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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420화 (419/438)

〈 420화 〉 이준권 장례식 (8)

* * *

입구로 고개 숙인 여자가 홀로 들어왔다. 검은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은 게 수아나 내 또래는 아닌 듯했다. 여인이 무릎을 굽히고 발뒤꿈치 쪽을 잡아 왼발부터 구두를 벗은 다음 오른손으로 구두를 잡고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딘가 낯익었다. 여인이 손을 모은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얼굴을 봤는데 정지연이었다. 정지연이 명부에 이름을 적고 분향한 뒤 영정에 두 번 절했다. 그러고 우리랑 맞절했다. 정지연이 윤가영에게 두 발짝 다가갔다. 살짝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정지연이 깊이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지연의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윤가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정지연이 무릎을 꿇으려 했다. 윤가영이 정지연의 상체 양옆을 다급히 붙잡았다.

“일어나세요...”

“네...”

“지연 씨 잘못이 아니에요... 자책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지연이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아마 미안하다거나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가 윤가영이 자책하지 말라고 해서 도로 삼킨 듯했다. 윤가영이 정지연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정지연이 윤가영을 마주 안았다.

“제가 위로해드려야 하는데...”

“와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돼요...”

정지연이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송구함이 전해져왔다. 무언이 때로는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뜻을 잘 담아낼 수 있구나 싶었다. 윤가영이 정지연을 놓아줬다. 정지연이 시선을 낮춘 채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차마 나랑 눈을 마주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미안해 온유야...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니 한 번 정도 상상해봤으니까 예상을 못 했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야... 미안...”

“괜찮아요... 스스로 탓하지 않으셔도 돼요...”

“...”

정지연이 다가와서 나를 안았다.

“미안해...”

말없이 정지연을 마주 안았다. 술 냄새가 났다. 정지연이 내 등을 토닥였다. 정지연이 그대로 한동안 나를 안고 있다가 팔을 풀고 수아를 안았다. 수아가 정지연을 마주 안고 등을 다독였다. 금방 윤가영이 정지연을 달래던 모습이랑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수아가 조금 더 귀엽다면 윤가영은 약간 더 성숙한 느낌이었다는 거였다.

정지연이 수아를 놓아줬다.

“밥 드시고 가세요.”

윤가영이 말했다. 정지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지연이 물러나고는 혼자 외딴 자리에 앉았다. 뒷모습을 보는데 느낌이 청승맞았다. 윤가영도 정지연을 보다가 고개 돌려 나랑 수아를 바라봤다.

“엄마 잠깐만 가볼게.”

“응.”

수아가 답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요.”

“응.”

윤가영이 정지연한테 가 옆자리 의자를 꺼내 앉았다. 정지연이 고개 돌려 윤가영을 봤다. 정지연이 입을 열었는데 주변 소음이 섞여서 잘 들리지 않았다. 정지연이 목소리를 작게 내는 것도 있었다.

고개 돌려 수아를 봤다. 수아가 나를 올려봐왔다.

“왜?”

“그냥.”

“뭐야.”

“왜.”

“이상하니까.”

“뭐, 그냥 볼 수도 있지.”

수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귀여웠다. 살짝 심술난 듯한 볼을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수아가 벽에 등을 붙였다가 입구 쪽을 보고 바닥에 풀썩 앉았다. 따라 앉고는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하품했다.

“졸려?”

고개 저었다.

“근데 왜 하품해?”

“몸이 피곤한가 봐. 카페인 많이 마셔서 당장 잠 오거나 하는 건 아냐.”

“응.”

“반응이 너무 싱거운데.”

“그럴 수도 있지.”

뭐지. 복수하는 건가. 수아가 왼손으로 얼굴을 감싸먄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손이 가리지 못한 부분으로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혼내주고 싶었다. 오른손 검지로 수아의 옆구리를 톡 건드렸다. 수아가 흠칫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럴래?”

“내 맘.”

“씨...”

수아가 왼손 검지로 내 옆구리를 찌르려 들었다. 오른손으로 마중을 나가서 검지를 막았다. 수아가 손가락을 뒤로 빼려 했다. 쭉 따라가서 손가락을 붙잡고 있다가 중간에 놓아줬다. 수아가 다시 내 옆구리를 노려왔다. 이번에는 막지 않았다. 수아의 검지가 내 오른 옆구리에 닿았다. 딱히 간지러운 느낌도 잘 안 들었다.

“오빠는 왜 반응이 별로 없어?”

“잘 안 간지러우니까?”

“왜 간지러움을 안 타?”

“몰라. 나도 비슷하게 탈걸. 네가 안 간지럽게 찌른 거 아냐?”

“여기서 진심으로 찌를 순 없으니까.”

“으응.”

“...”

수아가 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내 오른 허벅지에 왼손을 얹었다. 뭐 하려는 건지 감이 안 왔다. 수아가 내 오른 허벅지를 주물렀다.

“딴딴하네.”

“응.”

“응이 뭐야.”

“맞으니까.”

수아가 픽 웃었다.

“재수없어...”

마주 웃었다. 수아가 왼손을 뒤집어 손등이 내 허벅지에 닿게 하고 손바닥을 내보였다. 오른손을 올렸다. 수아가 깍지를 꼈다. 뭔가 하면 안 될 짓을 하는 느낌이었다. 살짝 목덜미가 뜨거워지는 듯했다. 수아가 왼손을 죔죔거렸다. 애 같은 움직임이었다.

“오빠 손 되게 크다.”

“네 손이 작은 것도 있어.”

“여자니까.”

수아가 손을 쫙 펴서 내 오른손을 놓아줬다.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수아가 왼손을 도로 뒤집어서 내 허벅지에 손바닥을 댔다.

“오빠 내 손 위에 손 대봐.”

“어.”

수아의 왼손등에 오른손을 포갰다. 수아의 손이 가려졌다. 엄지가 가린 새끼손가락만 빼꼼 나와있을 뿐이었다.

“새끼손가락만 보이네.”

“크기 비교를 하려면 내 손 위에 네 손을 올렸어야지.”

“그냥 아예 안 보일 정도로 덮여지나 보려 한 거야. 손 빼봐.”

“응.”

손을 도로 들었다. 수아가 내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고 아래로 내리려 했다. 내려가줬다. 오른손이 허벅지에 맞닿았다. 수아의 작은 왼손이 내 오른손을 가리다가 말았다. 내 손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씩은 컸다.

수아가 손을 뗐다가 붙이면서 내 오른손등을 탁탁 쳤다. 고개 들어서 수아의 얼굴을 봤다. 무표정했다. 여간 심심한 게 아닌 듯 보였다.

수아가 왼손을 들고 입을 가리더니 하품했다. 눈물이 맺혀서 수아가 손등으로 훔쳤다.

“졸려?”

“조금.”

“커피 가져다줄까?”

“응.”

“카페인 많은 거로?”

“그냥 적당한 거.”

“응.”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료수 냉장고 앞으로 가 내가 마시던 거랑 수아가 마실 커피를 꺼내 돌아가서 다시 주저앉았다. 수아가 양손으로 커피를 받았다.

“고마워.”

“응.”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수아가 뚜껑을 열고 커피를 홀짝이다가 나를 쳐다봤다.

“오빠는 올 사람 다 온 거야?”

바로 고개 저었다. 줄곧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수아가 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커피 뚜껑을 덮고 양손으로 바닥을 짚어 일어나려 했다.

“저 분들?”

분들은 아닌데. 아무튼 또 누가 왔구나.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쪽을 돌아봤다. 강혜린이랑 유강은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녁이 지나서 유치원이 끝난 거구나. 둘이 명부에 이름을 적고 영정에 절한 뒤 우리랑 맞절했다. 강혜린이 나한테 걸어와서 와락 끌어안았다. 커다란 가슴이 느껴졌다.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몸에 육박해오는 느낌이 대단했다. 강혜린이 나를 짧게 안았다가 놓아주고 양손으로 내 팔을 붙잡은 채 눈을 마주쳐왔다.

“괜찮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혜린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봤다.

“그런데 새어머니는 어디 계셔...?”

“지인 분이랑 잠깐 얘기하시는 중이에요. 저기 있어요.”

왼손바닥을 내보이며 방향을 가리켰다. 강혜린이 그쪽을 봤다가 도로 나를 봤다.

“저녁은 드시고 오신 거예요?”

“응... 강은 쌤도 먹었어.”

“음료수 한 캔이라도 괜찮으니까 조금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알겠어.”

강혜린이 나를 넘어가서 수아를 안았다. 유강은이 나를 안았다. 등이 토닥여졌다.

“많이 힘들죠...”

“... 괜찮아요...”

유강은이 내 등을 쓸었다.

“이럴 땐 힘들어해도 돼요...”

“... 네...”

유강은이 잠시 나를 다독이다가 포옹을 풀고 내 양팔을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유강은이 쓸쓸한 눈웃음을 짓고 내 팔을 토닥였다.

“힘들거나 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평일도 괜찮으니까.”

“감사해요...”

“네...”

유강은이 손을 내리고 수아한테 가 포옹했다.

“나한테도 연락해도 돼 온유야.”

강혜린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요...”

“아냐. 크게 도움 되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와주신 것만으로 큰 위로예요.”

강혜린이 빙긋 웃었다.

“응... 고마워.”

왼편에서 윤가영이 걸어와 내 옆에 섰다. 윤가영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 숙였다.

“안녕하세요.”

강혜린이랑 유강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주 목례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새어머니시죠...?”

유강은이 말했다.

“네에... 두 분은 선생님이세요...?”

“네... 유치원 선생님이에요. 온유가 봉사활동 다니던 곳.”

강혜린이 답했다.

“아아, 네... 식사는 하고 오신 거예요?”

“네. 먹고 왔어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네.”

강혜린이 윤가영한테 다가가 포옹했다. 윤가영이 눈을 크게 떴다가 강혜린의 등을 토닥였다. 강혜린이 윤가영을 놓아주자 유강은이 윤가영을 안았다.

두 유치원 선생님이 식탁 쪽으로 갔다.

먼발치에 있던 정지연이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내 앞에서 멈춰섰다.

“장례식 끝날 때까지 같이 있어줄까 온유야...?”

고개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감사해요.”

“응... 나중에 기자 필요하면 연락해 온유야.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내가 다 도와줄게.”

“네. 감사해요.”

“...”

정지연이 나를 끌어안았다.

“아냐... 내가 더 고마워.”

“네...”

정지연이 포옹을 풀고 수아랑 윤가영도 한 번씩 안았다.

“갈게요.”

“네. 안녕히 가세요.”

윤가영이 말했다. 이수아가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내가 말했다. 정지연이 응, 이라고 답했다.

“다음에 봐...”

“네.”

정지연이 돌아서서 걸어가 구두를 신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기자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수아가 물었다.

“그냥 별 얘기 안 했어... 너무 미안하실 필요 없다, 이런 말만 했어.”

“으응...”

입구가 웅성거렸다. 또 사람들이 왔다. 이준권 연령대의 남자 무리였다. 가까워졌을 때 고개를 꾸벅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맞절을 했다. 위로를 듣고 식사를 하시라고 했다. 이준권의 지인들이 식탁으로 갔다. 조금 피곤했다. 내일은 아마 오늘보다 더 사람이 올 텐데 어떡하나 싶었다.

어느새 밥을 다 먹었는지 강혜린이랑 유강은이 다시 왔다. 유강은이 먼저 나를 안고 다음으로 강혜린이 포옹해왔다.

“다음에 봐 온유야.”

강혜린이 말했다.

“다음에 봐요 온유 쌤.”

유강은이 이어 말했다.

“다음에 봬요.”

내가 답했다. 강혜린이랑 유강은이 수아랑 윤가영하고도 인사하고는 장례식장을 떠났다. 수아가 둘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입을 열었다.

“예쁜 선생님들이네.”

수아가 나를 올려봤다. 뭔가 찔렸다.

“근데 한 분은 약간 낯ㅇ이 익은데 누구랑 자매거나 한 거야?”

“응. 유치원 원장 쌤이 성연이 어머니 동생분이야.”

“딸이랑 같이 왔던 그분하고 가슴 큰 선생님이 자매라고?”

“... 응.”

수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진짜 어떻게 선생님들도 예쁜 거야.”

글쎄. 나도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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