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17)
* * *
결국 에고 그리모어 본명 '카사노바'라는 이름의 고위요정이었던 마도서를 골랐다. 섹스로 생겨난 정기를 주입하면 딱히 마력도 필요 없다고 했으며 평소에는 잠들어 있겠다고 했다.
깨우고 싶으면 책을 펼치라던가. 그렇게 마도서 카사노바를 고른 후에 황실비고를 나오자 렉스 경이 다시 날 안내해주었다.
다시 정원으로 돌아오고 기다리고 있던 장인어른과 앨리스가 날 반겨주었다. 이제 앨리스와 데이트를 할 수 있나 싶었더니 대뜸 장인어른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드래곤 하트를 먹어라."
"네? 지금 당장 말인가요?"
"그래. 한시라도 빨리 네 놈이 그 귀찮은 걸 먹어치워야 나중에 귀족 놈들이 덜 귀찮게 할 거 아니냐. 그리고……."
장인어른께서 날 못마땅하게 쳐다보셨다.
"이번 본 드래곤과 전투에서 아군을 위해 무리하느라 좀 위험했다고 들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더 강해야 내 딸 근심이 줄어들겠지. 그러니까 어서 먹어라."
"……아버지.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창피합니다."
팔볼출, 딸바보인 장인어른이 부끄러운지 앨리스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당당하게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자식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으리라.
그나저나 폐하께서는 날 사위로 확실하게 받아들이시자마자 화끈하게 밀어주시는 듯했다. 안 그러면 그 귀한 드래곤 하트를 내게 선뜻 넘기시겠는가.
사위로서 큰 선물을 냠냠 받는 것 또한 효도의 일종이었기에 나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폐하. 그런데 드래곤 하트는 어디 있는 거죠?"
"네 눈앞에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다."
"?"
내 앞에 놓여 있던 의문의 상자. 그 상자 안에 드래곤 하트가 있다는 말에 내 고개가 피사의 사탑처럼 자연스럽게 기울어졌다.
분명 드래곤 하트를 아비 누나의 능력(물리)으로 뽑았을 당시에는 그 크기가 나보다 큰 누나가 양팔로 감싸 안아야 할 정도로 커다랬다. 그런데 눈 앞에 있는 작은 상자는 고작 사과 하나를 담았을 법한 크기였기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싶었지만 장인어른께서 이런 걸로 날 놀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셨을 리는 없다 생각해 상자를 깠다.
안에 있는 건 무슨 보옥처럼 정 원형을 취하고 있는 푸른 빛이 감도는 구체였다.
"드래곤 하트는 궁정마법사가 섭취할 수 있도록 영약처럼 가공했다. 본 드래곤의 핵으로 쓰일 수 있도록 개조하느라 사념이 가득 담겨 있어서 그냥 먹으면 탈이 날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가공하다 보니 크기가 이렇게 줄어들었다. 그래도 원래 성능보다 2%만 저하됐다고 하니 아쉬워하지 마라."
"폐하께서 주시는 선물을 아쉬워하는 이는 이 제국에 없을 겁니다. 심지어 드래곤 하트인 걸요."
"말은 번드르르 하구나. 금칠을 해봤자 식상할 뿐이니 어서 먹어라. 호위는 렉스 경이 해줄 것이다."
"저도 할 겁니다, 아버지."
앨리스가 날 보호해주겠다고 걸크러쉬한 모습을 보여주니까 예전처럼 '스승님!'하고 외칠 뻔했다. 앨리스가 나보다 연상이기는 하지만 눈나보다는 스승님이야. 눈나는 이미 아비 누나의 부동석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보다 드래곤 하트 즈음 되는 영약이면 먹고 그 기운을 소화시키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것이다.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데 그걸 하겠나고 나서니 장인어른의 표정이 일그러지시고는 날 노려보신다. 괜히 나 때문에 자기 딸이 고생하게 됐다는 듯이 말이다.
저러다 결혼해도 놓아줄 수 없다면서 나까지 부부 세트로 황궁에 붙들어 놓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기를 빈다.
우리는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중앙에 앉은 내가 가부좌를 틀고 자세를 잡은 다음에 렉스 경과 앨리스가 내 양옆에 호위로 선다.
스윽.
"…폐하?"
"그냥 해라. 내 딸이 호위를 선다는 데 아비가 되어서 빠질 수 없는 노릇이지."
"……."
본의치 않게 나는 제국의 주인이자 만인의 태양이라는 황제폐하의 호위를 받으며 드래곤 하트라는 지고의 영약을 먹는 호사를 누리게 됐다. 그런데 이런 호사 누리고 싶지 않았어.예쁜 누님들로 이뤄진 호위라면 모를까, 땀 내 나는 중년 아저씨들의 호위를 받아봤자 전혀 기쁘지 않았다.
진짜 승진을 위해 인맥을 바라는 기사나 귀족이라면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게 귀찮단 말이다.
어쨌든… 여자친구, 장인어른, 황실 기사단장이 내 호위를 해준다는 데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기에 냉큼 드래곤 하트를 먹었다. 당장 습득하고 있는 심법을 몇 개나 운용하며 삼킨 드래곤 하트에 맞는 운용법을 모색한다. 아프기 전에 빨리 흡수하고 싶었으니까.
드래곤 하트의 마력은 이 세계에서 최고의 영약이라 칭송할 수준이었고 당연히 내포한 마력은 댐으로 막을 수 없는 범람하는 강과 같은 기세를 지녔다.
아무리 내 육체라도 이미 성장의 한계치에 거의 도달한 전성기의 상태였기에 드래곤 하트를 효율적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심법을 여럿 비교해가며 맞는 걸 찾아야 했다.
그렇게 비교하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 그런데 이거….'
웅웅웅.
'왜 이렇게 잘 흡수돼……?'
식도를 넘는 순간 산화해 심장에 자리하기 시작한 드래곤 하트의 마력.
심지어 여분의 마력이 전신으로 퍼지면서 신체 곳곳에 잘 스며들기 시작한다. 심법을 운용하기도 전에 '어, 어……?' 하는 사이에 알아서 스며든다. 마치 애당초 이게 내 육신과 잘 맞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화르르륵.
전신에서 불길이 치솟는다. 평소에 신성력과 섞어 사용하던 성화가 아니다. 내 불꽃은 [화기]라는 스킬로 이루어져 단순한 불꽃이다. 어느 속성도 담기지 않은 불꽃이기에 [성흔]의 신성력과 잘 섞였던 거고 그래서 성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거다. 즉, [화기]라는 스킬 자체가 불꽃이면서도 동시에 반대되지만 않고 비슷한 기운이라면 얼마든지 섞어서 발화시킬 수 있는 '그릇' 같은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소리다.
'스킬 자체가……그릇인 거였나.'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드래곤 하트는 본래 레드 드래곤의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신의 사도이자 중간계의 수호자이지만 어느 사정으로 인해 모습을 감춘 종족이지만레드 드래곤이라면 불꽃 계통의 성질 사나운 드래곤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 마력은 [극양지체]로 불꽃이 잘 통하는 육체를 지녔으며 딱 맞은 [화기]라는 그릇의 스킬을 자기 집으로 알고 들어갔다는 거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물리적으로 간파하는 화안금정이 아니라 [심안]을 발동시켜 내부를 살핀다.
드래곤의 마력이, 아니 아예 내 심장이 드래곤 하트에 가까워지며 용량의 한계가 늘어나고 마력이 압축되어 더욱 정순해지고 많아진다. 이것만 해도 전보다 20%는 더 강해진 듯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마력은 내 전신에 고루고루 퍼졌다. 그 마력에 반응한 내 육체가 크게 변화하지 않는 선에서 변질을 시작한다.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최강의 갑옷이 내 전신에 깃드는 셈이다. 육신이 종의 한계를 벗어나 더욱 튼튼해지는 것이다. 이쪽의 변화에 오히려 긴장한 앨리스의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고 침을 삼키며 울렁이는 목울대, 그리고 드레스 안에 보이는 속옷 대신인 발키리 아머까지 세세한 것들이 화안금정 없이도 오감만으로 감지된다.
육감이 열려 [직감]이 더욱 상승한 게 느껴지며 동시에 마력의 본질을 깨달아 [언령]이란 게 뭔지 깨닫는다.
언령이란 마나 그 자체를 지배하는 힘이다.
언령이란 마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권능인 셈이다.
언령이란 신에 오를 권한을 쥐었다는 소리와 같다.
즉, 언령을 얻은 나는 반신(半?)이 되어 종을 초월했다……라는 전개면 좋겠지만.
'반신이 되기 직전인 건가.'
반신의 격에 오르지는 못했다. 본능적으로 지금의 내가 그 경지에 오르면 안 된다는 걸 인지하고는 스스로 거부했다. 설마 반신이 되면 우화등선이라도 해서 신이 산다는 세계로 올라가는 거려나.
그런 거라면 사양할 만했다. 아직 연인들이랑 하지 못한 데이트도 많고 결혼도 못 했으며 애도 못 낳았다. 현계에 미련이 가득 있는 데 우화등선 같은 것 따위를 할까 보냐.
혹여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닐까 전신을 꼼꼼하게 체크해 보니 마력이 전신에 잘 스며들었을 뿐이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내가 체크 못한 문제가 나중에 재발생된다는 그런 전개만은 아니면 좋겠네.
천천히 눈을 뜨자 호위를 서주던 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세 사람은 날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레온, 괜찮습니까?"
"응. 나는 괜찮아. 오히려 종의 한계를 초월한 듯해. 벽을 넘고 한 층 더 성장한 것 같거든."
"……."
"응?"
벽을 넘어섰다는 데 모두의 반응이 어정쩡했다.
아니, 벽을 넘어섰다는 건 실력이 한 층 진화했다는 뜻이며 기사인 세 사람은 당연히 기뻐하며 반겨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셋의 얼굴이 이걸 뭐라 말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힌다는 표정이다.
배가 아파서 화장실에 급히 들어가 똥을 누려는 데 똥이 안 나와서 당황하는 얼굴?
"아니, 세 분 표정이 왜 그러세요?"
"저기, 레온. 놀라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지금 이게 당신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여자라는 걸까. 앨리스가 착용한 영애나 입을 법한 드레스의 주머니에서 손거울이 나왔다. 아기자기한 게 귀여운 걸 좋아하는 앨리스답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앨리스가 날 비춘 손거울에서 나타났다. 알몸이긴 했는 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한 쌍의 굽은 뿔.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날개와 꼬리, 그리고 비늘이 나름 급소인 관절이나 명치를 뒤덮고 있었다.
"……이기 머꼬?"
그래. 나는 용인(드래고니안)이 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