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노출증 여기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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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잔이 필사의 각오(?)를 하고 주술을 전신에 받아내면서도 기어코 오크 샤먼킹의 목을 잘랐다. 주술의 주인이 죽자마자 주술로 이뤄진 검은 둠은 사라졌지만 그 주술마저 풀렸을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마법이나 신성술이 체계가 다르듯 주술 또한 완전히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난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사단장은 미리 챙겨둔 소형 아공간 주머니에 오크 샤먼킹 카락취의 머리를 넣었다. 이미 아비게일과 그 호위인 우리들이 천막으로 밀물 들어오듯 밀려오는 오크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수를 고려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게 뻔했기에 빨리 좀 도주를 진행해 줬으면 좋겠다.
서걱.
친위대가 몇 마리 들어왔지만 진심을 다해 일으키는 내 오러는 빽빽한 수의 오크들에게서 충분히 빈틈을 만들어 냈고 그 틈을 노려 기사단장과 티타니아, 그리고 앨리스가 친위대의 목을 단숨에 승천시켜 버렸다.
친위대만 쏙쏙 뽑아 죽이니 일반 오크들은 실력자로만 이뤄진 우리 결사대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 해도 돼지 녀석들을 써는 건 나처럼 마력이 차가 못해 넘치는 수준이 아닌 이상 오러를 아껴야 하는 기사단장과 앨리스의 입장에는 피로를 누적시키는 중노동이었다.
"다 됐어요! 모두 10초만 버텨 주세요!"
숏다운 영애가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발동시키며 그리 외쳤다.
매스 텔레포트를 고작 스크롤에 저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으니 발동에 시간이 걸리며 본인이 펼치는 것보다 지연되는 건 당연했기에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서 여길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열의를 불태우며 덤벼오는 오크들을 도륙냈다.
진행은 순조로웠으나 이대로는 매스 텔레포트가 딱 발동될 때 오크들이 방해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보장은 못했다.
"칫. 모두 물러나요! 큰 거 날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닷물과도 같은 마력을 범람시키며 커다란 불꽃의 오러로 파도를 일으켰다.
그 위력과 범위에 모두가 놀랐지만 이내 진정하고 다들 내 불꽃의 쇄도에 한 손 보태겠다는 듯 각자 전력을 다한 원거리 공격을 날렸다.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목숨을 잃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오크들조차 순간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빽빽한 숫자인 만큼 한 번 막히니 우르르 충돌하면서 부딪히고 넘어져 거동이 확실하게 느려졌다.
"됐습니다! 모두 숏다운 영애의 스크롤 범위로 들어가는 겁니다!"
냉큼 뒤돌아 달려가는 기사단장. 우리도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전력을 다해 밀어낸 만큼 오크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우리들은 스크롤의 범위 안에 여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일행을 흘겨 인원수를 빠르게 체크한 숏다운 영애가 외쳤다.
"한 명 모자라요!"
"아르잔! 아르잔이 저기 있어요!"
인원부족에 모두가 당황하기도 전에 아비게일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지른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 오크 샤먼킹이 죽은 자리에는 그를 죽인 아르잔이 그대로 주저앉아 괴로운 듯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역시 카락취가 죽는다고 단순히 주술이 풀리는 건 아니라는 건가.
형님의 아들은 미래가 암울하군.
그리 생각하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찼다.
"도련님?!"
뒤에서 앨리스의 경악이 담긴 비명이 들렀다.
스크롤이 곧 있으면 발동되는 데 범위에서 벗어나면 시간이 너무나 촉박하다는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날 은인이라며 무엇이든 부탁하면 돕겠다며 호감을 내비치는 동료를 이 부락에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여기서 살아 남아 도망칠 자신이 있다는 거려나. 내 실력을 고려하면 단신일 경우 도주 성공률이 높기에 아르잔만이라도 스크롤 효과 범위 안에 넣고 나는 따로 오크들을 따돌리며 하산하여 엔티알 백작령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실제로 괴로워 하는 아르잔을 들어 냅다 일행에게 던질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도련님!"
"스승?!"
스크롤이 발동되기 전에 뛰쳐나온 앨리스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곧장 발로 뻥 차서 저 매스 텔레포트 범위 안으로 넣어 버릴까 싶었지만 당장에 티타니아까지 뛰쳐나오려는 기색이 보이기에 노예 목걸이에 각인된 강제행동 마법을 발동시켰다.
형식 상 노예라는 신분이기에 찬 것이고 티타니아 수준의 마력제어라면 찰나의 시간만으로 얼마든지 풀 수 있지만 지금은 그 찰나의 시간마저 없었기에 경직된 그녀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이쪽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시바 나중에 어떻게 달래줘야 한담.
삐진 여자친구를 달래는 수준이 아니라 바람 피다 그 광경을 목격한 여자친구를 달래는 수준의 난이도가 존나 신나서 저 빌어먹을 오크들을 전부 조져버리고 싶게 하네.
마법이 발현되며 뿜어진 빛과 함께 일행이 엔티알 영지로 이동한 걸 확인한 나는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당장 오러를 크게 휘둘러 천막을 부수고 뛰쳐나가며 내 옆에 거의 닿을듯 말듯이 나란히 달리는 앨리스에게 물었다.
"…왜 거기 안 있고 뛰쳐나온 거야?"
"사랑하는 남자가 적지에 홀로 남는 걸 보고만 있는 여자는 없습니다."
"……."
"그리고 나중에 티타니아 양에게 사과하셔야 할 겁니다."
"쩝."
아니, 스승. 여기서 가불기를 쓰는 건 너무하잖아.
아무리 봐도 까일 게 뻔한 암울한 미래에 레온은 쓴웃음을 짓고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화 속성 오러를 난사한 나머지 부락의 여기저기 화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오크들은 미친 듯이 자신들에게 달려들고 있었고 도망칠 틈을 확보해야 한다. 조금만 늦었다간 오크들에게 포위되어 나뿐만 아니라 앨리스조차 힘든 일을 겪게 될 지도 모르니까.
"취익! 이 암컷은 내가 갖겠다!"
수컷으로써의 포부를 밝히며 몽둥이를 꼬나 쥐고 달려오는 오크를 보며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 여자야, 돼지 새끼야!"
마력을 낭비하는 격이었지만 저 놈만큼은 수컷으로써 내 여자를 노리는 저 녀석을 가만둘 수가 없었기에 마력을 줄기차게 뽑아 성화무형검을 만들어 사출했다.
호기롭게 외칠 실력은 되는 건지 오크 샤먼킹의 친위대 바로 아래 수준은 될 반사신경으로 몽둥이를 들어 가드했지만 내 성화무형검은 몽둥이 따위로 막힐 공격이 아니었고 당연히 꿰뚫어서는 뒤에 있던 오크마저 목을 찔렀다.
앨리스도 마침 양손검을 휘둘러 오크의 머리를 단숨에 셋이나 허공에 띄웠다.
내가 흥분하느라 놓친 근접의 오크들을 커버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답게 손발이 제법 잘 맞는 기분이었다.
"후후. 도련님은 자기 여자를 기쁘게 할 줄 아시는군요."
"아니, 그럼 티타니아는 뭔데?"
"애정을 갈구하는 그 요정은 도련님이 엉덩이를 때려도 좋다고 반응할 겁니다. 도련님이 직접 해주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하니까요."
"……."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들은 오크들의 포위망을 뚫고 부락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일단 방향을 잡고 산을 내려가야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게 오크들이 실시간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즈음 올라오고 있을 버서크 오크들도 걱정해야 하
콰과과과과과.
"……웜메?"
산중턱에 빙하가 생겼다.
'아이스 에이지 본 썰 푼다.'
생각해 보니까 엘라임을 시켜 지원군의 길목을 막을 수 있도록 하라고 티타니아에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영지로 텔레포트한 티타니아가 아직 산맥에 있는 엘라임에게 염화를 보내 버서크 오크들을 어떻게든 처리하라고 한 거리라.
버서크 오크들만 없어도 앨리스랑 함께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으니까.
당장 이프리트를 허공에 소환하자 내 부탁대로 현세에 나올 때는 원피스 한 벌을 입은 복장으로 나온 그녀가 날 보면서 물었다.
뭐야. 또 부탁할 일이 남았어?
"이프리트. 저 오크들을 상대로 도망쳐야 해. 좀 도와줘."
고개를 돌린 그녀가 우글거리는 오크들을 보며 인상을 와락 찡그렸다.
우웩. 저 못생긴 녀석들이 저렇게까지 많았던 거야?
"얼른 도와줘! 나 바쁘거든?!"
흠흠. ……나중에 나중에 내가 원하는 자세로 해 줘야해?
"알겠으니까!"
그런 내 심정이 계약으로 연결된 패스를 통해 이프리트에게 흘러 들어가자 그녀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었다.
자연을 지배하는 정령의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하더니 불바다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마력을 뭉터기로 가져가지만 아직 여유가 있기에 그녀가 마음껏 활개를 치도록 냅뒀다.
정령왕 씩이나 되는 데 힘을 쓸 일이 없으니 그간 오죽 답답했을까.
여기서도 전력을 다하면 안 되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인 만큼 실컷 마음대로 해보라고 지시를 내렸다. 내 부탁에 들어주면서도 전력을 발휘해도 된다는 사실에 이프리트는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희희낙락하는 표정을 지으며 불바다를 몇 번이고 일으켰다.
화르륵. 치이이이이.
"취이이익! 재, 재앙이다, 췩!"
"하늘이 분노했다, 취익!"
"도망쳐라! 도망쳐!"
불꽃의 파도가 몇 번이고 반복하며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고 동족들을 돼지고기로 만들어 버리다 못해 석탄처럼 새까맣게 태우니 오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놈들은 전사의 명예도 모르냐며 덤벼들고 어떤 놈들은 천재(?災)라며 도망가기 바쁘다.
그런데 문제는 부락이 산봉우리에만 한정된 게 아니었는지 점 형태가 아니라 선 형태로 산 아래로 쭉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니까 돼지 새끼들이 끊임없이 보급되는 거였겠지.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처럼 나오는 게 산중턱에 있던 버서크 오크들은 정말 좆도 아니었다는 걸 새삼 체감한다.
아무리 태워도 꾸역꾸역 등장하자 이제는 이프리트마저 살짝 질린 기색을 내비쳤다.
……계약자. 이 돼지새끼들 너무 많은데? 확인해 보니까 이어지는 산맥의 오크들까지 이쪽으로 계속 몰려오는 거 같아.
이런 시바. 산중턱 돼지코들을 막았더니 반대편 산맥에서 넘어오는 오크들이 있었다.
아마 저게 오크 웨이브를 유지하도록 공급되던 병력이었겠지.
'산에 불 지르면 경로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가능은 한데 그럼 나는 더 이상 힘을 못 써. 이미 오늘 하루만에 두 번이나 소환했고 힘을 이만큼 썼으니까.
내가 이프리트와 계약이 가능했던 건 그녀와의 섹스로 쌓은 떡정과 [화기] 스킬로 인해 불꽃친화력이 높아서 그런 거지 정령술 스킬의 숙련도가 높았던 게 아니다. 심지어 이프리트와 계약을 했을 뿐이고 아직 정령술 자체에는 내 쪽에서 미숙했기에 마력이 여유로워도 이프리트가 계속 힘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그녀가 저리 말하는 거다.
이프리트의 손실은 뼈 아프지만 그 길을 막지 않는다면 오크들이 개미 떼처럼 덤벼들 거다.
"질러!"
좋았어! 정령왕의 힘을 맛 봐라!
이프리트가 허공에 양손을 든다.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둔 게 자세가 딱 원기옥 모으는 꼴이다.
그런데 웃긴 건 정말로 원기옥 모으듯 내 마력을 가져 가서는 불꽃으로 치환하는데 거의 소(小)태양이라고 봐도 무방한 크기였다. 덕분에 난데없이 밤하늘이 밝아지며 태양이 떠오른 꼴이 되었다. 지금 즈음이면 엔티알 영지로 무사히 도주한 일행들도 이 태양원기옥을 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프리트는 그 태양원기옥을 저 산맥의 오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경로에다가 내리치듯 손을 휘둘렀다.
폭발은 예술이다!
저 대사를 이프리트가 어떻게 아는 걸까.
혹시 쟤 졸렬잎 세계에서 탈주해서 이 세계에 환생한 정령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을 품었을 때, 태양이 산맥에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응. 딱 봐도 알겠다. 저 정도 불길이면 오크들이 확실히 여기를 못 오겠지.
앨리스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말했다.
"도련님. 저 불길이 여기까지 올 것 같습니다만?"
"응. 내가 봐도 그래."
시바 저 열폭풍이 여기까지 다가오고 있는 거 실환가?
아……. 계약자, 미안.
오늘 하루분의 힘을 다 소모하고 역소환되기 시작한 이프리트가 실수를 저지른 아이처럼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너무 들떠서 힘이 좀 과하게 들어갔다. ……데헷.
"야 이 멍청아!"
넌 나중에 음양색공으로 기절할 때까지 보지 팡팡 형이다.
열폭풍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나는 옆에 있던 앨리스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곧장 화 속성의 오러를 세밀하게 제어해 우리 둘을 보호할 막을 형성했다. 일종의 호신강기랄까.
그렇게 난데없이 열폭풍을 맞은 우리는 그 충격을 감내하지 못하고 도망치던 오크들과 함께 사이좋게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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