 드릴게요!"
"으, 응. 그래."
카운터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아리엘은 조신하지 못하게 내 옆에 찰싹 붙어 있다가,
점원이 주문번호를 부르자 후다닥 가서 음료를 들고 왔다.
나는 쌉싸름한 차,
아리엘은 새콤달콤한 과일즙이었다.
차는 잘 못 끓이지만,
맛을 보는 것 만큼은 나름 자신있다.
음, 깊은 쓴맛에 감도는 은은한 숲의 향.
좋은 찻잎을 쓴 것이 틀림없다.
내가 차를 음미하자, 아리엘이 궁금한지 물어보았다.
"오빠, 그거 맛있나요..? 쓰지 않아요?"
"쓰긴 한데, 맛있어. 한 번 먹어볼래?"
"아..♡ 그거 간접 키스.."
"왜? 싫어?"
"아, 아뇻! 좋아요..!"
근데 이제 와서 간접 키스니 뭐니 해도..
어쨌든 아리엘은 고개를 숙여 내 음료를 쪽 빨아 마셨다.
"으.. 써요.."
"그렇지."
"제 주스가 훨씬 맛있어요."
"그래? 나도 한 번 맛 좀 보여줄래?"
그렇게 말하자 쥬스를 내미는 아리엘,
조금 마셔 보니, 그야말로 애들이 좋아할 것 같은 새콤달콤 시원한 맛이다.
"맛있네."
"그쵸? 헤헷..♡"
이게 뭐라고 엄청 좋아하는 아리엘.
가슴이 작은 게 아쉽지만, 얼굴 만큼은 정말 예쁘고 귀엽다.
헤실거리며 웃는 표정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머리에 손이 간다.
쓰윽쓰윽 머리를 쓰다듬자, 잘 길든 고양이처럼 달라붙는다.
손에 감기는 아리엘의 머리카락 감촉이 너무나도 부드럽다.
참으로 느긋하니 여유로운 한 때였다.
'좋네.. 앗..!'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세피아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하필 이럴 때?
쇼핑백을 든 세피아가, 나를 바라본다. 순간,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 앗..!"
"어.."
어색한 순간.
세피아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다.
이거 뭔가, 바람 피다 걸린 느낌이다.
아니, 내 취향에는 아리엘보다는 세피아가 더 좋은데.
문제는 지금 상황이..
음료수 나눠 마시며 품에 안겨 쓰다듬쓰다듬 받고 있는 상황이라.
"아.. 으읏.."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달려가는 세피아.
아니, 도망칠 일은 아니지만 만약 누가 도망쳐야 하는 거면,
바람 피다 걸린 내가 도망쳐야지..
왜 세피아가 도망치는가.
"잠깐만, 아는 사람이라."
나는 아리엘을 옆자리에 앉혀 놓고 그대로 세피아를 쫓아갔다.
"멈춰요!"
"..허억.. 허억..!"
쇼핑백도 냅다 던지고 후다닥 도망치는 세피아.
"아니 왜 도망가는거야! 멈춰!"
크게 반말로 소리쳐 보지만, 세피아는 멈추지 않았다.
따라가는데
세피아 안 그렇게 생겼는데
통통하고 육덕진데
겁나 잘 뛴다.
힐도 높은 신을 신고서,
엄청나게 뛰어가는 세피아.
'이익! 질까보냐!'
냅다 아랫배에 힘을 꾹 주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린다.
거리를 지나가는 엘프들이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본다.
부끄럽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으랴아아아앗!"
소리를 마구 지르며, 죽을 힘을 다한다.
그러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뭔! 학생 때 육상 유망주였나..?'
진이 살짝 빠질 무렵,
다행스럽게도(?) 세피아가 신은 힐이 돌 틈새에 찍혀, 그대로 자빠진다.
성대하게 한 바퀴 구르는 세피아.
"아이고.. 저런.."
나는 호다닥 달려가 세피아를 부축한다.
세피아는, 운 걸 감추려고 하는지 눈을 막 부비더니 얼굴을 피한다.
"울었어요?"
"아..아..아니야.."
"나 똑바로 봐요."
빨갛게 부은 눈과 뺨
이거 울었다.
100% 울었다.
울면서 그렇게 잘 뛴 건가.
감탄할 상황은 아닌데 감탄이 된다.
"아니 왜 도망쳐요, 그러게?"
"아.. 으.."
"뭘 샀는지 모르겠지만, 쇼핑백도 다 내던지고 말이야."
"으.. 읏.."
주저앉은 세피아를 붙잡아 일으키려고 하는데,
세피아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진짜 몸에 기력이 없는 게 아니라, 심리적으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하아.."
나는 염치불구하고, 세피아를 따라 길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았다.
"왜 도망갔어요? 그거나 좀 말해봐요."
"그..그..그게.. 바..방해한 것 같아서.."
"뭘 방해해요?"
"그.. 예..예쁘고.. 저..젊고.. 가..가슴도 작은 애랑.. 데이트 하는 걸.."
"그게 왜요?"
"내..내가 아..아는척이라도 하면.. 부..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아서.."
어줍잖게 변명을 하는 세피아.
나는, 발게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그런 거 아니죠?"
"뭐..뭐가?"
"내가 젊고 예쁘고 가슴도 작은 애랑 있으니까, 자기랑 비교하고 질투하고 가슴 아파서 도망간 거잖아요."
정곡을 찔렀는지, 세피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아.. 그..그게.."
"보면 가슴이 따끔거리고, 먹먹해지고, 눈물이 찔끔 나죠?"
"으.. 응.."
"그런 걸 질투라고 하는 거에요."
세피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
"질투할 것 없어요.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세피아같이 좀 육덕지고 가슴도 큰 여자가 더 좋아요."
"으.. 응.."
"근데 이렇게 말해봐야 못 믿겠죠? 얼굴을 보면 알아요."
".."
"돈 냈기 때문에 이런 말 한다고 생각하죠? 세피아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으니까요."
"그.. 그런 게 아니라.. 개..객관적으로.. 나..나는 별로 매력이 없어.."
"나한테는 있어요."
"고.. 고마워.."
"하아. 아직도 믿는 눈치가 아니네요. 어떻게 하면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까요..?"
"미..믿을게.."
"아뇨, 보면 알아요. 세피아는 여전히 본인이 나에게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나 진짜 세피아 같은 타입을 좋아하는데.. 진짜 이걸 어떻게 이해시키면 좋을까요..?"
"호.. 혹시.."
"뭔가요?"
"보.. 보여줄 수 있어?"
보여줘?
뭘?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보여.. 뭘요?"
"나.. 나하고 비슷하게 가슴 큰 여성엘프하고 관계를 가지는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아니, 직접 경험하면 되죠. 왜 하는 걸 보려고.."
"지..직접 하면 너..너무 황홀해서 뭐..뭐가 뭔지 제..제대로 판단할 수가 어..없을 것 같아.. 그리고.. 나..난 그런 쪽에 경험이 없어서.. 하..한 번 시범을 보고 싶어.."
갑자기 말을 쏟아내는 세피아.
속에 담겨있는 진실된 욕망이었는지, 말을 더듬는 것이 덜해졌다.
"아니.. 그래도.."
"부.. 부탁할게.. 지..진짜 가슴 큰 여자가 좋으면.. 하..하는 걸 보여줄 수도 이..있잖아?"
갑자기 세게 나온다.
한마디로 이거다.
'가슴 큰 게 좋다고 했지? 구라 아님 증명해봐!'
아무래도 에로리나와 달리, 세피아의 콤플랙스는 꽤 깊고 어둡고 큰 것 같다.
에로리나는 가슴 쪽쪽 빨고 만져주는 걸로 설득 완료였는데.
세피아는.. 참 여러가지로 복잡한 여자였다.
"그건.. 마침 적당한 상대가 있긴 한데.. 하아.."
"부.. 부탁할게.."
"알겠어요. 그래도 먼저 상대의 의사도 물어봐야 하니까요."
"으..응."
"일단 돌아가요."
"응.."
내가 조건을 수락하자, 세피아는 마음이 풀렸는지 이제야 일어난다.
툭툭 털고 길을 되돌아와, 세피아가 던지고 도망간 쇼핑백을 되찾아 보니,
내용물은 남자의 옷이었다.
"응..? 남자 코트네..? 이건 누구 꺼에요..?"
"그.. 너.. 주려고.."
"아.."
구겨진 쇼핑백에 있던 옷을 다시 한번 본다.
엘프 귀족들이 입는, 주문 제작한 깔끔한 코트.
마력사가 섞인 비싼 캐시미어 원단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강력한 보호의 마법까지 부여되어 있다고 한다.
전과 같이 흉흉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고.
'아, 좀 불쌍하긴 하네.'
아마 선물을 사고 나한테 줄 생각에 두근거리며 다녔을 텐데,
하필 그 타이밍에 마주쳤으니..
"그러면.. 이거.."
"이.. 이렇게 됬으니.. 지..지금 선물하고 싶은데.. 다 구..구겨져서.. 보..보기가.."
"괜찮아요. 세피아가 준 것인 걸요. 잘 입을게요."
내가 코트를 툭툭 털고 몸에 걸치자, 세피아는 은근히 좋아했다.
"잘 어울려요?"
"으..응.."
"고마워요. 좀 미안하네요.. 이런 걸 다 받고.."
"아..아냐.. 나..나야말로 미..미안해.. 데.. 데이트 하는 데.."
나는 세피아의 팔을 붙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기 세피아."
"으..응?"
"걔는 오늘 만났고, 아는 사람 부탁으로 임신시켰을 뿐이에요. 걔보다는 세피아가 훨씬 사랑스러우니까요."
사랑스럽다는 말에, 세피아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으.. 응..♡"
"뭐, 있다가 나중에 직접 보면 알겠죠. 오늘 데이트하는 것도, 마침 때가 잘 맞아서 그런 것 뿐이니까. 너무 질투하지 말아요."
세피아는 눈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으..응.."
미니 세피아입니다.
4장 작가님(instagram:@km4jng)작품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