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착정마(馬)왕 성기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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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도착한 나는 정말로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화안금정을 통해 벽 너머로 본 장면은 본 드래곤의 꼬리치기를 누나가 부족한 프로텍트로 막으려 하지만 실패할 게 뻔히 보일 정도로 신성력이 프로텍트를 구성하는 데 부족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미친 듯이 달려 기술이고 뭐고 냅다 본 드래곤을 들이 박는 걸로 간신히 아비 누나를 지킬 수 있었다.
이왕이면 꼬리 자체를 잘라버리고 싶었지만 거기서 꼬리를 자를 칼질을 한 번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으니까.
그래서 걍 몸을 던진 건데 다행히도 아비 누나는 그로 인해 꼬리에 맞지 않을 수 있었다.
"누나! 괜찮아요? 어디 다치지 않은 거죠?"
넘어진 녀석을 무시한 나는 아비 누나에게 후다닥 다가가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천만다행이게도 다친 곳은 없지만 죽을 뻔했다는 현실에 심적으로 무리했을까 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비 누나는 잠시 날 멍하니 보다가 이게 꿈인지 생신지 구별을 못하겠다는 얼굴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 응. 난 괜찮아, 레온."
"후우. 다행이네요. 그럼 여기서 쉬고 있어요. 이게 다 뭐예요."
천이 찢어져 속살이 비치는 부분을 속상하다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왜 다쳤냐고 힐책하는 시선을 보내니 아비 누나가 어쩔 줄 몰라 한다.
"아니…이건, 그게……."
"후우. 변명은 나중에 들을게요. 그보다 누나를 다치게 한 새끼를 확실하게 조져야 하니까요."
"으, 응.……미안."
아비 누나가 면몫이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평소에는 쫑긋 서던 두 귀가 접히고 아홉 개의 활기 차던 꼬리마저 축 쳐진 걸 보니 그녀가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는 기 명확했다.
나라는 연인을 두고 죽을 뻔한 위기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리라. 내가 반한 아비 누나는 그 누구보다도 성녀라는 이름의 체질에 걸맞는 소유자이기에 내게 미안해 하는 거다. 그녀가 내게 사과하는 걸 보면 그녀를 질책하는 것보다는 저 사골국으로 끓여 먹기도 아까운 용가리를 노려보았다.
저 놈 때문에 아비 누나는 죽을 뻔했고 나는 소중한 연인을 허무하게 잃을 뻔했다.
그 사실이 참기 힘들 정도로 짜증이 났다.
"이보시오, 공자. 그 녀석은 그리 쉬운 상대가 아니오. 다 함께 협력해서 죽여야"
뭐라 떠드는 렉스 경의 발언에 나는 잠깐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봤다. 시선을 마주한 그가 움찔하더니 말이 끊겼다.
이런, 다 못들었는데.
"뭐라고 하셨죠?"
"……아무것도 아니오."
뭔가를 말하려 했던 듯한 기사단장이 생각보다 쉽게 물러섰다. 조금 의아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더 이상 내가 저 용가리를 죽이는 걸 방해할 이는 없을 거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녀석에 대한 방비도 어느 정도 꼼수에 가깝게 세워놨다. 화안금정으로 꿰뚫어 보니 녀석이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고 목적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나마 아직 제어불가능인 지금 깨워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아가 흑마법에 쩔어져서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만 하는 데 자아도 망가졌고 세뇌도 실패해 그리 뛰어난 기량을 보일 수는 없는 상태였다. 아마 자아가 멀쩡했거나 조종을 받는 상황이었다면 지금 이곳에 살아남은 이들은 한 자릿수 안이었을 거라고 확신이 들었다. 그 소수 안에 있는 건 전선에서 싸우는 아비 누나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고 그리 생각하니 또 열이 뻗치려고 하기에 나는 성화무형검을 일으켰다.
이런 말을 하기 뭐하지만 여기서 저 녀석을 상대로 [성흔]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너무 강하니까.
그러니 아예 쓰러뜨릴 거라면 '전력'을 다 해서 확실하게 쓰러뜨린다.
"이프리트."
응? 불러줬구나, 계약……. 저건 또 뭐람.
일일이 말로 설명할 겨를이 없었기에 이곳에서의 기억을 공유하는 걸로 이프리트에게 내 뜻을 전달한다. 내 기억을 공유한 이프리트가 눈쌀을 찌푸리며 본 드래곤을 노려보더니 이내 근심이 가득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계약자. 괜찮아?
"고마워, 이프리트. 하지만 지금은 저 녀석을 처리하는 데 집중해 줘. 그만큼 화가 나서 참기 힘들거든."
응. 나는 네가 마음을 앓는 걸 원치 않으니까. 내가 저 녀석을 처리하는 걸 도와줄게!
이프리트가 내 감정까지 공유하며 날 최대한 보조하기 위해 성화를 제어하기 시작한다. 그래. 내 오러가 극의에 도달했다지만 불 그 자체의 기원이나 다름없는 불의 정령왕의 불 제어보다는 불꽃을 못 다룰 수밖에 없다. 내가 무형검, 순전히 오러에만 집중하고 신성력이 섞인 불꽃을 이프리트가 제어한다.
내 오른손등에서 빛을 내뿜는 성흔의 찬란한 휘광에 추기경이 숨을 고르는 것도 잊고 외친다.
"성흔!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니!"
추기경의 발언에 주변에서 웅성거렸지만 무시하고 나는 본 드래곤을 향해 달렸다. 맛탱이가 갔어도 내가 가장 위협적인 존재라는 걸 본능으로 직감한 건지 녀석은 폐도 없는 게 포효를 터뜨리며 날 향해 강철도 부술 것만 같은 손아귀를 뻗었다. 저 손톱에 닿으면 젖은 종이처럼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 손아귀를 향해 더욱 가속했다. 주변에서 비명성이 들려오는 듯 했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이런 게 아니다.
바람을 찢으며 치고 들어오는 손톱에 체구가 작다는 점을 이용해 그 틈새로 주저하지 않고 돌진해 빠져나간다. 아무리 빠르더라도 본능만 남은 본 드래곤은 손가락 틈새를 빠져나온 내게 바로 연이어 공격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건지 자신의 팔을 타고 달리는 날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게 어깨가지 타고 달리자 녀석은 노렸다는 듯 고개를 홱 꺾어 내게 입을 쩍 벌렸다. 물어 죽이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렇게는 안 돼!
때마침 이프리트가 양손을 뻗더니 본 드래곤의 안면에 강력하지만 축소된 화염폭발이 일어난다. 난데없이 정령왕의 기술에 얻어 맞은 충격으로 본 드래곤의 고개가 다시 반대로 꺾인다.
떠엉!
파트너에게 감사를 전하며 녀석의 대갈빡에 왼손으로 발경을 때려박자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지하광장에 퍼진다. 겉이 아닌 내부에 직접 타격을 주는 공격은 본 드래곤의 내부에 직접 신성력을 주입해 진탕시키자 녀석이 부르르 떤다. 경직에 빠진 사이에 최대한 데미지를 입힌다. 한 번의 칼질로 생기는 선이 하나가 되고, 둘이 되고, 그렇게 빠르게 늘어나며 순식간에 하나의 원형을 그릴 정도로 많은 참격이 새하얀 태양을 만든다.
내가 눈앞의 본 드래곤을 상대로 대비한 방법은 그리 효율적이진 않았다.
원래는 내성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발경의 묘리로 신성력을 때려박아 조진다는 계획이었는데 미스릴까지 본 드래곤에 적절한 비율로 섞어 내구성이 크게 올라간 바람에 발경으로 쓰러뜨리려면 시간이 장난 아니게 걸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발경은 원래 적은 힘을 주입해 내부를 진탕시켜 적을 쓰러뜨리는 효율적인 기술이라 내구성 자체가 전체적으로 높은 적에게는 크게 효용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생각한 건 단순했다. 이프티르에게 성화를 맡기고 나는 오러만 담당해서 성화무형검을 무식하게 강화한 채로 물량과 질량 전부 이쪽이 우세해진 때에 그냥 찍어누르는 것.
다만, 이 방법은 본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해도 내 막대한 신성력 배터리와 마력통을 바닥까지 드러낼 기세로 소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아니면 이 녀석을 쓰러뜨릴 방법이 발경밖에 없는 데 그랬다간 피해자가 여기서 더 늘게 될 거다. 그 방법을 취한다면 아비 누나는 또 크게 슬퍼하겠지.
"크롸라라라라────!!"
본 드래곤이 더해지는 고통 속에서 포효를 터뜨리며 정신을 다잡더니 다시 붉은 안광을 터뜨리며 내게 주먹질을 날린다. 자리를 박차고 미스릴 주먹질을 피하자 이번에는 허공에 뜬 날 향해 꼬리가 뱀처럼 꼬불거리며 쇄도해온다.
발판이 없는 허공이었기에 나는 허공답보로 아무것도 없는 곳을 박차 꼬리의 경로에서 벗어났다. 꼬리에 대한 보답으로 성화무형검을 변형해 연검의 형태로 만들고는 똑같이 채찍처럼 휘둘러 녀석의 머리통을 후려쳐줬다.
빠각.
주변에서 경탄이 터져나온다.
처음으로 본 드래곤의 뼈에, 그것도 두개골에 커다란 금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마력은 아직 칠할이 남았지만 성흔에 잠재된 신성력이 벌써 삼할로 뚝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프리트는 불의 정령왕이지 신성력을 다루는 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신성력의 소모가 더 빠를 수밖에 없는 거다. 이대로라면 저 본 드래곤의 양팔을 떨구고 신성력이 바닥날 게 뻔하다.
"하아앗!"
일단 한 방은 먹이고자 남은 신성력의 삼할 중에 이할을 때려박아 성화무형검을 커다랗게 만들어 공상에 나오는 거인들이 쓸 법한 거검을 만들어 내리긋는다. 커다란 폭발과 함께 성스러운 불꽃의 향연이 본 드래곤의 오른팔을 날려버린다. 거기다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녀석이 그대로 붕 날아가 광산의 벽에 그대로 충돌하며 먼지를 크게 일으킨다.
바닥에 착지한 나는 힘을 급격히 뽑아내느라 무리한 육신을 가다듬기 위해 호흡을 고르며 아비 누나에게 물었다.
"아비 누나. 성배로 만든 성수를 먹으면 마력이나 신성력을 회복할 수 있어?"
"그건 불가능해. 신의 은혜는 오로지 육체에 한하니까.……왜? 신성력이 모자라?"
"에휴. 네. 마력은 아직 여유가 있는데 성흔에 있는 신성력이 좀 부족하거든요. 이 검을 유지하는데 신성력이 장난 아니게 많이 들어서요."
"그럼 방법이 있어."
그리 말한 아비 누나가 결심을 굳힌 듯한 얼굴로 렉스 경과 추기경을 돌아보았다.
"기사단장님. 추기경님. 본 드래곤을 상대로 시간을 벌어주세요. 1분만 벌어주시면 돼요!"
"……어쩔 수 없군요. 끄응. 노력해보겠습니다."
"레온 공자에게 모든 걸 맡겨서 미안했으니 노력하겠습니다."
두 중년인이 아비 누나의 부탁에 망설이지 않고 슬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본 드래곤을 향해 돌진한다. 아니, 추기경은 신성력 때문에 중년으로 보이는 거지 실상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라 뼈마디가 쑤시실 텐데 저러시네.
어찌됐든, 시간을 벌었다. 그리 확신한 아비 누나가 내게 다가와 내 양쪽 뺨을 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도록 붙잡았다.
본인도 이렇게 쎄게 잡을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구미호가 돼서 힘이 아홉 배라 그런 모양이네.
"…누나. 아파요."
"미, 미안. 그래도 지금 당장 내 신성력을 레온에게 건네줄 테니까 집중하고 들어줘."
신성력을 넘기는 방법이 있다고? 아니, 가능할 지도 모르겠네.
마력은 보통 사람마다 일종의 성질이 다른 바람에 전달이 불가능하다. 제어를 놓고 타인의 몸에 마력을 막 주입했다간 최선의 경우에 병신이 하나 탄생하는 장면을, 최악의 경우에는 식물인간이 되는 이를 심상치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성력은 주신이 내려준 은혜와도 같은 힘으로 일부러 뭘 섞은 게 아닌 이상 성질이 똑같다. 그렇다면 전달하는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한 나는 아비 누나의 말을 기다렸다.
"신성력을 전달해 주는 방법은 연인관계에만 가능해.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거든."
"……."
"진짜니까 그런 눈빛으로 의심하지 말아줄래?……나도 굉장히 창피하거든."
그게 무슨 마법소녀의 힘은 동심(?心)에서 나오냐는 듯한 시선에 아비 누나가 얼굴을 붉히며 그리 대답했다.
"아비게일 수녀! 아직 멀었나?! 연애는 그만두고 빨리 좀"
콰아아앙───!!
저 멀리서 렉스 경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작은 폭발이 일어났지만 아비 누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누나? 우리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니에요?
"후우. 어느 조건과 상황이든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연결될 수 있다는 주신님의 발언과 함께 그런 신성술이 있어서 신성력을 연결할 수 있거든. 전달하는 방법은 점막을 접촉시키는 거고."
"점막접촉이라는 건…."
"키스지. 그러니까…… 너무 의식하면 안 된다?"
쮸웁.
그리 말한 아비 누나는 내게 입술을 내밀어 키스를 한다. 평소에도 자주 맞추던 누나의 입술은 여느 때와 다르게 피맛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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