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16)
* * *
저거다. 보는 순간 정수리에 번개가 친 것처럼 찌르르한 감각과 드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는 그게 외형만 보면 서책이라는 건데 딱 봐도 마법사가 쓸 법한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걸 마법에 관련된 스킬이 없다시피 한 내가 사용해도 되는 걸까? 일단 화안금정으로 꿰뚫어 보니 딱히 나랑 마력의 충돌이 일어날 기미는커녕 되려 잘 융화되어 쓰일 법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검사인 내가 저걸 고르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다고 내 연인 중에 마법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 계륵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 같은데 갖기에는 애매하고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보물이었다.
일단 좀 더 살펴보고 결정을 내리고자 그 서책을 집은 순간이었다.
오오오오! 형제여!
……이건 또 뭐여. 염병할.
◇◇◇
놀랍게도 내가 집은 건 에고 그리모어였다. 마도서인 그리모어에 자아가 딸려 에고 그리모어, 즉 AI 마도서라고나 할까.
에고 그리모어는 자신이 옛날 궁정마법사 취직해 일하던 어느 고위요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게 말이냐, 방구냐 싶었지만 근본 없는 야겜인데 무슨 일이든 벌어져도 그리 놀랍지는 않겠지.
이 몸은 고위요정이었다고? 비록 방계긴 하지만 요정왕국 이그드라실의 방계인 데다가 마법 실력이 뛰어나 제국의 궁정마법사를 했었지. 엣헴!
근데 야겜 세계면서 왜 에고 그리모어의 인격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인데.
"네가 고위요정이었다고? 그냥 에고가 심어진 마도서(그리모어)가 아니라?"
그렇다니까!
마치 발이 있었다면 콩콩 구르며 따졌을 듯한 외침이었다.
"그런 녀석이 왜 에고 그리모어가 되어 있는 건데?"
나는 죽는 게 싫었다. 솔직히 고위요정은 일반 요정이랑 다르게 절륜하다는 속사정이 있거든. 애당초 나는 요정만이 아니라 여러 종족의 아리따운 미녀들과 섹스를 하는 게 좋아서 제국의 궁정마법사가 된 거라고!
"……."
섹스에 미친놈인가. 고위요정이 세계수의 과실을 먹어서 절륜해진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성욕이 늘어나 남성 중에서 이런 녀석이 나온 모양이다.
하긴, 티타니아가 워낙 특이한 경우긴 해도 다른 과부 요정들도 좆맛이 그리워서 성노예를 자처한다는 데 이런 녀석이 있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그런데 책쪼가리가 되면 섹스도 못하는데 무슨 한이 남는다고 죽기 싫다는 이유로 그곳에 들어간 거야?"
으흐흐흐.
갑자기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녀석. 그냥 태워버릴까 진지하게 고민이 들었다.
나는 무리한 시도를 하다가 거시기를 잃었었지. 그래서 마음의 병이 들어 빠르게 늙었다. 다만, 죽은 이후로도 섹스의 쾌락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에 이 몸이 된 걸세! 주인이 된 이의 오감을 통해 받은 감각의 사념 찌꺼기를 흡수하지. 그걸로 나는 섹스를 간접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미친 새끼 아냐, 이거?"
진짜로 태워버릴까. 내 여자들의 속살 맛을 지가 왜 간접적으로 체험하겠다는 건데.
불꽃 속성의 오러를 일으켜 태워버리려고 하는 데 그 살의을 눈치깐 건지 녀석이 서둘러 날 만류했다.
잠깐잠깐잠까아아안─────?! 나 에고 그리모어라고! 마법 재능 없어도 마법 쓸 수 있게 도와준다니까?! 게다가 말이 간접체험이지 몽정을 꿀 뿐이라고!
"몽정이라고?"
그래! 너도 사내면 몽정을 한 적이 있겠지? 꿈은 분명 좋았는데 깨고 나니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 그런 거. 그런 거다! 간접체험을 해서 기분은 좋지만 나도 그게 어떤 건지 기억을 못한다고! 그렇게라도 섹스의 맛을 보면서 평생 살고 싶었을 뿐이란 말이다!
이런 섹무새 새끼를 봤나. 이 새끼 두뇌는 분명 좆대가리에 달려 있던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비참하면서도 기억도 제대로 못하는 쾌감을 느끼겠다고 죽기 직전에 에고가 된다는 미친 짓은 벌이지 않겠지.
'그런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천천히 녀석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응? 이, 이봐. 뭐하는 거냐?
"잘 있어. 나는 내 여자랑 나눈 쾌감을 공유하는 NTR은 딱히 없어서 말이야. 내가 나중에 폐하께 말씀 드려서 불쏘시개로 써줄게."
잠깐잠깐잠까아아안─────?! 그럼 타협하자!
불쏘시개가 되어 잿가루가 된다는 엔딩은 싫은 걸까. 하긴, 나라도 싫기는 하겠다. 에고 그리모어의 목소리를 들으면 당황하며 팔다리를 붕붕 휘두를 것만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 쓸모는 아주 많다고? 그러니 불쏘시개는 사양이야! 그러니까 에너지 드레인으로 타협하자!
한때 궁정마법사였던 에고 그리모어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유용함을 설파했다. 섹스를 통해 생성되는 사념을 흡수하는 게 아니라 절정할 때의 여운을 나누자는 것이다.
섹스를 통한 사념의 흡수는 간접경험으로 박았던 쾌감을 몽정으로 꾸는 거고, 절정의 여운이 남기는 사념을 흡수하는 건 그 기운을 매개로 녀석이 생전에 섹스하며 느꼈던 감각을 재현시키는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NTR을 당하는 기분은 안 들겠네.
그나저나 정말로 유용한 것 같기는 한데 말하는 거나 타협하는 조건을 보면 이 새끼는 섹무새가 맞는 듯했다. 어쩌다 요정 중에 이런 새끼가 태어난 거람.
그래서 일단 가질 만한 메리트가 뭔지 알기 위해 나는 녀석에게 신입사원을 면접 보는 심사위원처럼 물어보았다.
"그래서 너, 좋은 아티팩트냐? 할 줄 아는 게 뭐야?"
물론이다! 궁정마법사였던 이 몸이 스스로의 정신을 이곳에 넣은 만큼 뛰어난 기능이 많지. 일단 내가 생전에 쓴 마법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따로 추가하거나 수정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이 그리모어에 내가 각인시켰던 마법은 전부 쓸 수 있지.
"오호."
그건 제법 끌렸다. 궁정마법사가 사용했던 마법을 전부 쓸 수 있다는 건 아주 여러모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어린애가 총이 있으면 어른도 이길 수 있듯이 나는 마법의 '마'자도 모르던 애송이에서 궁정마법사급의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법'이라. 무공, 초능력, 판타지 계열의 스킬을 습득했지만 마법 계열은 머리 아파서 습득하지 않았기에 때려치웠는데 그걸 이렇게 습득할 기회가 찾아오니 감희가 새롭다.
미래에 무공 이상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마법을 사용한다 생각하니 다양한 플레이도 할 수 있겠지.
그때는 저 마도서를 어디 가방에 쑤셔 넣고 훔쳐보지 못하게 막은 다음에 사용해야겠지만 말이다. 안 되면 말고.
"그런데 그렇게 유용한 녀석이었다면 그냥 대충 주인 정하고 돌아다니면서 이 주인, 저 주인 고르며 간접경험이나 만끽하면 되는 거 아니야?"
미안하지만 내 자아가 각성하기 위해서는 자지의 길이가 20cm 이상이어야만 최소한의 주인 인정이 이뤄지거든. 그런 의미에서 너는 체형은 소년이면서 좆대가리는 거근이란 거지! 거근쇼타라! 어감이 좋구만! 연상의 누님들을 꼬시자고!
"아니, 그런 개변태 같은 조건을 왜 걸어놓은 거야?"
내 자지가 20cm였거든.
오우. 요정은 거시기가 작다는 데 이 궁정마법사라는 녀석은 제법 컸던 모양이다. 하긴 일반적이지 않은 존재라면 요정임에도 거시기가 클 수도 있지 뭐.
그래도 혹시 뭔가 비결이 있나 싶어 물어봤다.
"그런데 고위요정이라도 세계수의 과실을 먹으면 절륜해질 뿐이지 크기는 안 바뀐다고 알고 있어. 넌 왜 그렇게 컸냐?"
오호? 지인 중에 고위요정이 있나 보구만. 세계수의 과실을 독점하기 위해 일반 요정이나 외부에는 비밀로 하고 있는 데 말이지.
그 고위요정이 내 성노예야. 이렇게 말하면 같은 고위요정으로서 발끈하려나.
이건 나만의 비결이지만 세계수의 과실을 고위요정의 모유와 5 : 5 비율로 섞어서 혼합시킨 다음에 몇 가지 약초를 넣어 먹으면 자지의 크기가 커진다고! 무려 5cm나 말일세! 그리고 나는 큰 공을 세워서 세계수의 과실을 두 개나 먹었지!
……아무래도 이 녀석을 골라서 황실비고를 나가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혹하는 내 심정을 남자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책종이를 펄럭이며 녀석이 악마의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후후후. 이제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았는가? 그러니 조건부라도 좋으니 날 데리고 여기서 나가줘! 이곳에서 몇백 년 동안 혼자서 자아 딸딸이나 치는 건 너무 끔찍했단 말일세!
"조건이 있어. 내가 NTR… 불쾌하게 느낄 법한 행위를 하거나 멋대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하지 말고 전적으로 내게 협력한다고 약속하면 못 데리고 나갈 것도 없지."
물론일세! 나는 그저 섹스의 쾌락만이 낙이니까. 그런데 그대가 인간을 안으면 내가 인간을 안았던 경험, 요정을 안으면 요정을 안았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네. 혹시 자네, 여자들이 많나? 20cm 이상의 대물에 그런 곱상한 미모와 체구라면 여자가 많을 것 같은데.
"그 정도는 상관없겠지. 내 연인은 수인, 인간, 요정, 정령이다."
응?……정령?
에고 그리모어에서 경악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아니, 표정도 없는 데 책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사내의 끈적끈적하고 질척한 추잡스러운 감정이 말이다. 이 새끼, 역시 생전에 존나 변태였을 게 틀림없어.
그런 에고 그리모어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저기…… 계약자? 혹시 사귀는 정령이 누구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야. 왜?"
자네, 혹시 섹스하다가 계란후라이 두 개랑 소시지 하나가 만들어질 뻔하지 않았나?
"……야. 혹시 너도 정령왕이랑?"
응. 나도…….
여기 정령왕과 교접하려던 선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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