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짐꾼] 분홍빛 장미
엘프 도시를 떠나 용사 파티가 가장 먼저 들린 마을은 저번에 음마들이 꿈을 조작하며 이상한 실험을 했던 그 마을이었다.
용사와 음마 쪽 책임자가 담판을 짓는 그 과정에 내가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알아서 잘 처리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근심걱정 하나 없이 윤기 도는 얼굴을 보니 그 때와 조금도 달라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아직도 음마들이 남아있나?
그렇지만 분명 음마들이 철수하고 돌아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이동했었는데.
“어…?”
멍청한 용사의 얼굴을 보니 그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인 모양.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우리에게 인간 모습을 한 음마 하나가 쪼르르 달려와 반겨주었다.
그 때 우리 숙소에 들어왔던 멍청한 음마다.
이름이… 미리던가?
미리는 용사가 자기를 보러온 줄 알고 혼자 제멋대로 기대하고 좋아하더니, 책임자에게 보고하겠다며 다시 쪼르르 달려갔다.
용사가 삐진 유니를 달래고, 우리들은 당시 용사와 직접 담판을 지었던 이 도시 음마들의 책임자 에아를 만나 사정을 들었다.
그 때 분명 실험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협상이 잘 풀려 그들의 허가를 맡고 시험적으로 공존하는 중이란다.
살다살다 마물이 인간과 함께 사는 모습을 다 보네.
분명 반대가 엄청 심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통과시켰지?
생각보다 용한 재주가 있는 년들이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하룻밤 쉬었다가 가라고 제안했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던 우리는 그 제안에 응했다.
“…그럼, 혹시 이번에도 필요하신가요?”
그녀가 입가를 가리고 슬쩍 웃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그녀가 묻는 것.
그것은 저번처럼 음마들의 꿈이 필요하냐는 질문이었다.
저번에는 아린과 유니가 끄덕였던가?
따라서 나도 가장 먼저 그녀들의 반응을 확인했지만 이번에는 둘 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아마 둘 모두 바라던 것을 이뤘기 때문이리라.
아린은 주인을 얻었고, 유니는 용사를 얻었다.
이제 굳이 꿈에만 기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접근하지 말라고 얘기해두죠.”
그녀는 눈치 빠르게 우리의 변화를 눈치 챘지만 별 말 하지 않고 우리를 보내주었다.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우리는 그녀의 호의로 평소보다 더 큰 방을 빌렸다.
벌써부터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잠시 1층에 내려와 있었는데, 그 사이 용사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몽마 미리가 두근거리는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에, 에릭 님…!”
환한 그녀의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난처한 듯한 표정의 용사와 날카로워지는 유니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여기서는 그녀를 칼같이 쳐내야 유니의 마음을 살 수 있겠지만… 용사가 그런 선택을 할 리는 없지.
보나마나 또 저 어린 음마를 신경쓰느라 우물쭈물되며 둘 다 놓칠 게 뻔했다.
나는 양 옆에 세리아와 아린을 끼고 그 모습을 구경하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연인이 있거든.”
“네?”
그렇지만 이번에 용사는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게 미리를 쳐내고서는, 그녀가 울먹이는데도 괜한 희망을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용사도 성장한 것이다.
그는 미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당황하기는 했으나, 자기가 했던 말을 다시 주워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흐아앙!”
결국 그녀가 울면서 숙소 밖으로 나가자 세리아와 아린은 키득거리며 용사를 놀렸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들처럼 용사를 비웃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생각보다 용사의 정신이 많이 안정적인 상태다.
루엘라가 흉내 낸 유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가?
아니, 그 뒤에 묘하게 힐끔거리던 반응을 보면 듣기는 한 거 같은데….
의심에 쐐기를 박아 넣어야겠군.
마침 여기에는 그를 위한 딱 좋은 무대가 마련되어있다.
나는 그녀가 떠난 문을 바라보며 조용히 일어났다.
“잠깐 볼일 좀 보고 오지.”
“앗, 주인님….”
아린은 날 따라 나오려고 했지만 내가 다시 그녀를 앉혔다.
아마 유니가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대놓고 행동할 수는 없고,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게 적당히 속여야 한다.
나는 유니의 모습을 흘끗 살피며 태연하게 뒷문으로 나가 미리를 찾았다.
터덜터덜하게 걸어가는 그녀.
나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앗….”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올 줄은 몰랐겠지?
“무, 무슨 일이시죠?”
“생각이 달라졌어.”
내 생뚱맞은 말에 그녀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오늘 밤 그 음마의 꿈 좀 꾸게 해줘.”
“저번에는 분명….”
그런 거 필요 없다고 했었지.
나도 그녀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좀 해주고 싶지만 유니가 보고 있을 테니 최대한 말을 아껴야했다.
“난 얘기했다. 오늘 밤 기대해두지.”
“어? 저, 저기, 어….”
난 그 말만 마치고 바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도 살짝 두근거렸다.
과연 이걸 유니가 눈치 챌까?
내가 미리와 함께 아린의 꿈속을 헤집고 다녔던 것은 전부 그녀가 자던 사이 일어난 일이다.
아마 유니는 그런 상황이 있었던 줄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그냥 내가 음마들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뒤늦게 수락한 것으로밖에 안 보이겠지.
상황에서 묘한 위화감은 느끼더라도 그 전말까지 정확하게 파악해낼 순 없을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자 역시 유니가 나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당연히 내가 전말을 들려줄 리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포기하고 에릭을 데리고 먼저 올라갔다.
“뭐하고 오신 거예요?”
“뭐, 이것저것.”
그녀들에게도 대충 대답해주고 우리는 한 박자 늦게 방으로 들어왔다.
용사의 바로 옆 방.
일부러 방을 그렇게 잡았다.
“주인님, 그럼….”
“어, 얼마든지….”
슬쩍 옷을 벗으며 대놓고 다가오는 그녀들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오늘은 안 할 거야.”
“네…?”
“주인님이?”
마지막은 뭐야.
나는 세리아를 슬쩍 흘겨보며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늘은 좀 아껴둬야 하니까, 그냥 넘어가자고.”
“설마 루….”
무심코 아린이 그 이름을 말하려하자 세리아가 찰싹 때려 그녀의 입을 닫았다.
“주인님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 그럼 대신 제가 이불 역할이라도….”
어떻게든 안기기를 바라는 아린을 말리며 우리는 조금 일찍 잠에 들었다.
물론 나는 눕기만 하고 자지 않았다.
끼이익.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리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히익…! 왜, 왜 깨어있….”
“좋아, 잘 왔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는 미리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어, 그, 꾸, 꿈이 필요하다고….”
“필요하기는 한데, 그게 내가 아니거든.”
무슨 말인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
“서, 설마… 또 그런 짓을 하려는 건가요? 저, 전 싫어요!”
“잘 생각해봐. 이건 너한테도 좋은 일이야.”
어차피 그녀를 속여 넘기는 건 손쉽다.
나는 미리에게 유니를 떼어놓고 빈자리를 만들어 그녀가 비집고 들어갈 비장의 수를 전수해주었다.
“그… 그치만 그러면 에릭 님이 너무 가엾….”
“미리, 넌 유니에 비하면 너무 불리해. 네가 이기려면 피와 눈물도 없는 잔혹한 음마가 될 필요가 있어.”
“읏, 으으… 그, 그래도 결국에는 이게 다 에릭 님을 위한 거겠죠…?”
“그럼. 그 녀석도 너 같이 착한 녀석하고 사는 편이 훨씬 행복할 거야.”
그녀는 끙끙거리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요… 해볼게요.”
좋아, 여전히 멍청하군.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바로 옆방으로 건너갔다.
“아… 못 들어가게 막아뒀네요.”
“뭐?”
문고리에 손을 댄 미리는 태연하게 그렇게 말했다.
“어, 그게… 문 사이가 흙 같은 걸로 막혀있는데요.”
유니구나.
무엇인지까지는 몰라도 무언가 이상한 냄새는 맡았던 것이다.
“음, 저희들은 조금 멀리서도 가능하기는 한데….”
“나는 못 데려간다고?”
“네….”
그녀에게 듣기로 상대의 꿈을 유도하기 위해 굳이 신체적 접촉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가끔 자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원거리 조작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그녀에게 있어서 이건 딱히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제3자에게 꿈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체적 접촉이 필요하다는 점.
꿈에 들어가서 직접 망쳐놓으려던 나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소식이다.
“그럼… 나 대신 네가 좀 수고해야겠다.”
“네?”
나는 그녀에게 간단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미리는 이제 용사에게 악몽을 꾸게 할 것이다.
단 둘이서 행복하게 살던 삶이, 사실은 불행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꿈을.
믿고 싶지 않았던 유니의 불륜을 꿈에서 목격한 그는 최악의 타이밍에 눈을 뜰 것이다.
옆방에서, 유니를 무척이나 닮은 누군가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내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 잠든 그녀들 옆에 유니가 다리를 꼬고 거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는 하셨나요? 오늘은 저번처럼은 되지 않을 거예요.”
유니, 루엘라는 달빛을 맞으며 매력적인 웃음을 띠었다.
그래, 이 거만한 년을 따먹을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