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438화 (437/438)

〈 438화 〉 촬영하는 화요일 (3)

* * *

“너시험 끝났다 했나?”

백도영이 걸어가면서 물었다.

“네. 오늘이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에요.”

“그래.”

백도영이 조금 남은 소시지를 한입에 넣어 우물거리면서 성큼성큼 걸어 말없이 벤치에 앉았다. 내가 먼저 꺼낼 말은 없었다. 백도영이 커피 컵을 내려놓고 왼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내 입을 닦더니, 두 번 접어서 그걸로 꼬치 작대기도 닦은 다음 휴지랑 작대기도 컵 옆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저기 푸드트럭 가지고 온 셰프분, 네 친한 친구 어머니라시던데, 맞아?”

백도영이 휴지를 밑에 깔아 비스듬히 세워진 작대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네.”

백도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정확히 어떤 분인데?”

“저 학폭위 한 번 열렸잖아요. 그때 그 당사자, 그니까 성연이의 어머니예요.”

“... 내가 지금 이해가 안 되거든. 피해자 어머니가 너한테 푸드트럭 조공을 한다고? 그것도 자기가 직접 오면서까지?”

조공이라니. 어감이 이상해도 한참 이상했다.

조공이라면 연예인한테 팬이 음식이나 음료를 지원해주는 거일 텐데 아직 데뷔도 안 한 내가 연예인인 것도 아니었고, 강예린이 내 팬일 리도 만무했으니 이건 조공도 뭣도 아니었다.

“조공은 아니에요. 그냥 고맙다고 오신 거예요.”

“뭐가? 추궁하는 건 아닌데,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게... 성연이랑 제가 서로 잘못한 바가 있는데, 성연이가 어머니랑 같이 학폭위 때 다소 무리하게 밀어붙여서, 저 학교 못 나올 때 다른 애들이 성연이를 조금 기피했대요.”

“은따를 당했다?”

“제가 본 건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비슷하게 했을 거예요.”

“응. 그래서.”

“그래서 성연이는 위축되고, 어머니는 그 모습 보고 걱정하셨을 거예요. 저랑 사이 원만하게 하는 게 성연이가 원래대로 돌아오게 할 방법이었죠. 그리고 처음에는 성연이가 저한테 패드립쳐서 잘못했다는 것도 알게 돼서 개인적으로 저한테 미안한 감정도 가졌을 거예요.”

“그럼 저분이 애초에는 자기 딸이 맞았다는 것만 알고 너 매장하려고 했다가 오히려 딸이 따돌려지고, 자기 딸한테도 잘못 있었다는 거 알고 너한테 사과했다는 거야?”

“네. 그 뒤로 성연이랑 화해하고 확실히 개선됐어요. 그리고 고맙다고 이렇게 와주신 거고요.”

백도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전에도 온 적 있다는데 몇 번 온 거야?”

“한 번요.”

“며칠 만에 또 온 건데?”

“토요일에 왔으니까 이틀만이네요.”

“... 따님이 매우 소중하신가 보네.”

“그런 거 같아요.”

“그래.”

백도영이 옆에 뒀던 휴지랑 꼬치를 왼손에 쥐었다.

“그 딸은 좋겠다. 어머니가 셰프라 요리도 잘하시니까.”

“그리 자주 먹지는 못할걸요. 음식점도 여럿 있어서 운영하느라 바쁘셔가지고.”

“백종원처럼?”

“그 사람보단 적겠죠. 프랜차이즈 사업하시는 거 같진 않으니까.”

“넌 일 너무 많이 벌여놓지 마. 피곤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주어진 시간이 길지만은 않으니 안 그래도 중요한 일들에 최대한 집중할 생각이었다.

“근데 왜 지수야?”

백도영이 나직이 물었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비수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가슴이 쿡 찔리는 느낌이었다. 짐짓 모르는 척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보니까 학교에 최근에 데뷔한 아이돌 멤버도 있고, 네 주변에 괜찮은 애 많은 거 같은데. 왜 우리 동생이냐고. 따지는 건 아냐. 진짜 순전히 궁금해서.”

“...”

양심이 가책해왔다. 연인의 가족 구성원 앞에서 내가 감히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면 심장이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선우의 부모님은 무슨 낯으로 뵈어야 할까. 낯이 차츰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좀 부담되면 말 안 해도 돼.”

백도영이 말했다. 내 얼굴이 붉어진 걸 보고 부끄러워하는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고개를 저었다. 느낌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지수랑 같이 있을 때 가장 마음이 놓여요. 제가 많이 불안정한데, 언뜻 내비칠 때마다 다 받아주고 다독여주고... 그렇게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줘요.”

“어... 너는 반대로 걔한테 어떤데?”

지수한테 나는 어떤 존재일까. 순간적으로 지수가 잭콕을 입에 머금고 키스해오며 넘겨줄 때가 떠올랐다. 지수는 다른 사람한테 나를 뺏길까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다른 사람의 남자였고, 넘겨줘서는 안 될 소유권을 지수에게도 주었다. 아마 그날부터 나는 내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리우며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어왔던 것 같았다.

“내버려 두기 힘든 애일 거 같아요.”

“뭔가 되게 많은 의미가 함축된 거 같다?”

“별 뜻 없어요.”

“음... 아무튼 잘해.”

“네.”

백도영이 양손에 커피 컵이랑 휴지, 작대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제는 난 안 오고 커피차만 보낼게.”

“안 보내주셔도 돼요.”

“됐어. 걍 받아.”

“감사해요.”

“그래. 근데 말만 이렇게 하고 불시에 또 올 수도 있는 건 알지?”

“이제 알았네요.”

백도영이 픽 웃더니 얼음이 다 녹아 연해져 버린 커피를 한숨에 다 빨아 마셨다.

“너 방금 나한테 말한 거 있잖아, 지수한테도 평소에 그런 얘기해?”

“했는지 안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안 하면 해. 어색해도 꾹 참고. 담아만 두면 그대로 비밀인 채니까 상대는 알 수가 없어.”

“네.”

“가자.”

“네.”

일어나서 백도영이랑 나란히 걸었다. 교문 뒤편에 수아랑 정시은, 그리고 강예린이 여전히 있었다. 백도영이 만나서 반가웠다고 하고 자기는 일 때문에 먼저 가보겠다 했다. 다 같이 작별인사를 했다.

“커피차 감사해요!”

정시은이 말했다. 발을 옮기던 백도영이 몸을 돌려 턱짓을 해 나를 가리켰다.

“온유 보고 고맙다 해.”

“네!”

백도영이 다시 정면을 보고 걸어갔다. 정시은이 나를 쳐다봤다.

“고마워요 오빠.”

“어...”

“근데 왜 오빠한테 고맙다고 하라고 한 거예요?”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나도 무슨 의도로 그런 건지 몰랐다.

“그냥 형이 내 지인이라 보내준 거라서 나한테 고맙다고 하라고 한 거일걸?”

“으음... 오빠랑 그분은 어떻게 만난 거예요?”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형한테는 왜 그분이라고 해.”

“그냥 첨 보기도 했고, 뭔가 강인한? 좀 날카로운 인상이라서요...”

“으응...”

“무슨 말 한 건지 느낌 오죠.”

“어. 근데 되게 좋은 형이야.”

“왠지 그럴 거 같아요.”

수아가 내 왼 소매를 끌어 팡팡 당겼다. 고개 돌려 수아를 봤다. 표정이 어딘가 심각해 보였다.

“잠깐 따라와 봐.”

정시은이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냥 잠깐 할 말 있어서요.”

수아가 웃으며 말하고 다시 내 옷소매를 당겼다. 수아가 먼저 발을 떼 나를 옆에 오게 하고 내게 기대왔다. 교문 근처를 벗어나자 수아가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 했어?”

“그냥, 별 탈 없냐, 푸드트럭은 왜 온 거냐, 그런 궁금한 거 물어봤어.”

“그게 끝?”

“더 있긴 해.”

“음.”

수아가 멈출 기색 없이 계속 걷다가 여자 탈의실의 문을 잡고 열었다. 수아가 당연한 듯 나를 안에 밀어 넣었다.

수아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문을 닫고는 바로 잠가버렸다. 그리고는 나한테 바짝 다가붙어 나를 꼭 껴안았다.

“그래서 뭔 얘기했는데.”

수아가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다. 웃음이 나왔다. 수아만의 심술 섞인 애교가 사랑스러웠다.

왼팔로 수아를 안고 오른손으로 어깨를 넘어온 수아의 옆머리를 넘겼다. 샴푸 향이 코를 간질였다. 선뜻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아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빨리 말해.”

“... 왜 지수랑 사귀냐고.”

“그런 걸 왜 물어봐?”

“내 주변에 괜찮은 사람 많은 거 같은데 왜 지수랑 사귄 건지 궁금했나 봐.”

“완전 오빠가 골라 사귈 수 있다는 걸 전제한 물음이네?”

“그러게...”

“모르는 척.”

“아냐.”

“피, 애초에 오빤 다 건드리잖아.”

“...”

반론이 불가능했다. 수아가 오른손 검지로 내 왼 볼을 콕콕 눌렀다.

“말을 못 하네.”

“죄인이라서.”

수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뭐라 했는데?”

“내가 불안정할 때 가장 지탱해준 사람.”

“그럼 나는 뭐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가 제일 사랑하는 여동생.”

수아가 치, 하고 소리 내고는 이마를 내 가슴팍에 박았다.

“개 존나 오글거려...”

말없이 수아를 끌어안았다. 수아가 고개를 들어 입술을 삐죽였다. 팔을 살짝 풀어주고 허리를 감아 입술을 맞췄다. 수아가 양손으로 내 볼을 잡고 까치발을 들어 짧게 뽀뽀했다.

“밖에서 이래도 돼?”

수아가 물었다.

“네가 해달라고 했잖아.”

“난 입술만 내밀었는데?”

“나도 입술 내밀었는데 어쩌다 맞닿은 거뿐이야.”

수아가 픽 웃었다.

“진짜 개 유치해.”

말없이 웃었다. 수아도 쿡쿡 웃었다. 괜히 별거 아닌 못된 짓을 하고 안 보이는 데 숨어들어서 서로를 놀리는 어린아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이제 슬슬 나가야 하지 않을까.”

내가 물었다.

“그랭.”

“근데 밖에 나갔는데 누구 있음 어떡하지?”

“나 신발 때문인가 다리 아파서 발 좀 확인하고 마사지시키려 했다고 할게.”

“응.”

“아예 지금 나 업어줄래?”

“그건 좀 과하지 않을까.”

“그냥 해줘.”

“알겠어.”

무릎을 굽히고 등을 내줬다. 두 가느다란 손끝이 내 목 양옆을 간질였다. 목을 움츠렸다.

“하지 마.”

수아가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두 팔이 내 목을 감아오고 가슴이 부드럽게 짓눌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일부러 더 야하게 붙어오는 듯했다.

바닥을 밀 듯이 일어나고 두 팔로 수아의 허벅지를 걸어 고정했다. 수아가 내 왼 어깨에 턱을 얹고 입술로 귀를 우물거렸다.

“진짜 혼날래?”

수아가 히히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작은 숨이 간지러웠다.

“밖에서 세우면 안 돼.”

수아가 공기를 많이 섞어 속삭였다. 웃음이 나왔다.

“너 집에서 봐.”

“응.”

한마디 대답까지 요망했다. 수아가 왼손으로 내 귀에 살짝 묻은 침을 닦아냈다.

집에 가면 누가 위고 아래인지 제대로 알려줘야 할 듯했다.

K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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