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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예림이는 처녀가 아니라니까요!-175화 (175/358)

〈 175화 〉 172. 멀고 먼 여정이 끝나고

* * *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었다.

"뭐야. 이게 대체 무슨..."

몸을 일으키려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아윽!"

"가, 강민아?"

침대 옆의 보호자 침대에서 누나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쇼파에서 자고 있던 유다 누나도.

"누나... 이게 무슨 일이에요?"

팔에는 링거. 머리와 허벅지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자초지종을 묻는 내게 영선 누나가 울먹거리며 설명했다.

"강민아. 너 진짜 큰일날 뻔 했어."

허벅지의 대동맥이 끊겨서 바로 수술방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혈관 접합까지 했다고?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예림이도 같이.

간호사는 무덤덤하게 내 눈에 라이트를 비춰보고, 허벅지 상처를 한번 점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셨네요. 동공반사는 멀쩡하고... 걱정 안하셔도 되겠네요. 그래도 가급적 일주일 정도는 침대에서 일어나지 마세요."

"강민이 죽는 거 아니죠?"

유다 누나의 말에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호들갑을 이렇게 떠냐는 표정이었다.

"이 정도면 큰 수술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시구요. 일주일 정도만 누워 계시면 될 거에요."

휴우. 방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간호사는 방 안을 보며, 대체 뭐 하는 남자지? 하는 눈빛으로 날 봤다.

하긴. 이런 여자 셋이랑 다니면 나라도 쳐다보겠다.

간호사가 나가자 유다 누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강민아. 샤를은 어디 갔어? 왜 네가 이렇게 됐는데도 안 와?"

이제 말할 때가 됐네. 셋이 모이기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모두 설명했다.

맨 처음에 샤를을 어떻게 만났는지, 예림의 얼굴을 왜 훔쳤는지.

그리고 폰허브 이야기와 인식 저해.

영선 누나를 대상으로 원격으로 마력이 모이는지 실험한 이야기, 예림이의 얼굴로 폰허브 영상을 올린 것.

이 부분을 말하는 동안 가슴이 쿡쿡 찔렸지만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모두 털어놨다.

예림이가 그걸로 어떤 고생을 했는지도 말했고. 들키자 도망친 샤를 이야기도 했으며.

어제 성당 기사단의 아나이스 때문에 큰일날 뻔한 이야기까지­

설명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사과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미안해. 예림아. 정말로.

다 내 잘못이었어."

영선과 유다 누나는 예림이를 흘끔 바라봤다.

"저... 음. 뭐냐. 강민이가... 폰허브 올린 건, 너무했네..."

유다 누나가 필사적으로 날 변호한다.

"그래도... 강민이가 인식 저해도 걸었었고.

어제도 예림이 너 구하겠다고 나쁜 놈한테 달려들었다면서?

강민이도 많이 후회해서 그랬을 거야."

예림은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손은 자신의 옷을 이리저리 쥐어뜯는 중.

용서받을 수 있을까? 저 표정은 뭘 의미하는 거지? 긴장되서 손이 떨렸다.

"오빠...음..."

예림이 주저하며 말하려고 했다.

그 때, 문 밖에서 똑똑 소리가 들렸다.

"성당 기사단의 미카엘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성당 기사단? 우리 모두가 당황하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두운 갈색 머리카락. 가까이서 보니까 남자인지 여자인지 더 알 수가 없네.

그가 입을 열었다.

"마침 예림 씨도 계셨군요. 마침 모인 김에­ 강민 씨 처벌 관련으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하는데."

올 게 왔구나. 눈을 꽉 감았다.

그의 입에서 판결이 내려진다.

"강민 씨­"

하지만 누가 소리를 빽 질렀다.

"처벌은 무슨 처벌이에요!!"

누구 목소리지?

얼떨떨해 눈을 뜨자 소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예림이었다. 얼굴은 분노로 새빨갰다.

"제정신이예요? 오빠가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그렇지.

이렇게 다치기까지 했는데, 여기에 뭘 더 얹으려고 그래요!

됐어요! 필요 없어요!"

목소리가 째 질 정도로 소리쳤다.

내, 내 편을 들어 준다고­?

나는 죄책감과 고마움으로 예림이를 봤다.

미카엘이 당황한 얼굴로 덧붙였다.

"처벌은 없을 거라고 이야기드리려고 했습니다."

예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붉어졌다.

음,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구나.

그래도­ 예림이한테 용서받아서 다행이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내가 저지른 짓을 용서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다행이야­

온 몸에 힘이 쭉 빠져 침대에 늘어졌다.

근데. 성당기사단이 뭐라고 한 것 같은데?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요? 처벌이 없다고?"

"네. 강민 씨. 그렇게 됐습니다."

***

미카엘은 강민에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불길이 일었다.

천칭은 강민의 처벌을 요청하는 미카엘의 말에 묵묵부답이었다.

'신이시여. 대체 뭘 원하십니까?

우리가 악마를 용서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방금 예림이 강민을 용서한 것처럼?

미카엘의 머리에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흘렀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지금 천칭은 강민과 샤를의 용서를 바라는 듯 했다.

'어째서­ 악마를 용서해야 합니까.

악마도 당신의 피조물이라 이겁니까?'

천칭의 판결은 가끔 이해할 수 없게 내려온다.

옛날에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고, 욥의 가족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적도 있다.

마치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듯­

그리고 이번엔. 강민을. 악마를 용서하라고 말한다.

물론,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건 아니다.

이번에 아나이스는 선을 넘었다.

악마에 대한 분노로 사람들이 타 죽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둘 정도였으니.

그래서 아나이스는 벌을 받았다.

강민에게 5년간 봉사하라는 천칭의 말.

어떤 부탁이든 거절하지 못한다.

'그래­ 아나이스는 그런 벌을 받을만 하다고 쳐.

하지만­'

미카엘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악마를 어째서 용서해야 하는가?

이 사악한 자들을?'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사악한 짓을 저질렀던 악마들을 미카엘은 용서할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인면창이 쓰려온다. 그들에게 벌을 주고 싶었다.

'예림 씨가, 천칭에게 혹시 처벌을 부탁하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이들을 다시 가둘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미카엘은 예림을 살살 구슬렸다.

"예림 씨. 그래도. 혹시나. 억울하진 않습니까?

혹시라도­ 처벌을 바라신다면­"

하지만 예림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강민이 최근 삼일간 잠도 자지 않고 박지철에게 해를 입을까봐 걱정했을 때.

자신이 집 밖에 나갈 때, 주변을 살펴주던 까마귀 떼를 봤을 때.

강민이 연기로 가득찬 문 밖에서, 어서 나오라고 소리칠 때.

그리고 ­ 머리에 붕대를 감고 파리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걸 봤을 때.

강민을 용서하기로.

"됐어요. 괜찮아요.

성경에서 그러잖아요.

용서, 용서. 서로­ 용서하라."

예림이의 성경 지식은 어렸을 때 성경학교에 몇 번 다녀본 게 다였지만.

그래도 천성적으로 밝고. 낙천적인 그녀는 이제 한숨을 쉬고 털어낸다.

강민은 어제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었으니. 이 정도라면 용서해 줄 수 있었다.

머리를 흔들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도 밉긴 해요. 덕분에 엄청 고생했으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 앞이 아찔해지지만.

"그래도­

용서해주고 싶어요.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용서.

미카엘은 그녀가 용서라고 말하는 순간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창문 밖에서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이 예림의 얼굴에 드리운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로 그린 성녀같다.

햇살이 쪼개지고, 예림은 부드럽게 웃는다.

신의 계시가 내려오는 것 같은 장면이었다.

강민이 그녀에게 엄청난 폐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용서­ 용서.

서로 용서하라.

우리들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후우­"

미카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아픔을 겪은 예림이 강민을 용서했는데.

미카엘이 샤를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는 뭐가 있겠는가.

미카엘이 입을 열었다.

"강민 씨. 죄송합니다.

샤를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

***

미카엘은 한참 설명했다.

젠장. 그러니까... 그런 말 한 게 다 당신이라고?

짜증이 났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래서. 샤를이 지금 프랑스에 있다고요."

"네. 하지만 지금 돌아오는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저희 대주교께서도 샤를의 마력때문에 곤란해 하시고.

그리고... 예림씨가 샤를을 용서할 지..."

나는 흘끔 예림의 얼굴을 봤다.

나는 용서했지만 샤를은 용서해 주려나? 어떻게 하지?

"험하게 다루고 있진 않습니다. 개인실에 산책. 정원도 있고."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네.

하지만 아직도 샤를이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사라지진 않는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정확히는 예림이한테 사과시키고 싶다.

하지만 예림이가 사과를 받고 싶어할 진 모르겠네.

'일단. 예림이한테... 프랑스에 보내주겠다고 말해 볼까...?'

샤를을 용서해달라는 목적은 숨기고.

그냥 내가 돈 다 줘서 프랑스 한번 갔다오라고... 여행 겸...

부모님 다 나으면 한번 권유해 봐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간호사가 예림을 찾으러 왔다.

부모님이 찾으신다고.

"저, 이만 가볼게요."

예림이가 나가는 동안 미카엘도 따라 나갔다.

할 이야기가 더 있나 보다.

그래도­ 둘이 나가자 몸이 저절로 추욱 늘어졌다.

정말로 다 끝났다.

유다 누나는 '그래서 샤를이 약속을 못 지켰구나­' 하고 다행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미카엘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줬다고 하지만 기억조차 못 한다.

"으아. 어찌 됐든. 끝났네요."

"그러게..."

셋 모두­ 정말 긴 사흘을 보냈다.

"그래도... 박지철이란 놈 잡아서 다행이다.

강민아. 잘했어."

유다 누나는 혼자 우울해한다.

"나는 아무 도움도 못 된 것 같네..."

어허. 우울 그만!

괜찮다고 유다 누나를 달래고, 샤를을 어떻게 할 지 이야기를 나눈다.

예림이를 프랑스로 보내는 계획을 말하자 다들 괜찮은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리네!

그런데. 긴장이 풀리니까.

화장실이 가고 싶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근데­ 일어날 수가 없네. 어떻게 해야 하지?"

"잠깐만."

영선 누나가 얼굴을 붉히며 커튼을 친다.

그리고 가져오는 건... 물통형 소변기.

잠깐. 이거 뭐야.

"간호사 선생님이 일어나지 말랬잖아.

이거 쓰는 법 배웠거든.

그러니까... 바지 벗어."

아.

젠장.

이따위...

부끄러운 플레이라니...

씨...팔... 인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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