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2화 〉 화요일 종례 후
* * *
백지수랑 송선우하고 같이 반을 나섰다. 백지수가 앞으로 걸어가면서 나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강성연네 갔다가 오는 거지?”
“응.”
“그래.”
백지수가 정면을 바라봤다.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교문 앞에 강성연이 멈춰 서서 폰을 보고 있었다.
“쟤 저기 또 있네.”
백지수가 조용히 소리 냈다. 아직 불만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지수가 성연이한테 미운 맘을 가지지 않으려면 십 년은 흘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교문에 가까워져 갔다. 강성연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안녕.”
“어 안녕.”
내가 답했다. 송선우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도 인사해줘 성연아.”
“어, 안녕.”
“그래. 너 저녁 온유랑 같이 먹는 거지?”
“응. 얘가 말해줬어?”
“응.”
강성연이 송선우랑은 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봤다. 그러고는 왼손으로 내 오른팔 소매를 잡았다.
“가자 온유야.”
“응...”
원래 같았으면 그냥 털털하게 군다는 생각만 들었을 텐데, 지금은 왠지 강성연이 여우 짓을 하는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옆을 슬쩍 봤는데 백지수는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고, 송선우는 당황했는지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강성연이 내 옷소매를 툭툭 끌어당겼다.
“빨리. 엄마 기다리셔.”
“어어...”
“우리 먼저 갈게.”
강성연이 그렇게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는 앞으로 발을 뻗었다. 따라 걸으면서 고개만 뒤로 돌려 백지수랑 송선우를 봤다. 백지수가 어이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는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송선우가 팔짱을 끼고 강성연이랑 나를 보다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왼손을 흔들면서 입을 열었다.
“잘 가 선우야, 지수야.”
“응. 잘 가.”
“... 잘 가.”
백지수가 뒤늦게 말했다. 강성연을 미워해도 좋을 이유를 오늘 하나 더 쌓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강성연이랑 같이 걸어갔다. 강성연이 한참을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강성연이 도로를 보다가 나를 흘깃 쳐다봤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야.”
“응?”
“... 너 왜 자꾸 백지수랑 같이 있어...”
“...”
목소리가 여자 같았다. 아니 강성연이 원래 여자가 맞기는 맞는데, 그다지 여자스럽지는 않았던 예전이랑 비교하면 지금은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근데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잠시 궁리해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렸다. 얘 레즈 아니었나? 얘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겠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괜히 긴장됐다. 입 다문 채 큼, 하고 소리 내어 목을 가다듬은 다음 입을 열었다.
“왜?”
“아니 나...”
강성연이 목소리가 기어들었다. 강성연이 고개를 살짝 내리고 왼발을 바닥에 질질 끌었다. 이 행동도 여자 같았다. 발을 끄는 건 분명 평소 습관일 텐데. 그냥 내가 강성연이 요즘 다르다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건가? 알 수 없었다.
“... 백지수 보기 좀 힘들단 말야...”
아. 확실히 고백하고 차인 다음에 얼굴을 마주하면 부끄럽고 어색할 거였다. 그런데 내가 강성연을 배려해서 백지수랑 떨어져 주거나 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강성연보다는 지수가 소중하니까. 강성연이 머쓱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으응.”
“...”
강성연이 뒷짐을 지고 왼발 끝으로 바닥을 톡톡 치다가 발을 바닥에 붙이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근데 너 백지수랑 사귀어...?”
“... 왜?”
“왜가 아니라... 그냥 물어볼 수도 있잖아.”
“... 안 사귀어.”
강성연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거짓말 안 해도 돼.”
“내가 거짓말을 왜 해.”
“... 그건 그렇네.”
“어. 근데 왜?”
“아니 뭐, 걔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때 전에 사귄 건지 아님 그 뒤로 사귄 건지도 궁금하고...”
“안 사귄다니까.”
“그래, 들었어. 그냥 그랬다고.”
“응.”
침묵이 찾아왔다.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이 고요를 흐려 줬지만, 어색함은 지워주지 않았다. 강성연이 말없이 고개를 돌려 도로를 바라봤다. 이윽고 강예린의 차가 접근해와서 강성연과 내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의 창문이 열리면서 두 손으로 조수석을 짚은 채 상체를 이쪽으로 숙이고 있는 강예린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 온유야.”
뭔가 데자뷰인데.
“안녕하세요.”
강예린이 미소 지었다. 어제랑 비슷한 웃음이었다.
“빨리 타렴.”
“네.”
강성연이 뒷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이것도 어제랑 같은 패턴이었다. 강예린은 나한테 인사하고, 내가 마주 인사할 동안 강성연은 강예린한테 말을 걸지 않은 채 뒷문을 열어서 안에 들어가 앉고. 그다음 차례는 내가 몸을 숙이며 강성연의 옆에 앉아서 문을 닫는 거였다. 조심히 뒤쪽으로 들어가 착석하고 문을 닫았다. 강예린이 어제처럼 악셀을 밟았다. 등이 좌석에 붙었다.
왠지 느낌이 묘했다. 이유가 뭘까 하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금방 답이 나왔다. 내가 강씨 모녀의 일상에 끼어들어 버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살짝 미묘해진 거였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서 차창 너머를 바라봤다. 서울의 빌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중에 신경은 온통 모녀의 일상에 끼어들었다는 생각에 매였다.
두어 달 전만 해도 성연이랑 이렇게까지 연관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는데. 삶이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말이 이해될 것 같았다.
은근히 익숙한 길들과 내가 잘 모르는 길들을 접어들던 차가 꽤 크기가 큰 단독주택의 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고도 넓직해서 양옆의 문을 다 활짝 열어도 될 듯했다.
강예린이 정차하면서 입을 열었다.
“다 왔다...”
강예린도 혼잣말을 하는구나. 평소 모습이랑 갭이 있어서 귀엽게 느껴졌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갈 것 같아서 억지로 표정 관리했다.
“네.”
“내리자.”
강성연이 말하면서 왼쪽 문을 열었다. 나도 오른쪽 문을 열고 내린 다음 도로 닫았다. 강예린이 운전석에서 나와서 문을 닫고 강성연이랑 나를 바라봤다.
“가자.”
“응.”
“네.”
강예린이 살폿 웃고 앞장섰다. 차고를 나서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 신발 하나 없었다. 왜 그런가 했는데 강예린이 신발을 벗고 바로 신발장에 놓았다. 강성연도 똑같이 신발을 벗더니 강예린이 벗은 신발 왼편에 나란히 놓았다. 나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강예린이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넌 안 해도 돼 온유야.”
“아뇨 저도 할게요.”
“그래. 고마워.”
빠르게 신발을 벗어 강예린의 신발 오른편에 놓았다. 강예린이랑 강성연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뒤따랐다. 집 내부는 전체적으로 하얗고 깔끔했다. 천장이 높고 공간이 넓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다. 문이 열려 있는 방 하나는 운동기구들로 차 있었다. 다른 방들은 다 문이 닫혀 있는 것을 생각하면 홈짐을 엄청 자주 드나드는 모양이었다. 강성연은 체육 시간 때 보면 운동 신경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던데. 아마 강예린이 홈짐을 쓰는 듯했다.
강예린이랑 강성연의 집은 접때 한번 봤던 강혜린의 집이랑 살짝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그보다는 가구 배열 같은 게 조금 더 정돈돼 있어 보였다. 강혜린의 집은 콤팩트함과 함께 편안함이 느껴진다면 강예린의 집은 효율성과 철저함 같은 게 느껴졌다.
“난 지금부터 저녁 만들 테니까 둘이 같이 얘기나 뭐 하고 있어.”
강예린이 말했다. 강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지금부터 준비하지. 시간이 되게 오래 걸리는 건가?
“요리 시간 많이 드는 거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강예린이 미소 짓고 고개 저었다.
“아냐 내가 혼자 할게. 고마워.”
“사양 안 하셔도 돼요.”
“아냐. 식사 대접하는 거인데 내가 다 하게 해줘. 도와준다는 마음만 받을게 온유야.”
“네. 감사해요.”
“내가 더 고맙지. 암튼 둘이 잘 놀고 있어?”
“네.”
강예린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강예린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강성연이 나를 쳐다봤다.
“뭐 겜이나 할래? 컴이랑 노트북 있는데.”
“어, 그전에 나 홈짐 좀 둘러봐도 돼?”
“홈짐? 엄마한테 물어봐. 거기 거의 엄마만 써.”
“으응. 왠지 그럴 거 같더라.”
강성연이 피식 웃고는 왼손을 주먹 쥐어서 내 오른팔을 툭 쳤다. 별로 아프지 않았다.
“세게 때린 거 아니지?”
“어. 진짜 세게 쳐봐?”
“그건 아니고.”
강성연이 코웃음 치고 입을 열었다.
“암튼 진짜 홈짐 보고 싶음 엄마한테 가서 얘기해. 아니 그냥 내가 물어봐줄까?”
“아냐 내가 가서 물어볼게.”
“어. 걍 같이 가 일단.”
“응.”
강성연이랑 주방으로 갔다. 강예린이 식재료랑 조리 기구를 테이블에 늘어놓고 있었다. 강예린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강예린의 동공이 확장됐다.
“왜 온유야?”
“저 홈짐 좀 봐도 될까요?”
“음? 어. 맘대로 해. 집에 뭐 보면 안 될 거 숨겨두진 않았으니까.”
살폿 웃었다. 원래는 원수 취급을 받았는데 이제는 농담을 들을 정도로 강예린이랑 사이가 호전되었다는 게 새삼스레 신기했다.
“네.”
강성연이랑 같이 홈짐으로 들어갔다. 트레드밀이랑 스텝밀이 있고, 고무 아령이 무게별로 나뉘어서 한 쌍씩 있었다. 15kg가 최대 무게였다. 사용감이 가장 많이 묻어나 있는 건 10kg이었다. 운동을 엄청 많이 하나. 한번 양손에 10kg 아령을 들고 바이셉스컬을 세 번만 했다. 무게감이 상당했다. 여자가 들기 좀 힘들 거 같은데. 아령을 도로 내려놓고 강성연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운동 많이 하시는 거 같은데 넌 왜 운동 안 해?”
“안 할 수도 있지.”
“그렇긴 해. 게임이나 하러 가자.”
“어.”
강성연이랑 같이 홈짐을 나갔다. 강성연이 빠르게 걸어가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가고는 게이밍 의자 옆에다 학교에서나 볼 법한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았다. 방에 들어가 슬쩍 훑었는데 진짜 학교 책상이 하나 있었다. 책상 위에 사각 필통도 놓여 있는 게 공부할 때 쓰는 모양이었다.
강성연이 학교 의자에 앉고 컴퓨터 본체랑 자기 앞에 놓인 노트북을 켰다. 자연스럽게 게이밍 의자에 앉았다. 강성연이 노트북 각도를 살짝 틀어 내가 화면을 못 보게 하고 타이핑했다. 비밀번호를 모르게 하려는 건가.
“나 집 안 올 건데 굳이 숨길 이유 있어?”
“...”
강성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인가? 아마 그럴 것 같았다.
“나 노트북 비밀번호랑 평소에 자주 쓰는 비밀번호 똑같아.”
“으응. 그럼 인정이지.”
“어. 뭔 겜 할래?”
“네가 할 거 생각해두고 있던 거 아냐?”
“아닌데?”
픽 웃었다. 강성연도 피식 웃었다.
모니터를 보면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바탕화면에 게임 아이콘이 세 개밖에 없었다. 롤이랑 싱글 플레이 스팀 게임 두 개. 그 외에 아이콘은 크롬이랑 내 pc, 휴지통,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스팀, 그리고 카카오톡 정도만 있었다. 아무래도 강예린의 정리하는 습관이 강성연에게도 유전된 듯했다.
“걍 롤이나 할래?”
강성연이 말했다.
“롤 노트북으로 해도 괜찮아?”
“저번에 해봤어. 이거 겜해도 되는 거라서 상관없더라.”
“그래 그럼 하자.”
롤을 켜고 아이디를 입력했다. 강성연도 롤에 접속하고 나를 흘깃 봤다.
“너 아이디 뭐야?”
답하지 않고 강성연의 노트북 화면을 봤다. 차단박고 게임함. 피식 웃고 친구 추가했다.
“왜 웃냐?”
“걍 좀 귀여워서.”
“미친놈.”
강성연이 나를 초대하고 듀오로 일반 게임 큐를 돌렸다. 매칭이 금방 잡혔다. 강성연이 티읕을 연타하면서 엔터를 눌렀다. 뒤늦게 티읕을 친 사람이 탑을 양보하며 원딜을 하겠다고 했다. 탑을 사수한 강성연이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잭스를 픽했다. 강성연답지 않게 귀여웠다. 남들이 라인을 고르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정글이 남아서 리신을 픽했다. 강성연이 기지개를 켰다가 나를 올려봤다.
“나도 운동 한번 해볼까?”
“해. 되게 좋아, 여러모로.”
“뭐 어떻게 좋은데?”
“그냥 체력 좋아지는 게 체감이 잘 돼.”
“으음. 그럼 유산소해야 되지 않아?”
“나도 잘 몰라. 근데 유산소 위주로 하고 근력 운동도 좀 하면 되게 좋을 거 같긴 해.”
“으응. 요즘 뭐 하는 것도 없는데 좀 해봐야겠다.”
“그래.”
롤 로딩 화면이 넘어가서 게임이 시작됐다.
“시작했다.”
“응.”
강성연이 마우스를 움직여 아이템을 샀다. 게임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집중하는 모습이 약간 귀여웠다. 템을 사고 정글로 들어갔다. 인베는 없었다. 무난하게레벨링하면서 위쪽 동선으로 움직였다.
강성연을 좀 챙겨줘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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