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노출증 여기사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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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해가 수줍다는 듯 선등성이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하늘에는 밤이라는 이름의 장막이 내려앉았다. 성벽 위에서 횃불을 세우고 영지 내에서는 마력등이 불빛을 발하며 사람들은 어둠이라는 자연에 거스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크들은 자연에 거스르는 걸 역천(??)이라 여기며 어둠에 순응하고는 전투를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다는 거다.
덕분에 열심히 성문을 두드리고 성벽을 오르려던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남기며 다시 자기들의 야영지로 돌아간 오크들. 그리하여 이 한산한 시각에 우리 결사대들은 검은 복면과 야행복을 입고 조용히 영지 바깥으로 나와 오크들의 야영지로 향해다.
혹시 모를 주술이나 기습에 대비해 아비게일이 미리 신성술을 우리에게 걸어 주었고 그 다음으로 같이 따라온 숏다운 영애의 바람 마법이 우리의 기척과 소리를 없앴다.
은밀활동에 있어서는 최고의 상황.
덕분에 우리들은 사전에 논의한 대로 엔티알 백작이 알려 준 지도의 길에 따라 말 없이 조용히 이동을 계속했다. 쓸데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오감이 뛰어난 오크 놈들의 귀에 포착이라도 됐다간 귀찮기 짝이 없으니까.
일반적으로 오크 수준에서 들킬 일은 없지만 그 오크가 제너럴 같은, 오크 샤먼킹의 친위대라면 들킬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었기에.
그렇게 모두 최대한 기척을 없애고 이동하고 있으니 어느새 오크들의 첫 번째 야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녀석들은 나름대로 경비를 하는 건지 야영지 주변을 둥그렇게 울타리를 걸쳐 침입에 대비했고 오크들이 순찰을 돌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녀석들이 야영지는 의외로 엔티알 백작령에서 가깝지만 산중턱과 산봉우리였다.
거친 산길이었기에 투박한 오크들이나 실력자가 아니라면 오르기 힘든 험한 위치. 그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위치를 알면서도 엔티엘 백작은 우리들을 보낼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길이 험해서 도망치는데 시간이 걸리고 그러다 오크들에게 잡히면 그대로 뒤지는 거니까.
'심지어 오크 샤먼킹은 산봉우리에서 친위대와 함께 머물고 있지.'
산 너머로 보급되는 오크들을 계속 엔티알 영지로 보내고 다친 채로 돌아온 놈은 버서크 주술로 광분시켜서 다음날에 다시 내보내는 전법. 심지어 산중턱 야영지에 있는 놈들은 이미 전투를 치른 놈들로 전부 버서크 오크들이라 산봉우리에서 난동을 부리면 도망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그것도 숏다운 영애가 준비한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이 없을 때의 얘기지만 말이다.
기척을 줄인 우리들은 그렇게 산중턱의 오크들에게 들키지 않게 더욱 험한 길로 산을 탔다. 식물들이 아무렇게나 자라나 있고 우거진 나무의 잎들은 빈틈 없이 빽빽하게 엉겨 이 야밤의 달빛 한 조각 내려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래도 다들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실력자들로 안력을 마력으로 강화해 야시(??)를 펼쳐 수월하게 올라간다. 마법사에 가까운 숏다운 영애는 형님이 어부바를 해 줬고 의외로 아비게일은 소(?) 수인의 피를 이어받아 신체능력이 좋다는 말이 정말인듯 수월하게 산을 탔다.
……소의 피가 흘러서 가슴이 저리 큰 건가?
아르잔하고 이혼할 예정이라는데 그냥 내가 꼬실까 싶었지만 이내 망상은 그만두기로 했다.
금태양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합법쇼타가 꼬시려 들면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상급 수녀가 넘어갈 리가 있나. 만약 내게 넘어오는 일이 있다면 아비게일이 사실은 쇼타콘이라거나 S, 혹은 M끼가 다분한 이상성욕 여우일 때뿐이리라.
그렇게 잡념을 품고 있자니 어느새 산봉우리에 있는 오크 샤먼킹의 야영지…….
아니, 시바 저건 잠깐 머무는 야영지 수준이 아니라 그냥 부락 수준인데?
그 규모에 당황하고 있자니 길을 안내하던 숏다운 영애도, 결사대를 이끌던 제2 기사단장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당황스럽다는 기색을 한껏 내비쳤다. 설마 오크 웨이브라고 해도 이렇게 영지에 가까운 곳에 대놓고 부락을 만들었을 줄은 몰랐던 거겠지.
마법을 새로이 시전해 주변과의 소리를 차단시킨 숏다운 영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텄다.
"하아. 이제 대화를 나눠도 좋아요. 아무리 오크 샤먼킹이라도 이렇게 부락에서 떨어진 곳에서 사용하는 마법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요."
"좋군요."
기사단장이 품에서 작은 지도를 하나 꺼내들었다. 대충 바위를 잘라서 평평하게 만들어 그 위에 지도를 펼치자 모두가 지도를 중심으로 둥글게 앉았다.
그는 지도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엔티알 백작께서 따로 영지의 백성에게 구하신 이 산의 지도입니다."
"지도라기에는 너무 섬세하게 잘 그려져 있는데요?"
확실히 아비게일의 질문대로 지도는 아예 이 산을 그린 듯 섬세하게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다. 명백히 이런 산 하나만을 중심적으로 그린 지도는 흔치 않기에 의구심을 품을 만도 했다.
기사단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그 백성이 이 산에서 약초를 캐던 삼마니라고 하는군요."
"아."
모두가 납득했다.
삼마니가 약초 캐고 돈 벌려면 그 산에 대해서 꼼꼼히 잘 알아야겠지. 잘 보니까 지도에는 어느 장소에 어느 약초가 잘 발견되는지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어쨌든, 야영지…… 아니, 저 정도면 아예 부락이겠군요. 부락을 보면 지도랑은 전혀 맞지 않는 게 웨이브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지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부락의 크기를 보아 오크 샤먼킹이 있는 건 확실할 듯하니 문제는 여기서 어떻게 저기 안에 침입해 오크 샤먼킹의 목을 따냐겠군요."
원래는 산중턱에 오크들이 더 많을 줄 알고 비밀리에 침투해 기습을 가하려 했는데 부락의 크기가 저만하니 오크들이 꼼꼼하게 순찰을 돌고 있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았다.
"일점돌파는 어떻지? 여기 있는 모두가 전력을 발휘하면 빠르게 경비를 뚫고 오크 샤먼킹을 죽일 수 있을 텐데."
여느 때처럼 닥치고 직진만 외치는 우리 형님의 뇌구조가 의심스러운 발언이었다.
아니, 계산은 잘 하면서 왜 이런 전투에서만 나오면 돌격형 장군이 되는 건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친족이었다.
"레콘 님. 그럼 오크 샤먼킹을 죽일 수야 있겠지만 되돌아 가는 길이 막히게 될 거예요. 오크 웨이브의 주인이 죽는다 해도 오크들도 무뇌는 아니기에 대장을 죽인 이가 부락 내에 있다면 죽이려 들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그 의견은 기각하겠습니다, 대공자."
그래도 다행인 점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는 걸까. 저런 숏다운 영애가 형수님(예정)이 된다면 공작가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는 않으리라.
한동안 갑론을박을 펼치며 여러 의견이 오고 갔지만 그리 현실적인 내용은 없었다.
호위로 왔기에, 그리고 형님과의 거래로 인해 가만히 있기로 했지만 한참을 구경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에 속으로 혀를 찬 내가 손을 들고 의견을 주장했다.
"양동이 어떨까요? 한 쪽에서 시선을 끄는 사이에 숨어 들어가 오크 샤먼킹만 후다닥 조지는 거죠."
"레온 공자. 죄송한 말이지만 그랬다간 시선을 끄는 역할을 맡는 이들이 죽게 될 겁니다."
들키지 않아야 하는 걸 대놓고 들키면 레콘이 말한 정면돌파 뺨치는 포위망에 갇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양동을 위해 시선을 끌 이들은 반드시 죽게 된다고 봐도 좋을 희생양이 된다느 것이었다.
그런 기사단장의 말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그건 괜찮아요. 왜냐하면…"
옆에 멀뚱멀뚱 있던 티타니아의 허리를 팔로 감싸 끌어 안고는 말했다.
"시선을 끄는 역할은 정령이 맡아줄 테니까요."
"………요정…! 그렇군요. 그 요정 여인께서 계약하신 정령이 시선을 대신 끌어준다는 겁니까?"
"그렇죠. 시선만 적당히 끌어주다가 소환을 해제해서 역소환을 하면 되니까. 저희의 전력이 조금 줄다시피 하겠지만 이것보다 손해를 줄여 가며 이득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되네요."
정령이 난동을 부리다가 '잘 있어라 대머리들아!'라며 손을 흔들어 주고 도망치면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셈이니 확실히 양동을 펼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어요. 내 불의 정령과 티타니아의 물의 정령이라면 이 산에서 시선을 확연하게 끌 수 있겠죠."
"확실히."
숏다운 영애가 푸른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유한 눈빛을 지었다.
"정령들의 시선 끌기라면 이쪽의 전력이 줄어들어도 들킬 확률이 줄어들고 안전성이 확 뛰어올라요. 저는 레온 공자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주변을 둘러보며 결사대의 의견을 물었다.
"저 의견이 이번 결사행에 부합하다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
반박이 없자 기사단장이 시원스레 결론을 냈다.
"결론이 났군요. 그럼 바로 실행하도록 하죠. 레온 공자님. 요정 아가씨.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나와 티타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령과 얘기를 나누고 우리들이 있는 곳의 정반대편으로 보내 작업을 시작한 뒤에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잠시 티타니아가 함께 결사대와 떨어졌다.
정령과는 [전음]처럼 계약으로 생성된 링크를 통해 사념을 나눌 수 있기에 이렇게 일행과 떨어지는 걸 티타니아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순순히 날 따라줬다. 고마운 연인이다.
"티타니아. 이프리트만 저쪽으로 보내서 양동을 시킬 거야."
"그럼 엘라임은요?"
엘라임에게 따로 뭘 시키면 되냐는 질문에 즉시 대답했다.
"양동이면 도망칠 가능성이 높아진다지만 낙오되지 않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어. 기사단장에게 우선순위가 가장 떨어지는 게 너기도 하고. 만약을 대비해서 엘라임은 비밀리에 타 오크들이 이 부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진입로를 확보하도록 따로 산을 훑어 보는 역할을 해 줬으면 해. 해 줄 수 있겠어?"
"네. 주인님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고마워."
나중에 따로 엘라임에게도 뭔가를 선물해 줘야겠다.
그래야 우리 티타니아 좀 더 잘 챙겨주지.
◇◇◇
퍼어엉─────!
오크 부락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산에 불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기 전에 소진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오크들은 불을 끄기 위해 급히 모여들었다.
평소라면 불길을 잡기 위해 강가에서 물을 떠다 오겠지만 산봉우리 근처에 강가가 있을 리가 있나.
덕분에 어수선해지며 경비들이 반 이하로 줄어들고 명백히 빈틈이 생겼다.
"사일런스. 하이드."
숏다운 영애의 마법이 기척을 줄인다. 그래봤자 반투명하여 집중해서 본다면 금방 들킬 수준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이 어두운 야밤, 그것도 부락에 불이 붙어 발등에 불이 난 것처럼 어수선한 오크들을 상대로 들킬 일은 어지간해선 없으리라.
"그럼 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빠르게 인도한다.
여태까지 대륙이 겪어온 오크 웨이브의 기록을 토대로 웨이브의 주인인 오크 로드는 자신의 거주지에 커다란 천막과 깃발을 치고, 오크 샤먼킹은 토템을 설치한다는 걸 알기에 일행은 어렵지 않게 오크 샤먼킹이 머물고 있을 천막을 찾을 수 있었다.
중간에 오는 길에 오감이 좋은 오크 몇 마리가 눈치채려 하기에 일행들은 들킬 때마다 일검으로 주검을 만들어 버렸다.
죽은 오크들은 곧 있으면 들킬 테니 필사의 각오로 단시간 내에 오크 샤먼킹을 죽여야만 한다. 천막에 난입하자 그곳에서 심유한 눈빛을 한 채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오크가 있었다.
쟤가 오크 샤먼킹이겠지.
무슨 피난민 관리하는 현대의 강당 대피소처럼 넓찍한 천막을 혼자서 사용하는 녀석은 현자처럼 이지가 가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 봤다. 얼핏 보면 오크 웨이브를 일으킨 당사자라는 생각이 안 들지만 마안(??)을 가진 나는 녀석의 눈에서 사특한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취익. 어리석은 가축들이 왔구나."
네 명의 친위대를 거느린 오크 샤먼킹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 일어났다.
"그래도 가축 중에서 상등품의 암컷들이군. 이 몸께서 친히."
쉬익. 쾅.
오크 샤먼킹의 말을 끊고 날아간 화살이 녀석의 심장을 노렸으나 아쉽게도 옆에 대기하고 있던 오크 친위대가 대검을 들어 검면으로 화살을 막았다. 그래도 음기가 가득한 티타니아의 화살에 검이 일부 얼어붙었으니 손해는 아니다.
오크들이 할 말을 잃었으나 우리 일행 중에서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왜냐하면 오크 샤먼킹을 만나는 순간 선빵을 치자고 얘기를 이미 나눴기 때문이다.
선빵필승!
"죽어라, 사악한 오크여!"
녀석들이 당황하는 사이에 기사단장을 필두로 모두 오크 샤먼킹과 그 친위대에게 달려들었다. 네 명의 친위대는 보통 오크들이 아니었지만 여기 있는 결사대 또한 수가 적거나 실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기에 오크 쪽이 금방 밀리기 시작했다.
오크 샤먼킹이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우리를 힐난했다.
"취, 취익! 이 치사한 인간들! 가축이라 해도 네놈들에게는 전사의 긍지도 없는 거냐!"
"주술사가 전상의 긍지 운운하지 말라고! 못생긴 게!"
인신공격에 모두가 움찔한다.
왜. 뭐. 왜.
오크는 못생긴 거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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