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저급한 유혹(3)
"헤헤 난 또-오, 오빠가 소파 대신 내 의자가 돼서 무릎 위에 앉아달라는 줄 알았-찌이."
슬그머니 돌아가려던 내게 희진이가 장난스럽게 말을 해줘서 심장이 놀라는 한편, 어찌어찌 넘어간 분위기라 한시름 놓였다.
"히-힛!"
이렇게 말하면서도 희진이의 시선이 녀석을 향해 한 번 흘깃한 걸 보아 꼭 나를 두고 한 소리는 아닌 기분. 어쩌면 이렇게나 애정이 넘친다는 걸 과시하는 건 아닐까 싶은 느낌이 들었는데, 오히려 도발하는 건 아닐는지 걱정이었다.
"자- 언니."
희진이의 손이 앉으면서 내 앞을 지나 녀석에게로 컵을 내밀어 뻗는 팔. 녀석은 그걸 담담하게 잡았고, 그에 희진이는 몸을 내게로 밀착하면서 우유랑 주스를 들었다.
"히히히-."
주스는 녀석에게, 우유는 나를 줘서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깨닫곤 얼른 희진이의 컵에 따를 준비를 하니 웃음이 만연한 얼굴로 헤죽. 원래 같았으면 희진이가 붙었을 때 옴짝달싹하며 곤란함을 비췄을 테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나도 살짝 희진이에게 몸을 붙였다.
"우리 짠할까 오빠?"
우윳잔을 부딪치긴 우스웠지만, 조용히 순응하는 동작.
"응, 좋아-."
맑은소리와 함께 어느새 쥐어진 리모컨으로 영화를 틀더니 본격적인 시작음을 들으며 겨우 목을 축였다. 그 사이 녀석은 어떤지 흘깃 보니까 이런 우리에게 흥미 없이 소파 구석으로 몸을 붙이고는 조용히 홀짝. 덕분에 안심하고 시청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무엇보다도 이건 공포영화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코미디영화라고 했으니까 더더욱.
"핯, 재밌네."
끝을 알리는 제작진 소개 자막마저 정성 들인 연출에 감탄하다가도, 적절히 어우러지게 웃긴 장면에서 빵 터지다 웃음기가 거의 가라앉을 무렵 무심코 뱉은 말. 시작할 때부터 유독 녀석이 쳐다보는 듯한 시선에 조금 거슬렸었지만, 영화가 재밌던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 쓰지 않고 잘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그렇다는 느낌이 들었단 거지, 설령 진짜 그랬다고 해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으니까.
"-…."
지금도 그러는지 몰라 눈길만 힐끔 왼쪽으로 훔쳐보니까 생기 없는 얼굴이 처음과 같이 무표정을 고수하며 티브이를 하릴없이 보고 있었다. 그나마 가까워서 간간이 보게 되는 얼굴빛은 희진이를 닮아 예쁘고 귀여운 것에 비해 어째선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상대. 그 이유가 정말 실례되는 생각이지만, 그런 마음이 들게 한 본인의 잘못이 아예 없다고 하긴 어려웠다.
"그치? 나도 그래서 오빠랑 같이 보려고 계속 참았었어."
녀석에 대한 의견을 속으로 추스르다 희진이의 목소리에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화들짝 놀랐으나, 재빨리 다듬는 표정. 여기 와서 당황스러움을 달래는 기지만 느는 거 같다.
"헻…정말?"
알아차릴 리 없는 생각을 감추려 가슴을 쿡 찌르는 듯한 의견에 튀어 오른 눈썹이 이상하지 않게 커진 눈동자와 과장 된 대답.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다가 오른편에서 팔짱 껴 바짝 밀착하던 차에 좋은 향기를 풍기며 고개를 사랑스럽게 올리니까 자연스러운 미소로 변했다.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건지….
본능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도록 헤벌쭉하게 한다.
"흐흩, 고마워. 영화 엄청 재밌었어!"
불과 한 달 전의 나라면 감정조차 함부로 비치려고 하지 않아 꺼렸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나 수줍어도 좋다고 웃는 게 진심으로….
"그럭저럭…."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중 분위기를 망치는 한 마디. 별로 단어의 의미보단, 구태여 연인끼리 다정다감한 틈에 굳이 그런 말을 쓰고 싶을까 싶었다. 말투도, 꼭 초를 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눈치 없이.
"…난 오빠랑 같이 재밌었는데, 언닌 별로였나봐?"
떡하니 툭 뱉은 말에 희진이도 불편하게 들렸는지 나를 보던 고개가 기울여져 샐쭉거렸다.
"응, 별로…."
부정적인 태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여도 거리낌 없는 소신. 어쩌다 중간에 껴서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희진이랑 자리를 바꾸면 좋았을 걸 하며 후회도 간단하게 잠시.
"후-응. 그래? 남자들이 빨개 벗고 헐떡이는 것보단 좋은데?"
생뚱맞은 소리를 나름 분석해본바, 자기가 고른 영화에 대해 지적을 당하니까 이이제이라고 그대로 돌려준 거 같았다. 자매임에도 그렇게 친해 보이지 않아 사이에 낀 나로선 그저 곤혹스러울 따름.
"개인 취향…."
자기가 먼저 그럭저럭 이라고 말한 주제에, 아마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낮추어 말하니까 하는 말치고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럴 거면 먼저 시비를 걸지 말던가.
"나도 개인 취향이야 언니. 그러니까 말해줄게. 언니 취향 구려."
재밌게 영화 관람하다가 뜬금없이 싸움이 날법한 분위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살핀다.
"오빠. 나 이빨 좀 닦고 올게."
그러다 벌떡 일어나면서 나가며 하는 말.
"어, 응…."
그나마 가기 전에 얼굴을 마주하곤 눈이라도 웃고 있었으니까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 모습에 순간 등줄기가 싸늘했어도.
"…쿻-."
희진이는 싸움을 피한 건데, 녀석은 마치 자기가 이겼다는 양 노골적으로 입을 손으로 가려 비웃고 있었다. 기세는 당연하게 희진이가 강했어도 조곤조곤 대답하며 밀리지 않으려던 태도. 내가 보기엔 그저 고집만 있어선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
즐겁게 코미디영화를 보다 느닷없이 싸해진 환경. 에어컨이 시원하다 못해 차가워서가 아니라 녀석이 괜한 말을 해서 그렇게 됐다. 지금만 놓고 생각해보면 희진이가 급발진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면 아마 이전에도 이렇게 녀석이 희진이를 설렁설렁 도발하다 쌓인 게 방금처럼 도화선이 되어 폭발한 걸지도. 아니면 이게 이상일 수도 있었다.
"…-."
그렇지만, 둘만 남겨지니까 무척 뻘쭘하여 드는 어색함.
"저게…좋아?"
주어를 말하지 않으니까 희진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영화를 보고 하는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좋아."
어찌 됐건 무엇이 대상이라도 난 긍정적이기에 건성으로나마 해주는 대답.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말투와 배려 없는 행동엔 도저히 좋게 반응해주기 어려웠다.
"…풉."
또다시 의도적으로 사람의 신경을 긁는 듯한 비웃음. 시비를 거는 게 취미인지,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잘하는 짓거리다.
"적당히 해…."
예전의 나였으면 아무리 괴롭힘당해도 입도 뻥끗 못 했을 텐데, 비록 친언니라 할지라도 희진이에게 구는 몰상식함에 참을 수 없어 머리로 거치지 않고 내뱉은 경고.
"…뭘?"
정말로 모르는지 뻔뻔스럽게 되묻는다.
설마,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아니, 하-. 아니야."
뭔가 멋지게 받아치고 싶은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급히 대화를 마쳤다.
"쿠쿸-!"
그렇기에 계속해서 비웃는 행동에 울컥 짜증이 났어도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지 몰라 답답하게 듣는 처지.
"동정 주제에."
"이잇…!"
그러다 명백히 깔보는 태도에 그만 욱해버렸다. 여태 우습게 보였던 것 같지만, 동성은 몰라도 이성에게 이렇게나 지나친 행위를 당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망연히 당하기만. 괴롭힘에 지쳐 반격해서 해치우는 망상을 자주 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같은 남자를 상대로 그랬던 거다.
"와, 동정이 화낸다."
그 말에 기운차게 일어섰지만, 그래도 되받아칠 말은 생각이 안 나서 입만 부들거리는 실정. 그나마 다행인 점은 실제로 때렸던 녀석들과 달리 난 파르르 떨기만 한 점일까? 폭행을 가하려는 전조로 주먹을 쥔다거나 그러기보단 어떻게든 언어로서 반박해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쿻…!"
그러든가 말든가 다시 한번 손으로 입을 가려 웃더니 스마트폰을 드는 녀석. 하, 그래…하며 차라리 내게서 관심을 끄고 딴짓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 나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소파에 앉아 몸을 돌렸다.
'코 토-크'
이 와중에 울리는 스마트폰.
"…."
코-톡을 보낸 장본인은 어이없게도 나랑 가장 가까운 상대라서 무슨 의도인지 몸을 돌리려다가 녀석의 뜻대로 놀아나는 거 같아 꾹 참았다.
by특별공수
[ㅋㅋ]_오후 2:23
뭘 잘했다고 웃는 거지? 아니, 틀림없이 비웃는 거야 이거.
방금 면전에서 실컷 그러더니 토-크로도 이러니까 괜히 과거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떠올라 자연스레 차단하고 싶어지는 욕구. 상대할수록 인내심을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내가 떼줄까?]_오후 2:23
이럴 땐 가족이라도 과감하고 단호하게…희진이랑 상담하는 편이….
[동정]_오후 2:23
"…?!"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어지는 내용을 해석하니까 금치 못하는 당황스러움. 결국, 돌리지 않으려던 고개가 어쩔 도리 없이 범인을 쳐다보니까 조용히 웃는 표정에 묘한 기질이 느껴졌다. 경험이 없는 나도 음흉하단 표현이 떠오를 만큼 고혹적인 미소로 진짜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빛.
"…히죽-."
다리는 언제 올렸는지 오른쪽 다리를 접고는 소파에 기대 있었다. 그런 자세에 음란하기 짝이 없단 문장이 떠오른 건 녀석의 자그마한 체구를 지키던 체육복 상의 지퍼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서서히 내려갔기에. 그 행위에 별다른 저항 없이 따라가던 눈길은 이윽고 야릇한 피부의 노출을 확인할 수 있었고, 안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직접 해볼래…?"
침 삼키는 것, 숨 쉬는 것마저 잊었다가 유혹적인 목소리에 역설적이게도 정신을 차려 부르르 떠는 어깨.
"쿠-훟, 쿠후훗…!"
소리 없이 호들갑을 떨며 희진이가 앉았던 자리로 도망치니까 즐겁다는 양 웃는다.
"흡…!"
그렇게 방심하여 눈이 마주치니까 흠칫 멎는 숨. 어설퍼진 나를 보며 씨익 웃던 얼굴이 느긋함의 끝이었음을 알리며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에 불쑥 다가온다.
"…귀여워."
희진이가 나를 보며 부끄럼 없이 자주 하던 말을 친언니에게 들으니까 묘한 기분이 들면서도 가만히만 있는 몸. 반응하기 어려운 기세로 눈앞까지 와 반쯤 감겼던 눈동자가 면밀히 살피는 것에 이상하게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으…."
체격이 조금이나마 우세했으면서도 반항할 수 없는 건 단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인 걸까?
"하자, 섹스…."
입술을 다시더니 내뱉는 말은 내가 예상했던 단어가 맞았다.
"읗…!"
'풀썩'
어느새 짚었는지 모를 등 뒤의 손을 떨구며 뒤로 기울어졌던 육체가 소파로 떨어진다. 그렇게 되지 마치 내 위를 올라탄 듯한 녀석의 상체. 밀어내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음에 급히 손을 올리지만, 실제로 내보인 행동은 공격이 아닌 방어였다.
"…-."
어금니는 꽉 깨물고, 미약한 눈동자로 싫다는 내색을 보이다 돌리는 얼굴. 배와 허벅지 사이, 골반 부근에 작으면서도 의식하게끔 툭툭 건드리는 쇠가 신경 쓰이는 건 최대한 녀석에게서 집중하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
그런 소망이 통했던 걸까? 그렇게나 짓궂던 표정이 무감각해지더니 소리 없이 뒤로 물러나 그냥 가버린다.
"…하하."
풀어헤친 앞섶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가버리는 뒷모습에 해코지를 당하지 않아 안심하면서도 이런 자신이 우스워져 처량해지는 기분.
'코 토-크'
썰렁했던 거실을 깨우는 소리에 무기력하던 몸을 일으키곤 여운을 지우며 또 누가 연락을 했나 확인하니까 복잡미묘했던 기분 쉽게 가시지 말라고 녀석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이따 내 방으로 와]_오후 2:24
"……쩝."
무언가 한바탕 지나간 거 같은데, 그게 꿈도 아니고 현실이고 난 홀로 남겨진 거 같은데 내가 원한다면 혼자이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은 기묘함.
"하…!"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찬 행동을 녀석이 없을 때 겨우 해봤다.
"끄-응…."
오히려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희진이랑 짜고 몰카를 시도하는 건 아닐까…아니면 초면에 이럴 리가…그렇겠지?
실컷 따지고 싶은 행태에 기가 빨리고 어안이 벙벙해져 희진이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이내 관두고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만약 진짜 그랬다면 몰래 지켜보면서 키득거렸겠지.
"모해 오빠?"
"으갸아-핫!?"
도가 지나치지만, 애써 장난이었길 바라며 무시하려고 마음 먹으니까 돌연 귀로 들어오는 바람에 하마터면 스마트폰을 놓칠 뻔했다.
"이히히히, 왜 그렇게 놀라 오빠? 귀엽게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