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4화 〉 금요일, 기상 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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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서유은을 찾아 1학년 4반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이상한 소문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소문이 서예은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러면 서유은은 더 괴로워질 수 있을 거였다. 밴드부실을 향해 발을 옮겼다. 서유은이 오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부실 안에 들어갔다. 내가 일찍 와서 그런가, 아직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내 기타를 챙기고 품에 안은 채 의자에 앉았다. 문 쪽을 보면서 멜로디 없이 멍하니 기타 현을 튕겼다. 지금처럼 아무도 없을 때 서유은이 오면 좋은데.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한 이 상황이 답답했다.
생각해보면 서유은도 나랑 상황이 비슷할 거였다. 나한테 자꾸 접근한다는 말이 떠돌다 이번에 학교에 찾아와 잠시 강사가 된 서예은의 귀에 들어가면 문제가 생기고 말 터였다. 심약한 면이 있는 듯한 서유은은 그런 게 무서워서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일 수 있었다. 엊그제 나한테 문자로 신호를 보내고 도와달라고 청한 것도 정말 큰 용기를 낸 것일 테고. 그 이상으로 서유은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과욕이고 잔인한 짓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서유은이 힘들 때면 찾아도 되는, 그런 쉼터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서유은을 위해서도 그랬고, 지수랑 선우를 위해서도 그랬다. 서유은이 내게 지금 이상의 역할을 해달라고 청해오지 않는 이상 나는 이대로 능동적이지 못한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나도 서유은도 이렇게 수동적이기만 한다면 서유은은 언제 서예은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는 걸까. 나는 정말 이대로 서유은이 고통받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 도의적으로는 그래서는 안 될 텐데. 내가 정작 할 수 있는 건 있기나 한가.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나 없었다. 미안했다. 서유은이 도와달라고 손을 건넨 유일한 사람임에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한심했다. 나 자신이 서유은이 기대했을 것보다 더 무능한 사람이라서.
왼손으로 코드를 짚고 오른손을 움직여 아르페지오로 Karina Pasian의 Slow Motion을 치기 시작했다. 서유은이 오기만을 바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서유은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주는 것이라면 그거나마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부실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려 누가 온 건가 확인했다. 서유은이었다. 왼발만 부실 안에 걸친 채 양손으로 유리문을 밀면서 쭈뼛쭈뼛 서서는 어색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가엾고, 또 귀여웠다.
미소를 걸치고 입을 열었다.
“들어와.”
“네...”
서유은이 안에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서유은이 고개를 들어 문 위쪽을 봤다.
“잠글까?”
“아뇨...?”
서유은이 나를 바라봐왔다.
“근데 저희 좀만 더 안으로 들어가요...”
부원들이 들어오면 우리 모습을 바로는 못 보게 하고 싶은 건가.
“응.”
기타를 잡고 일어났다. 서유은이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서유은의 오른편에 앉은 다음 기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서유은이 다소곳이 양손을 허벅지 위에 올린 채 나를 올려봤다.
“뭐 하고 계셨어요...?”
“너 기다리고 있었어.”
서유은이 살폿 웃었다.
“그런 거 하지 마요오...”
“농담 아니야. 나 진짜 너 생각하고 있었어. 너 들어올 때 내가 기타로 Slow Motion 치고 있던 거 생각하면 알잖아.”
“... 그럼 진짜 저만 기다려서 여기 있으셨던 거예요...?”
“응.”
“감사해요...”
서유은이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입으로 쌔액쌔액 숨 쉬는 게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뛰어왔어?”
“아뇨... 저 좀, 추워서 그런가 봐요...”
“으응...”
서유은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귀가 보였는데, 진짜 추운 게 맞는지 색이 꽤 붉었다. 목도 조금 발그레한 듯했다. 서예은이 강압적인 면이 있던 거 같은데. 사디스트적인 경향이 있는 거 아닐까. 그럼 목이 졸리거나 하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유은아.”
“네...?”
“... 너 혹시 상처나 그런 거는 있어?”
서유은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순한 눈망울이 처연했다.
“상처요...?”
“응. 언니 때문에 생겼다거나 하는...”
서유은이 고개 저었다.
“아니에요... 언니도 저 좋아해서 막 피나게는 안 해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도 되는 걸지.
“그럼 아픈 건 있는 거야?”
“조금, 그렇긴 한데, 아픈 거보다는 힘든 게 더 커서... 근데 이 얘기는 안 하면 안 될까요...?”
서유은의 얼굴이 말하면서 점점 붉어지더니 말을 마쳤을 때는 완전히 빨개졌다. 부끄럽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배려가 부족했다.
“미안해.”
“괜찮아요... 걱정해주신 거니까...”
“응... 고마워, 이해해줘서.”
“네...”
서유은이 또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원래 이렇게 눈을 잘 못 마주치는 애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서예은 때문인 걸까. 위축되어 보이는 서유은이 불쌍했다.
“괜찮아 유은아?”
서유은이 흠칫하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봐 왔다.
“괜찮아요 오빠...”
“...”
말은 괜찮다고 해도, 그리고 서유은이 실제로 자신이 괜찮다고 믿더라도, 서유은은 괜찮지 않았다. 그걸 아는데도 나는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 긍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져 서유은의 안부를 의례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물어본 걸까. 서유은이 지금 내 생각을 읽는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착잡했다.
“오빠...”
“... 응.”
“... 저 정말 괜찮은 거 맞는데... 진짜 잠깐만 안아주시면 안 돼요...?”
“알겠어...”
두 팔을 벌려 서유은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서유은이 내 품에 이마를 박고 양팔로 나를 끌어안아 왔다. 내 상체에 맞닿아오는 봉긋한 가슴과는 별개로 서유은의 몸은 작기 그지없었다. 이토록 작고 어린 애를 두고 언니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성애를 몰아붙일 수 있었을까. 주변에 비슷한 성향의 사람도 찾으려면 찾는 게 가능했을 텐데.
서유은이 한숨을 흘리고 나를 안은 두 팔을 풀고는 양손으로 내 양팔 상완을 잡았다.
“감사해요...”
“... 좀만 더 안아줘도 돼?”
“... 제가 불쌍한 거예요...?”
“...”
서유은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봐왔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은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 그럼 좀만 더 안아주세요.”
“응...”
서유은이 다시 내 등 뒤로 두 팔을 감아왔다. 오른손으로 서유은의 등을 조심히 쓸었다.
“힘들 때면, 지금처럼 조금만 안아달라고 해도 돼요?”
“... 응.괜찮아.”
“감사해요...”
서유은이 팔을 풀고 상체를 살짝 뒤로 뺐다. 바로 팔을 풀어줘야 할까. 조금 더 내게 의지할 수 있게 해야 할까. 고민이 길어졌다. 조금은 괜찮을 거였다. 오른손으로 서유은의 등을 토닥이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오빠...”
“응.”
팔을 풀어줬다. 몸을 뒤로 뺀 서유은이 나를 쳐다봤다.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었다.
“가, 감사해요...”
서유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빠르게 걸어 부실을 나갔다. 내가 너무 오바했던 건가. 서유은이 부담을 느끼면 안 되는데. 괜한 짓을 한 듯했다.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김민준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일어났어요? 전화 가능해요?]
[되면 전화 걸어줘요.]
왜 그러지.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두 번쯤 가고 연결됐다.
ㅡ여보세요, 윤우 학생.
잘못 들었나.
“네?”
ㅡ아, 온유 학생이 이윤우 배역이니까 그렇게 불러봤어요.
“아...”
살폿 웃었다.
“네.”
ㅡ별로 재미 없었죠?
“아뇨 그냥 제가 잠깐 정신이 없었어 가지고요.”
ㅡ아침이니까 그럴 수 있죠. 암튼. 제가 요즘 연락을 좀 뜸하게 한 거 같아서 전화 달라고 했어요.
“네... 제가 좀 연락을 드렸어야 됐는데.”
ㅡ아뇨, 괜찮아요. 온유 학생 겁쟁이둘 대본 많이 읽었죠?
“네. 수아랑 같이 많이 읽었어요.”
ㅡ좋네요. 일요일이 대본 리딩하는 날이니까 잘 숙지해주세요.
“네. 이제 진짜 바빠지겠네요.”
ㅡ그쵸. 온유 학생 본격적으로 촬영 들어가는 것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음반 작업도 진행하게 되면 진짜 정신없이 바빠질 거예요. 물론 온유 학생이 원해야 그리되겠지만.
“네, 빨리, 많이 바빠지고 싶어요.”
웃음소리가 들렸다.
ㅡ알겠어요. 담에 한번 같이 어떻게 할지 얘기 나눠봐요 그럼.
“네.”
ㅡ온유 학생 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나 뭐 없나요?
“네 당장은 없어요.”
ㅡ네, 그럼 끊을게요. 필요한 거나 궁금한 거 생기면 문자나 전화로 연락해요.
“네.”
전화가 끊겼다. 침묵이 찾아오고, 이내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져 왔다. 내가 마주해야만 할 일들이 쌓이고 있어서 그런 건가. 확실히 버거움이 느껴질 만한 시기인 것 같기는 했다. 이준권도 지금쯤이면 기사를 확인했을 테니 귀국을 하든 어쩌든 반응을 보여올 것이었다. 어저께에는 서유은이 부탁을 해온 것에 응해서 나는 서유은에게 언제나 도움을 줄 수 있는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보다 백지수, 송선우, 윤가영에게 소홀하지 않아야 했다. 다가올 일요일에는 대본 리딩을 하고, 이수아랑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거기에 여태 기피해 온 작곡 활동도 다시 시작해서 싱어송라이터로서도 소명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세은이가 아이돌로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연락이 자유로이 닿을 때면 내가 지어온 죄를 고백하고, 용서와 허락을 구해야 했다.
두 달 전만 해도 내가 이런 일들을 감당해야 되리라는 상상은 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텐데. 일이 어찌 이리된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부실을 나섰다. 입으로 호흡해서 숨을 고르는데, 맞은 편에서 백지수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백지수가 눈을 마주치고 눈썹을 치켜세우고는 오른손을 들어 검지로 내 뒤쪽을 가리켰다. 다시 들어가라고 하는 듯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문을 열면서 뒷걸음질을 쳐 안으로 들어갔다. 백지수가 안으로 들어오고 입을 열었다.
“문 잠가줘.”
“응.”
오른팔을 들어 문을 잠갔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백지수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수가 문에서는 볼 수 없는 사각지대로 가서 벽에 등을 붙였다. 앞으로 가서 백지수를 마주 봤다. 백지수가 나를 올려보면서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목소리가 작고 의기소침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느껴졌다.
“뭐가?”
“... 어제 내가 문자로 얘기했던 거 있잖아... 서유은이랑 했냐고...”
“으응... 괜찮아. 어제도 바로 사과했잖아.”
“그래도... 되게 선 넘은 거잖아... 나도 네가 그런 식으로 질투한다고 생각하면 정떨어지고 질색할 거 같은데...”
살폿 웃었다. 양손으로 백지수의 볼을 잡고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괜찮아. 그냥 귀여웠어. 나 사랑해주는 느낌도 들어서 오히려 고맙기도 했어.”
“으응...”
“키스할까?”
“... 좋아...”
“응.”
조심히 입술을 포갰다. 백지수가 나를 두 팔로 안고 눈을 감았다. 혀가 감겼다. 정적이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침이 서로 섞였다. 사과 향이 났다.
내 품에 안겨 있는,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고 끊임없이 질투해주는 지수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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