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가능충 주신 (3)
* * *
해벼가에 해일이 들이닥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고 그 무서움을 잘 아는 건 바다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과 바다 사나이들뿐이겠지.
그러나 지금 해일이 내륙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느껴진다. 현대의 빌딩마저 잡아삼킬 것만 같은 높이의 물의 벽이 거친 수류를 일으키며 이쪽을 향해 입을 벌리고 다가오는 모습이 주는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각 지역에서 손꼽히는 강자라 해도 저 해일의 폭력을 정면으로 얻어맞고도 멀쩡할 수는 없으리라.
"아니, 시바. 저게 왜 작은 해일이죠?"
맞으면 전신골절로도 부족한 초주검 상태가 되리라.
히잉. 본녀가 살아있을 때 봤던 것보다 크도다.
폐하께서 상대했던 녀석과 생김새는 비슷한데 더 강한 듯합니다.
선배의 혼잣말이 대답이 되었다.
아니, 그런데 진짜 물장구 좀 쳤다고 저런 해일이 오는 클라스는 뭐냐. 손바닥으로 바다를 가르는 기적을 보이는 모세나 대지에 손바닥을 남기는 여래신장을 펼치는 부처도 아니고.
저 자식은 분명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게 틀림없다.
나는 옆구리에 매여 있는 마조성검의 검파를 손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야. 네가 몸으로 받아내겠다며. 책임지겠다며?"
본녀는 아무것도 몰라.
"이런 무책임한 마조성검 같으니라고."
웅웅.
검신이 거칠게 떨리더니 마조성검이 항의한다.
본녀는 심연의 늪 속을 헤엄치고 싶을 뿐, 그러나 사신의 인도를 받는 건 사양이다!
즉, 즐기는 건 좋지만 죽는 건 싫다는 건가. 이런 자기 감정에만 솔직한 녀석 같으니라고.
해일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지만 별로 걱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저 해일을 막을 방법이 몇 개나 있으니까. 나만 해도 그렇지만 내 여자들도 결코 약한 이들이 아니며 그 실력은 대륙의 정상들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으며 오히려 앞서는 면도 있다.
"앨리스!"
"알고 있습니다!"
기어코 지난 시간 동안 더 성장해 오러의 극의에 올라 자신만의 깨달음까지 완성한 앨리스가 대검을 든다. 내가 선물한 발키리 아머가 아니라 황실에서 이번 사태에 한해 대여를 해준, 국보로 지정돼도 이상하지 않을 휘황찬란한 은빛갑주를 입은 그림에서나 나올 법한 여기사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핑크색 포니테일이 바다바람에 거칠게 흔들리면서도 꿋꿋하게 대검을 내려칠 자세를 준비하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에 몇몇 남정네들은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릴 정도였다.
저 여인이 내 여자라는 게 자랑스럽다.
'앨리스의 깨달음은…… 폐하랑 상당히 비슷하지.'
폐하의 깨달음은 태산압정과도 같은 기세로 상대방을 짓누르며 양단해 버리는 중검의 일격이다. 나도 정면에서 받아내면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위력적이기 짝이 없는 일격. 그리고 앨리스는 그런 친부의 깨달음을 뛰어넘었다.
예전에 엘라임이 중얼거렸던 말이 떠오른다.
'검성의 자질이랬나.'
앨리스의 양손대검이 느긋하게, 그러면서도 타인의 인지범위를 뛰어넘는 시간 속에서 허공을 내려긋는다.
─────서걱.
그리고 뭔가가 잘리는 소리. 그 결과를 모두가 육안으로 확인했다.
"세상에 바다가……."
"잘렸어…!"
세상을 가릴 것만 같던 해일이 반으로 쪼개져 좌우로 나뉘어진다. 마치 모세의 기적을 검으로 재현한 듯한 일격이 앨리스의 손에서 펼쳐졌다.
'앨리스도 참 대단해.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죽이려고 뛰기 전에 나는 것부터 생각한 꼴이니, 원.'
앨리스. 풀네임 엘리자베스 나이트킹덤이 얻은 깨달음은 좀 더 포괄적이었다. 왜냐하면자신보다 강한 상대방을 이길 수 없으니 그 상대방이 있는 세상을 통째로 베어 버리자, 라고 결론을 내며 얻은 깨달음이 바로 저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앨리스는 나도 어떻게 하면 벨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 세상을 베었다.
물론, 공간을 벤다거나 하는 무지막지한 건 아니다.
그저 '시야에 들어오는 세상을 베는 것'뿐이지.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딱 자기 공격력만큼 데미지를 주는 회피불가 광역기랄까. 방어력이 미친 듯이 높다면 견딜 수야 있다.
문제는 앨리스가 휘두르는 참격이 보통 위협적이란 게 아니란 거다. 아무리 해일이라고 해도 물이 격하게 움직일 뿐이지 방어력 자체가 높은 건 아니니 저 일격에 두 동강이 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후배. 이제부터 시작이다.
'알고 있다고, 선배.'
저 멀리 갈라진 해일 사이로 붉은 눈빛의 길다란 해양 생물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의를 내뿜으며 그와 동시에 전신이 저릿해질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발산하는 녀석이 분명 대형괴수 레비아탄이리라. 아니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되기에 제발 저 녀석이 레비아탄이기를 빌자.
적의를 내뿜는 주제에 로봇처럼 무기질에 가까운 붉은 눈에 번들거리는 푸른 비늘로 감싸여 있는 뱀 같은 외형이면서도 동시에 머리에는 하나의 뿔이 우뚝 솟아있었다.
저 뿔!
그때 아르미사엘이 외쳤다.
저 뿔을 노리거라, 계약자여! 저것이 대형괴수에게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이노라. 저게 부러진다면 그 힘이 반 이하로 줄어든다! 단, 본녀의 후손이 날리는 일격보다 두 배는 강해야 한다.
앨리스의 평타보다 두 배 이상의 공격력을 때려 박아야 한다라.
"좋은 설명에 고맙긴 한데 어떻게 저 바다 위로 가서 녀석의 뿔을 부러뜨리자는 건데? 배 타고 나갔다간 얼마 안 있어서 침몰당할걸."
그럴 때를 위해 성검(??)이 있는 것이다.
"오호. 그렇구만."
그런 것이었나. 이 엑스칼리버는 바람과 뇌전을 다루는 능력이 있다. 이 검으로 오러를 일으키면 내 화 속성의 오러 만이 아니라 뇌 속성이나 풍 속성의 오러 또한 다룰 수 있게 된다. 화 속성의 오러라면 바다를 건너며 무시무시한 물줄기를 일으키는 레비아탄의 뿔을 부러뜨리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상성이 좋은 뇌 속성 오러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
다행이게도 아르잔느가 격세유전의 힘으로 뇌 속성의 신성력을 다루는 성기사라 그녀에게서 뇌 속성 기운을 다루는 요령을 배웠기에 풍 속성이라면 몰라도 뇌 속성이라면 어느 정도 제어는 잘 했다.
그럼 성화(?火)무형검이 아닌 성뢰(?)무형검이 되는 걸까.
후배. 딱 보니까 예전에 엑스칼리버를 통해 완성했던 성뢰무형검을 만들려는 생각이지? 그건 포기하는 게 좋아.
"어째서?"
폐하께서도 그러셨지만 뇌 속성으로 공격을 날리는 순간 무섭게 심해 속으로 잠수해 버리거든.
"그러면 쟨 공격 어떻게 하는데?"
입으로 물대포를 쏴. 워터제트 수준이라 강철도 잘리는 데 쉬지 않고 쏴서 상당히 위협적이지. 다음 대 궁정마법사가 될 예정이었던 내 제자가 그걸 맞고 죽어 버렸지.
선배의 입에서 회한이 가득한 설명이 나온다. 제자가 눈앞에서 죽는 걸 본 것 같은데 그러면 슬플 법도 하지. 그렇기에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요청하기도 애매했다. 그런 부탁은 선배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만 할 뿐이니까.
그나저나 입에서 물이 나온다라. 곰곰히 생각한 난 이것만큼은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질문했다.
"그거…침 아냐?"
…….
"……."
아마…… 그러지 않을까?
갑자기 성뢰무형검을 날려 녀석이 뿔을 노리기가 엄청 꺼려진다.
"선배. 혹시 강력한 마법 없어? 저 녀석한테도 먹힐 정도로 강력한 거."
있긴 한데 하나같이 시간이 걸리는 거라 준비하는 사이에 잠수해 버릴걸.
젠장. 그럼 선배의 마법 실력을 믿는다는 계획은 폐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레비아탄을 응시한다. 어떻게 저 자식을 조져야 잘 조졌다고 소문이 날까.
커흠.
도대체 어떻게 하면….
코흠코흠.
저 자식을 약올릴 수 있는 거지.
본녀를 무시하지 말 거라! 본녀 삐질 꼬야!
"……."
'난 얘를 알다가도 모르겠어.'
아마 평생 모르겠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내가 미안했어. 확실하게 도움이 되는 얘기라면 다음에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줄 테니까 말해 봐."
그때 궁정마법사는 중간에 잠깐 기절해서 모르겠지만 본녀가 뿔을 부러뜨린 방법이 따로 있도다.
그러고 보니 선배의 제자가 죽었다고 했었지. 그걸 고려해서인지 아르미사엘이 내게만 들리도록 텔레파시를 보내며 말해왔다. 선배의 페이지가 촤락촤락 펄럭이며 의아해하는 기색이 느껴지는 게 지금 대화를 못 들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도 일부러 전음까지 써 가며 아르미사엘에게만 그 방법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아르미사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진짜로 그게 방법이라고?"
그렇도다! 본녀가 설마 이런 일에 농담을 하겠느냐? 자자! 어서 하거라!
심히 망설여지는, 레비아탄의 침뱉기에 당하기 싫은 것과 맞먹는 그 방법에 꺼리는 기색을 내비치자 아르미사엘이 다그쳤다.
어허! 어서 하래도. 저것 보거라. 저 심해의 뱀장어가 다시 물장구를 칠 준비를 하고 있잖느냐. 또 해일을 당할 셈이더냐? 그럴수록 본녀의 후손만 고생할 뿐이니라!
"하아아아."
오러를 사용하는 전사에게 있어 깨달음으로 터득한 기술을 남발하는 건 연비가 별로 좋지 않았다. 내 무형검이 특히 나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앨리스의 깨달음이 사방팔방 날리거나 계속 사용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기술은 아니었으니.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는 이 현실에 한숨이 절로 터져나온다.
'빌어먹을 주신.'
속으로 주신을 까내리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비장의 수단 중 하나를 사용할 테니까, ────모두 비켜요!"
내 외침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정예군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쩍 갈라지며 내 앞에 길을 튼다. 성자이자 가장 먼저 계시를 받은 영웅에게 보내는 모두의 기대 속에서,
어깨가 무거워질 정도로 부담감을 받으며 성검(??)을 양손으로 쥐고 상단 자세를 취했다.
"에, 엑스…………."
좀 더 크게 말하거라! 배에 힘 딱 주고! 방금 외쳤던 것처럼 사자후를 터뜨릴 기세로 외치란 말이다!
……빌어먹을.
이딴 사용법을 만든 주신을 만나게 된다면 꼭 다지고 말 테다. 물장구를 치려는 레비아탄의 모습을 보고 간신히 결심을 굳히고 외쳤다.
"엑스─────!"
[EX─────!]
그래도 아르미사엘의 주장이 거짓은 아니었다는 걸까.
마력을 미친 듯이 잡아먹으면서도 쥐고 있는 성검에 막대한 기운이 집약되는 게 느껴졌다. 가히 성화무형검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위력.
성검을 중심으로 거친 바람이 소형 태풍을 일으키며 그와 함께 뇌전이 휘몰아친다. 휘황찬란한 빛이 발광하는 그 모습은 가히 성검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위용을 두르고 있었다.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눈을 질끔 감은 채 검을 내리긋는다.
"─────칼리버!"
[─────calibur!]
성검을 내리치자 무슨 레일건 마냥 칼빔이 쏘아지며 레비아탄에게 쏘아진다.
'시발……. 존나 쪽팔려!'
하지만 내 손발이 오징어처럼 쭈글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