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171. 역시... 이 정도는 해야.. 용서받는 거죠.
* * *
"강민 군. 일어나 보게."
툭툭. 뭐가 내 이마를 콕콕 찌른다.
"으으 뭐예요?"
눈을 뜨자 어깨 바로 옆에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윽, 으어어어어억!"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래라! 죽을 뻔 했네!
잠깐 잠들었었나?
하지만 까마귀는 내가 바닥에 구르는 걸 신경쓰지 않고 말했다(갈가마귀였나?).
"박지철이 경찰서에서 쓰러져서. 아까 여기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이상해. 응급실로 들어간 경찰이 안 나와."
뭐? 순간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어딘데요?"
"응급실. 저 쪽이네."
갈가마귀가 앞에서 퍼덕퍼덕 날았다.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주차장엔 경찰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사람이 없었다.
'뭐지? 불안한데?'
"나는 일단 예림이쪽으로 가는 길 보고 있겠네. 자네가 신고하도록!"
그러며 병원쪽으로 푸드득 날아갔다.
박성연 씨. 성향은 NTS지만 일처리 하나는 확실하다.
마음 속으로 감사를 표하며 응급실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저! 여기! 경찰 오지 않았나요?"
그러자 간호사 한 명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셨죠. 저기 응급실 화장실 쪽으로 가셨는데?"
"나오는 거 봤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응급실 안에선 조용히"
목소리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일반인 화장실은 모두 열려있고.
잠깐 그럼.
장애인 화장실은 누가 사용중으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억지로 문 틈으로 손을 넣어 끼긱, 문을 열었다. 손톱이 빠질 것 같이 아팠다.
"저기요! 지금 뭐 하시는!"
달려온 간호사가 입을 턱 막았다.
경찰 두 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둘의 팔과 다리는 수갑으로 연결된 채였다.
그 광경을 보며 머릿속이 놀랍도록 차가워졌다.
"경찰 불러요. 환자들 인질로 잡을 수도 있으니까 원내에 방송하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예림이가 있는 병실로 달려올라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 놈이라면
도망치기 전에, 예림이를 해코지할 것 같았다.
달려 올라가며 전화했다.
"예림아. 당황하지 말고 들어! 지금 박지철이 도망쳤거든?"
[ 예?]
"경찰 부르고! 방 문 잠그고 들어가 있어!
간호사들에게 말하고!"
[ 예? 예! 알았어요! ]
갈가마귀 한 마리가 더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음. 좋아. 일단 까마귀들로 병원 안을 수색하고 있네!
예림 양은 경찰에게 전화했고! 문은 잠궜다네!"
그러자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병원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면 정말 곤란할 터.
아마 이 놈도 그걸 깨달으면 도망치겠지.
"일단... 혹시 모르니 로비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죠."
병원 로비엔 보안업체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떡대도 두툼하고 힘도 세고.
이 사람들에게 말하면 예림이를 지키는 걸 도와줄 터.
로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뭐지?'
걸어도. 걸어도.
로비가 가까워지지 않는다.
'... 뭐지?'
갑자기 불길해졌다. 한참을 걸어도 마찬가지. 혹시 뛰면 달라지려나 싶어 달려봤지만 가까워지지 않는다.
목소리를 돋궈 외쳐봤다.
"저기요!! 여기좀 봐 주세요!!"
분명히 40M도 안 되는 거리. 분명히 들려야 맞는데? 몇번 더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저기요! 여기라니까요!!!! 저기요!!! 지금!! 범죄자가 도망쳤어요!!"
그러자, 한 명이 고개를 돌려 이 쪽으로 걸어나왔다. 들리나 보다!
하지만 나온 보안요원은 유리문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
'이게 무슨'
저들이, 날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고? 이게 무슨
그 때. 청량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 강민.
어딜 그렇게 바삐 가?"
금발. 초록색 눈.
성당 기사단의 아나이스였다.
이번엔 수녀복이 아닌 평상복. 한 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었다.
짜증에 머리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날 벌 주고싶은 건 알겠는데. 좀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저 안에 예림이가 위험해. 범죄자가 노리고 있어."
하지만 아나이스는 입가를 비틀며 웃을 뿐이었다.
"글쎄. 예림이가 다치면 네 죄로 가산되지 않을까?
난 그랬으면 좋겠어."
으득. 이가 갈려온다. 저 미친 년. 머리에 피가 몰린다.
"아니. 대체 내가 왜 싫은데? 왜 그따위로 구는데?
내가 아무리 싫어도 일단 사람 먼저 구해야 할 거 아냐! 너 성당 기사단이라며!"
그러자 아나이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졌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표정했다.
그녀가 입을 열였다. 경멸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난... 너처럼 악마와 붙어먹는 남자들이 정말 싫어.
솔직히. 저 여자가 다쳐서 네 죄가 더 늘어나길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악마와 붙어먹는 남자는 정말 혐오스럽다고.
내 애비도 그랬거든. 내가 열 여섯살이 되면 악마에게 바치겠다고"
"그럼 씨팔! 니 애비한테 가서 따져!"
나는 말을 끊으며 악을 썼다. 저 미친 년. 지 인생사 불우한 걸 왜 나한테 따지고 지랄이야!
내가 잘못했어? 샤를이랑 나랑 우리 둘이서 놀다가 예림이가 다친 거고, 그래서 지금 구해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아나이스는 멍하니 날 쳐다봤다. 내 욕설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귀 먹었냐? 느그 애비한테 가서 따지라고! 니가 날 괴롭힌다고 뭐가 달라져? 예림이 똑같은 꼴로 만들 거야?"
소리지르며 나는 결계의 가장자리를 계속 달렸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터질 것 같다.
달려도 달려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 때 풀밭 가장자리를 돌던 갈가마귀가 비명을 질렀다.
"강민! 박지철이! 7층에 불을 지르려고 한다! 알코올을 뿌리고 있어!"
까악거리는 비명소리에 아나이스가 환하게 웃었다.
"어머. 잘 됐네. 저 중에 네가 받을 벌은 얼마나 될까?"
그러며 천칭에 속삭인다.
"천칭이시여. 강민에게 어떤 벌을 줘야 할까요?"
뇌세포가 끊어질 정도로 열이 받는다.
저 미친 년 때문에 예림이가 죽으면 가만 안 둔다.
나는 달리는 걸 멈추지 않고 천칭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런 씨발!!!!
야!!! 천칭!!!! 너 사람 죽게 둘거야?
저 미친년이 지랄하는 걸 두고 볼거냐고!!!!
어떻게좀 해 봐 저 년 잘못이 대부분 아냐?"
등 뒤에서 아나이스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 헛짓거리 하긴 천칭이 네 말을 들을 것"
그 때, 끼익 끼익 천칭이 빙빙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성의 서늘한 소리. 그리고 아나이스의 당황해 소리쳤다.
"자, 잠깐만! 왜 날 보는"
무기질적인 굵은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나이스. 천칭의 사용자격을 박탈한다."
"아, 안 돼! 왜 이러는데!"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진다. 하지만 천칭은 멈추지 않았다.
"신성력의 사용을 제한한다."
그 순간, 달려도 달려도 줄어들지 않던 로비까지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보도 턱에 걸려 화려하게 넘어졌다. 퍼억, 이마가 땅에 부딪히고 머리에 번쩍 하는 번개가 쳤다.
하지만 아파할 새도 없다. 벌떡 일어나 로비로 달렸다.
"그리고"
천칭이 아나이스에게 처벌을 더 내리는 것 같았지만 관심 없었다.
내 관심사는 지금 오직 예림이를 구하는 것 뿐이었다.
"어, 어? 뭐야? 괜찮으세요?"
병원 안으로 뛰어든 내게 보안요원들이 당황해 달려들었다.
"피, 피 봐! 이거 응급실"
이런 젠장. 왼쪽 눈에 뜨뜻한 게 흐르던데. 이거 피였냐?
하지만 나는 무시한 채 외쳤다.
"응급실 말고! 7층에! 불났어요!
그리고 지금 누가 거기서 행패부리고 있대요! 빨리 가 봐야 해요!"
"그게 무슨"
그때 보안요원의 무전이 울렸다. 그리고 병원 안에도 경보가 울려퍼졌다.
"7층. 화재발생. 대피 요망"
"빠, 빨리 가죠!"
보안요원 네 명 중 세명이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한 명은 옆에서 날 부축했다.
"이거 놔! 7층으로 가야 해!"
팔을 뿌리치고 계단을 향해 달렸다.
이럴 때일수록 사람들은 엘리베이터에 모여든다.
지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아마 나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달려 7층으로 향했다.
결계를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던 폐는 녹은 쇳물을 들이킨 것처럼 아프다.
넘어진 머리는 아프고 깨질 것 같다.
하지만 예림이한테 가야 한다.
나 때문에 또 예림이가 다친다면 난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7층, 7층!'
7층엔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간호사들은 모두 환자를 대피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눈으로 예림의 병실을 찾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예림의 병실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환자분! 나오셔야 해요! 불났어요! 대피해야 한다니까요?"
그리고 나는, 그대로 돌진해 놈의 옆구리에 스피어 태클을 먹였다.
영선 누나에게 배운 태클. 아주 정확히 적중했는지, 우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뻥 튕겨져 나가 병원 복도를 굴렀다.
씨발새끼, 경찰서 탈출하면서 입었던 양복은 좀 갈아 입어라!
병원이면 환자복으로 위장이라도 하던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질렀다.
"예림아! 나야! 강민이야! 나와!"
"오빠! 안 돼요! 부모님 못 걸어요!"
이런, 젠장 침대째로 이송해야 하나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허벅지에 불타는 듯한 감각이 달렸다.
"크악, 크아아!"
내 의지를 무시하고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허벅지를 보자 은빛 칼날이 꽂혀 있었다.
박지철 이 개새끼. 어디서 또 뒤적거려서 메스까지 훔쳐왔구나.
허리를 붙잡고 날 넘어뜨리려 했다. 하지만 나도 괜히 영선 누나랑 운동한 건 아니거든.
바로 니킥을 턱에 꽂았다. 놈의 머리가 흔들렸다. 그리고 바닥을 기었다.
놈도 내 스피어 태클에 제정신이 아니게 됐는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이예림, 김강민! 이 씹새끼들아! 내가! 너 죽이고 만다!
너네만 담구고 탈출하면 괜찮다고"
"좀 닥쳐!"
놈의 머리를 향해 사커킥을 날렸다.
영선 누나가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아나이스도. 샤를도. 박지철 이 새끼도.
정말 오늘은 날 빡돌게 하는 일들밖에 없었다.
그림같이 발차기가 나간다.
내 발차기는 정말 깔끔하게 박지철의 손 사이로 들어가 안면을 강타했고.
놈의 몸이 한번 부들, 떨리더니 뒤로 제껴졌다.
"쓰, 쓰러뜨렸나?"
툭툭 건드려 봤는데 반응이 없다. 진짜로 쓰러뜨린 듯 했다.
클리셰처럼 '형편없군' 하고 일어나는 일 따윈 없었다.
몸에 힘이 빠진다. 간신히 벽을 잡고 섰다.
박지철을 쓰러뜨리고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가자 힘이 없어진다.
등 뒤에서 취이익 하는 소리, 스프링쿨러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쏟아지고, 소화기를 든 보안요원들이 걸어온다.
나는 힘없이 손을 들었다.
"저기요, 여기! 이 사람이 저를 칼로 찔렀는데"
"예?"
보안요원들의 경악한 목소리. 그리고 내게 다가온다.
"이거 보이시죠?"
허벅지의 메스를 보여준다.
근데 왜 이렇게 어지럽냐.
허벅지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게 이거, 농담이지?
뭐 정맥이라도 다친 거야?
그리고 휘청. 몸이 쓰러졌다.
"오빠, 강민 오빠!"
이건 예림이 목소리 같은데.
그걸 들으며 난 까무룩하게 정신을 잃어 버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