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2화 〉 기 싸움 (1)
* * *
택시에서 내리고 여늬 카페로 들어갔다. 둘러봤는데 윤가영이랑 이수아는 안 보였다. 아직 도착을 안 한 듯했다. 지수한테 전화 걸었다. 금방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왜.
“나 지금 여늬 왔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ㅡ없어.
“그럼 선우는?”
ㅡ기다려 봐.
이온유가 여늬에서 뭐 사올까라고 묻는데, 라고 지수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딱히 없어, 라고 선우가 답하는 소리가 바로 넘어왔다.
ㅡ없대.
“응.”
ㅡ빨리 와.
“알겠어. 아직 안 와서.”
ㅡ어. 끊을게.
“응.”
전화가 끊겼다. 이수아한테 전화걸었다. 바로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응.
목소리가 담담했다. 당황을 안 한 건지 아니면 긴장해서 굳어버린 건지. 뭔지는 몰라도 귀여웠다.
“지금 택시야?”
ㅡ응. 가고 있어.
“뭐 주문해놓을까? 먹고 싶은 거 있어?”
ㅡ음... 나 점심 안 먹었는데.
“그니까. 나도 아직 안 먹었어.”
ㅡ그럼 거기 샌드위치 같은 거 있어?
“있어. BLT 샌드위치.”
ㅡ으음. 좀만 생각해보고.
“응. 그, 어머니는?”
뭔가 이렇게 말하니까 간지러웠다.
ㅡ물어볼게.
“응.”
ㅡ엄마 카페에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ㅡ음... 딱히 없는데...?
ㅡ엄마도 점심 안 먹었잖아.
ㅡ응... 그래두 엄청 배고프지는 않고, 샌드위치 같은 거로 해결하기보다는 든든하게 먹고 싶어서.
ㅡ으응... 알겠어. 그럼 커피 같은 건?
ㅡ난 그냥 핫초코?
ㅡ응. 오빠.
“어.”
ㅡ엄마는 핫초코 먹는데.
“너는?”
ㅡ음, 아이스 바닐라 라떼.
“알겠어.”
ㅡ응.
“끊어.”
ㅡ알겠어.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수아랑 가영 거만 사는 건 조금 아니다 싶은데. 일단 사두는 게 좋을 듯했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잔이랑 핫 아인슈패너 한 잔, 핫초코 두 잔을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다. 현금으로 결제했다. 영수증은 버려달라고 했다.
창가 쪽 1인석에 앉아 문만 바라봤다. 뭔가 불안했다. 그렇다고 폰을 보면서 긴장감을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빨리 음료가 만들어지고 가영이랑 수아가 왔으면 했다. 그럼 바로 지수 별장으로 들어가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른손 검지로 괜히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면서 소리는 안 나게 신경 썼다. 조금은 주의가 분산되는 느낌이었다. 왠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다 이준권 때문이었다. 진짜 하필이면 왜 오늘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람을 이렇게 심란하게 하는 걸까. 생각할수록 사람을 신경쇠약에 걸리게 하는 데 특화된 것만 같은 인간이었다.
“테이크 아웃 주문하신 손님.”
사장님 목소리였다. 의자에서 내려가 카운터로 걸어가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컵이랑 핫초코 두 컵이 든 커피 캐리어를 오른손으로 들고 왼손으로 핫아인슈패너가 담긴 단일 캐리어를 들었다. 왼쪽 팔로 문을 밀면서 카페를 나섰다. 카페에서 조금 옆으로 비켜서서 도로를 봤다. 가슴이 졸여졌다. 왠지 모르게 발가벗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빨리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개인적인 공간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만지작거릴 즈음에 시야에 택시가 들어왔다. 이쪽으로 오는 게 느낌이 좋았다. 어느새 가까워진 택시가 카페 앞에 멈춰섰다. 뒷문이 열리고 수아가 먼저 나왔다. 중학교 교복 차림이었다. 이준권이 생각 외로 장시간 집에 있을 경우 학교도 가야 할지 모르니 입은 듯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수아랑 눈이 마주쳤다. 절로 눈웃음이 지어졌다. 수아한테 다가가서 양손을 내밀었다. 수아가 나를 쳐다봤다가 커피 캐리어를 양손으로 받았다. 자유를 찾은 두 손으로 트렁크를 열었다. 캐리어가 세 개 들어있었다. 수아가 왼편에 서서 입을 열었다.
“다 꺼내. 내 거랑 엄마 거야.”
“응.”
캐리어를 다 꺼냈다. 계산하고 내린 건지 뒤늦게 나온 윤가영이 내 오른편에 와서 캐리어 두 개를 양손에 잡았다. 뒤로 물러나서 트렁크를 닫았다. 이수아가 나한테 커피 캐리어를 내밀어왔다.
“하나만 들어줘.”
“응.”
수아가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컵이랑 핫초코 두 컵이 담긴 커피 캐리어를 내밀었다. 피식 웃고 오른손으로 받았다. 수아가 왼손으로 캐리어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윤가영을 바라봤다.
“바로 가죠.”
수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바로?”
“응.”
“... 알겠어.”
무표정한 얼굴에서 묘한 긴장이 읽혔다. 수아로서는 지수랑 선우를 처음으로 보는 거니까 조금 굳을 만도 한 것 같았다. 게다가 만나는 것도 꽤 급작스럽게 결정된 거니 마음의 준비도 덜 되었을 터였다.
“떨려?”
“아니. 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수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미치도록 귀여웠다.
“가기나 하라니까.”
“알겠어.”
지수 별장 쪽으로 걸어갔다. 왼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 열쇠를 꺼냈다. 대문이랑 현관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벗는데 집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온유 온 건가?”
“그런 거 같애.”
지수랑 선우 목소리였다. 거실 소파에 있던 모양이었다. 유리문을 열고 커피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수아랑 윤가영의 캐리어를 문 안으로 넣었다. 코너에서 지수랑 선우가 같이 나타나더니 그대로 멈춰섰다.
“이온유.”
지수 목소리가 살짝 싸늘했다.
“응.”
“뭐해. 일로 와.”
“응.”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신발을 벗은 윤가영이랑 이수아가 현관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수아한테 왼손을 뻗었다.
“커피 줘.”
“응.”
왼손으로 핫아인슈패너가 담긴 커피 캐리어를 잡았다. 다시 몸을 돌려 지수랑 선우한테 다가갔다.
“커피랑 핫초코 사왔어.”
“... 뭐 뭐 뭐인데.”
“왼손에 든 거는 아인슈패너고 오른손 커피 두 개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개는 핫초코.”
“누구 마시라고?”
“마시고 싶은 사람 마시라고.”
“...”
“일단 커피 캐리어 나한테 줘 온유야.”
선우가 말했다.
“으응.”
양손을 뻗어 커피 캐리어를 넘겼다. 양손으로 받은 선우가 거실 쪽으로 걸어갔다.
지수가 내 뒤쪽을 봤다. 위아래로 빠르게 훑는 게 수아랑 윤가영을 스캔하는 듯했다.
“저희 들어가도 돼요?”
수아 목소리였다. 느낌이 살짝 날 서 있었다. 고개를 돌렸다. 수아 뒤에 선 윤가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은 채 양손으로 수아의 양팔을 잡고 있었다. 다시 지수를 바라봤다. 지수가 입을 열었다.
“들어와. 들어오세요.”
뒷말은 윤가영을 보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
수아랑 윤가영이 뒤에서 유리문 안으로 걸어들어와 내 옆에 멈춰 섰다. 정확히 말하면 수아가 내 왼편에 서고 윤가영은 수아의 왼편에서 살짝 뒤에 섰다.
선우가 돌아와서 지수의 뒤에 서 지수를 안았다. 지수가 나를 쳐다봐왔다.
“근데 이름 안 알려줄 거야?”
“이수아예요. 여기는 우리 엄마 윤가영이구요.”
수아가 말했다. 지수가 말없이 이수아를 바라보다가 윤가영을 봤다.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나 서른둘... 수아는 중학교 3학년이야.”
“열여섯이에요?”
“응...”
답하는 목소리가 작았다. 많이 위축된 듯 보였다. 아무래도지수의 기에 눌린 듯했다. 아무리 잘못을 했어도 열네 살이나 차이 나는 여자애한테 이렇게나 짓눌린다니. 진짜 봐도 봐도 어리고 귀여운 여자였다.
근데 윤가영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데 언제 얘기를 꺼내야 할까. 지수가 되게 화나 있는 것 같아서 당장은 말하기 어려울 듯했다. 최소한 내일은 되어야 말할 수 있게 될 거 같았다.
지수가 쯥, 하고 소리 냈다. 윤가영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이수아가 입술을 찡그렸다. 지수가 나를 쳐다봤다.
“이온유.”
“응.”
“나 배고파. 밥해줘.”
“알겠어.”
“다하고 불러.”
“응.”
“가자 선우야.”
“그랭.”
지수를 뒤에서 안은 선우가 뒤뚱뒤뚱 걸어 함께 뒤돌아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느낌상 둘이 연합하고 가영이랑 수아를 견제하려는 듯했다. 수아가 뒤로 가서 캐리어를 양손에 잡았다. 나도 뒤늦게 가서 수아의 손에서 캐리어를 하나 가져가고 바닥에 놓인 캐리어도 한 손에 들었다. 윤가영이 나한테 붙었다.
“내가 하나 들게 온유야...”
“아뇨 괜찮아요.”
“으응...”
수아랑 같이 캐리어들을 거실로 가져가 구석에 놓았다. 허리를 바로 편 이수아가 윤가영을 바라봤다. 키는 비슷한데 윤가영이 조금 움츠러든 느낌이 있어서 키 차이가 약간 나 보였다.
“엄마 왜 이렇게 기죽어 있어?”
“일단 여기서 신세 지는 거니까...”
“그건 그래도 너무 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수준으로 저자세 취하면 낮볼 거 아냐.”
“으응...”
수아가 콧숨을 내쉬었다. 윤가영이 말없이 나를 올려봤다. 도움을 청하는 느낌이었다. 존나 귀여웠다. 살폿 웃었다.
“밥하는 거 도와줄래요?”
“응...!”
“나는 뭐해?”
수아가 물었다.
“캐리어에서 정리할 거 있으면 해줘.”
“딱히 없어. 거의 옷 챙기고 한 거라서.”
“그래도 일단 정리하고 와줘.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할게.”
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윤가영이랑 같이 주방으로 갔다. 오른손으로 냉장고 문을 잡은 순간 왼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폰을 꺼냈다. 저장은 안 되어 있지만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 그러니까, 이준권 번호였다.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쾌감이 척수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폰을 비행기 모드로 돌리고 주머니에 폰을 넣었다.
“누구예요?”
“그 사람이에요.”
“아...”
윤가영의 이마에 입술을 쪽 맞췄다.
“아무 걱정하지 마요.”
윤가영이 배시시 웃었다.
“네...”
마주 미소 지었다. 기분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