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 월요일, 귀가 후 (2)
* * *
왜 이리 안 오지. 그 생각을 하고 얼마 안 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봤다. 흰 민소매랑 회색 돌핀팬츠를 입은 이수아가 걸어 들어왔다. 민소매로 유두 대신 검은 브라가 비쳐보였다. 당연한 거인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냥 다행이라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면서 오른손을 들어서 대본집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주변 시야로 이수아가 두 팔로 가슴을 감싸는 게 보였다.
“또 가슴 본다.”
무시할까. 고민스러웠다. 답을 안 하면 무언의 긍정이라고 하려나. 굳이 침묵할 이유도 없으니 말을 해야 할 듯했다. 입을 열었다.
“너 브라 안 입은 거 때매 그러잖아.”
이수아가 침대에 걸터앉고 자기 대본집을 오른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침대를 짚어서 몸을 왼쪽으로 틀어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변태 같아. 아니 변태 맞나?”
“또 내쫓길래?”
“싫어.”
이수아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확고한 의지 표명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이수아가 옆으로 누워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순간 이수아의 살내음이랑 샴푸향이 풍겨왔다. 왜 안 오나 했는데 빠르게 씻고 온 모양이었다. 지금 보니 머리카락도 약간 촉촉했다.
화장기 없이 옅게 붉은 이수아의 입술이 열렸다.
“오빠.”
또 연습 안 하고 말장난이나 걸려고 하는 건가.
“뭐.”
“오빠 갑자기 말투가 왤케 공격적이야.”
“연습 안 하고 말장난하려는 거 같아서.”
“흐응.”
이수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말 좀 섞어줄 수 있는 거 아냐? 오빠면서.”
오빠. 오빠. 맨날 오빠라고 부르면서 나한테 하는 짓이나 요구하는 건 거의 다 남자친구한테 할 법한 것뿐이었다. 이수아는 혈육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과 연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의 교집합을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내 인내심을 긁어내고 내가 선을 넘도록 끌어들이려 하는 느낌이었다.
돌이켜보면 이수아랑 같이 있으면 같이 있을수록 점점 더 이수아한테 말려들었다. 평소에는 은근히 몸매를 드러내면서 내가 이수아를 여자로 의식하게 했고, 대본 리딩하러 간 날에는 키스신을 연습해야겠다면서 먼저 입술을 맞대는 걸 요구해 와서 뜻하는 바를 다 성공적으로 이뤄냈으니까. 아까는또 노브라로 나타나서 가슴으로 나를 성적으로 자극해와서 딸치고 싶은 마음이 들게까지 했으니 이제는 거의 마음이 이수아한테 조종당하는 수준이었다.
이수아가 나한테 수작을 걸 수 없게 하려면 아예 이수아랑 대면하지 않는 시간을 늘려야 할 거였다.
“내 말 무시할 거야?”
“응.”
“우 씨...”
픽 웃었다.
“나 그거 입 밖으로 소리 내는 사람 처음 봐.”
“뭐? 우 씨 한 거?”
“어.”
“그게 왜?”
“아니 그냥 좀 비일상적이잖아.드라마 같은 데에서나 쓸 거 같고.”
“근데 난 쓰거든.”
“어.”
이수아가 콧숨을 내쉬었다.
“뭐 맘에 안 들어?”
“응.”
“뭐가.”
“단답하는 거. 나랑 아예 말하기 싫은 사람 같잖아.”
“그건 맞긴 해.”
“뭐어?”
이수아가 왼손으로 내 가슴팍을 팍 때렸다. 오른손으로 이수아가 때린 곳을 감쌌다.
“아 뭐하냐.”
“때렸어.”
“왜.”
“괘씸해서.”
“뭐가.”
“오빠 말하는 거 개 얄밉게 하잖아.”
“너한테 배웠어.”
“아 진짜.”
이수아가 왼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 소리를 냈다.
“너무 열받아...”
“응.”
“아하아...”
한숨 섞인 소리가 억지스럽지 않았다. 진짜 짜증 난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쾌감이 느껴졌다. 입꼬리가 올라갈 것 같았다.
이수아가 입을 열었다.
“오빠 지금 개 초딩 같은 거 알아? 막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고 하는 그런 애.”
“아닌데.”
“아닌 게 아닌데.”
“응 아니야.”
이수아가 피식 웃었다.
“아 진짜, 맞춰주기 힘들다. 개 유치해 가지구.”
“내가 맞춰주는 거거든.”
말을 하자마자 이러다 자꾸 실없는 소리만 계속하게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대본 연습 안 할 거지.”
“아니? 할 건데?”
“... 근데 진짜그냥 하루는 쉬어도 되지 않아?”
“쉬어서 뭐하게?”
“걍 폰이나 하다가 자는 거지.”
이수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마인드로 하면 다른 배우분들이랑 스태프분들한테 민폐인 거 몰라?”
맞는 말이기는 했다.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왜?”
“너 내 방 와서 한 거 장난친 거밖에 없잖아.”
“그건 잠깐이잖아. 이제 연습할 거야.”
“해 그럼 빨리.”
“응.”
이수아가 대본집을 오른손으로 잡고 위로 들어 양손으로 받쳤다.
“누워서 하게?”
“앉을까?”
“눕는 건 좀 아니지.”
“알겠어.”
이수아가 허리를 세우고 엉덩이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들었다 내려서 뒤로 왔다. 그러고는 침대 머리 쪽에 베개를 대고 등을 붙였다.
“오빠도 일어나.”
“어.”
상체를 들었다. 이수아가 내가 벴던 베개를 잡아 자기 옆쪽에 세웠다. 나도 이수아랑 똑같이 등을 붙였다. 대본으로 시선을 던지는데 자꾸 이수아가 신경 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소매 때문이었다.
“근데 너 차라리 교복 입음 안 되냐? 몰입이 안 되는데.”
이수아가 히 웃었다.
“응, 싫어.”
“그럼 안 해.”
베개를 침대에 대면서 그대로 아래로 가 드러눕고 이수아를 등졌다. 몸 오른편에 대본집을 내려놓았다. 뭔가 하는 짓이 되게 유치해진 느낌이었다. 다 이수아 때문이었다.
“오빠 진짜 안 할 거야?”
“응.”
“으음...”
등 뒤쪽에서 매트리스가 흔들리면서 눌리는 느낌이 났다. 동시에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이상했다. 이윽고 얇은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등으로 꽤 큰 가슴이 짓뭉개져 오는 게 느껴졌다. 목줄기가 서늘해졌다.
“아 하지 마라.”
히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같은 장난기가 있는데 요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순수하게 야한 느낌이었다. 이마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살짝 혼미했다.
“왜. 꼴려?”
미친. 자지가 눈치 없이 커져 갔다. 왼손을 내려 최대한 은밀히 바지 위로 자지를 지그시 밀어 허벅지 사이로 숨겼다.
“너 진짜 방에서 내쫓기고 싶냐?”
“아니요?”
이수아가 왼손으로 내 왼옆구리를 짚고 상체를 일으켜 내 얼굴을 내려봤다. 이수아의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오빠 존나 당황했어?”
“... 나가.”
“안 돼. 할 건 해야지.”
“안 하잖아. 계속 하자 하자 말만 하면서.”
“이번엔 진짜야.”
“...”
콧숨을 내쉬었다. 이수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빠 삐쳤어?”
“뭐래.”
상체를 일으켰다. 이수아가 나를 보다가 두 손으로 침대를 짚으면서 뒤쪽으로 물러가 다시 침대 머리에 둔 베개에 등을 기댔다. 나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너 또 장난치면 그땐 진짜 연습도 안 하고 너랑 얘기도 안 한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걍 장난 안 치면 되잖아.”
“그래두. 그러기 어렵잖아.”
헛웃음이 나왔다. 이수아가 히 웃었다.
“근데 진짜 오빠 리액션 은근 좋아 가지고 장난 참기 힘들어.”
“참아.”
“알겠어. 이제 진짜 하자.”
“어.”
이수아가 대본집을 잡고 휙휙 넘겼다.
“우리 그거 할까?”
“뭐.”
“그... 아 뭐 있었는데. 까먹었다.”
피식 웃었다.
“사실 뭐 할 거 생각 안 하고 왔지.”
“아냐. 있었어. 아 그...”
이수아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아, 하고 소리 내고는 나를 쳐다봤다.
“우리 대본 리딩하다가 끊긴 부분 이어서 해보자고 하려 했어.”
“어... 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정석적인데?”
“그래서, 별로야?”
“아니. 하자.”
“어.”
이수아가 장을 도로 넘기고 대본 리딩을 하다 멈춘 부분을 펼친 다음 양손으로 꾹꾹 눌러 고정했다.
“근데 오빠.”
“어.”
“하윤이랑 윤우 있잖아.”
“응.”
“얘네 연인 되고 결말에 키스까지 다 했잖아.”
뭔가 불길한데.
“어. 근데.”
“... 그거는 했을까?”
“... 뭔 그런 질문을 하냐 하이틴 드라마에.”
“아니, 궁금할 수는 있잖아.”
“그래도 대화 주제로 삼기에는 그렇잖아.”
“왜? 할 수도 있지.”
“... 내 상식이랑 네 상식이 좀 동떨어진 거 같아.”
“아니 뭔. 내가 이상한 거야?”
“응.”
“아니...”
이수아가 콧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빠가 변태인 거 아냐?”
“생각을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에 다다라?”
“막 야한 얘기에 쉬쉬하고 그러는 사람이 더 밝히고 그런 거 아냐? 더 부끄럽고 그런 거 잘 아니까 오히려 선비인 척 감추고 하면서.”
“내가 그런 사람 같아?”
“... 수상한데.”
직감이 뛰어난 건가.
“뭐가.”
“몰라. 부정도 안 하고 긍정도 안 하니까 그냥 이상해. 암튼. 오빠 변태인 건 원래 아는 거니까 넘어가고.”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변탠데.”
“오빠 가슴 존나 좋아하잖아. 여동생 가슴도 막 훔쳐보고 하는데 변태 아니고 뭐야.”
“... 그렇게 막 많이 안 봤거든?”
“알겠어. 잘 안 본다고 해줄게.”
“해줄게가 아니라 진짜 안 봐.”
“뭔 소리야. 시선이 느껴지는데.”
“아니, 나 정도면 진짜 안 보는 거 맞아.”
이수아가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알겠어. 변태 아니야 오빠.”
뭔가 진 느낌이었다. 뭐라 더 말하고 싶은데 더 한다고 만족스러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이대로 넘겨야 할 듯했다. 고개를 돌려 대본집을 봤다. 이수아도 자기 대본집으로 옮겼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진짜 둘이 하지 않았을까?”
“걔들 신경 쓰지 말고 우리 할 거 하기나 하자.”
이수아가 히 웃었다.
“응.”
경쾌한 목소리를 듣는데 뭔가 속 안에서 더운 기운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입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계속 이수아한테 휘둘리면 안 되는데. 뭔가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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