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329화 (328/438)

〈 329화 〉 안부 전화, 그리고 월요일 쉬는 시간

* * *

오줌이 마려웠다. 눈을 뜨고 양옆을 봤다. 지수랑 선우 둘 다 곤히 자고 있었다. 둘이 깨지 않게 조심히 침대에서 내려가고 폰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1층으로 가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방뇨하고 손을 씻은 다음 거실 소파에 앉아 폰을 켰다. 문자 앱을 켜고 스크롤링했다. 윤가영이 눈에 들어왔다. 이준권 기사를 봤을까. 일단 얘기는 해야 할 듯싶었다. 문자 보냈다.

[일어났어요?]

숫자가 금방 사라졌다.

[응. 일어났어.]

[그럼 지금 전화 가능해요?]

[응. 좋아. 전화해줘.]

[네]

전화 걸었다. 바로 연결됐다.

“여보세요.”

ㅡ네... 여보예요...

웃음이 나왔다.

“옆에 아무도 없는 거죠?”

ㅡ응...

“당신 왜 이렇게 귀여워요?”

ㅡ히... 저도 모르겠어요...

목소리에 불안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기사를 아직 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냥 기사 얘기를 안 하는 게 맞을까. 근데 어차피 알게 될 거였으니 내가 알려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가영 씨.”

ㅡ네...?

“오늘 그 기사 떴어요. 이준권 나락으로 떨어뜨릴 거.”

ㅡ그래요...?

“네.”

ㅡ알겠어요...

“괜찮아요?”

ㅡ네...? 왜요...?

“막 불안하다거나, 마음이 진정이 안 된다거나 하지 않아요?”

ㅡ저 잘 모르겠어요... 조금 떨리는 거 같긴 한데 무섭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구...

“다행이네요 그럼. 나 되게 걱정했어요, 당신 마음 졸이고 있을까 봐.”

ㅡ히...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저 괜찮아요. 어차피 그 사람 한국에도 없으니까...

확실히 실질적인 위협 대상이 될 사람이 없으니 극히 불안하지는 않을 거였다. 물론 이준권이 귀국하게 되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당장은 괜찮을 듯했다.

그래도 내심 일정 부분 마음 졸이는 것도 있을 거였다. 맘이 약하면서도 나한테 누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혼자 끙끙 앓지 않도록 먼저 가서 보듬어줄 필요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불안해지면 문자랑 전화해요.”

ㅡ알겠어요... 고마워요 여보...

“그래요. 내일 여보 보러 갈게요.”

ㅡ히... 고마워요 여보...

“내가 더 고마워요. 오늘 못 가서 미안해요.”

ㅡ괜찮아요... 다른 여자친구들도 여보랑 있을 시간 필요하니까...

자지가 껄떡거렸다. 새엄마한테 다른 여자친구라는 말에 여보라는 호칭까지 듣는다는 데에서 오는 배덕감이 미치도록 컸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ㅡ네... 내일 잔뜩 사랑해주세요...

살폿 웃었다.

“알겠어요. 내일 예뻐해줄게요.”

ㅡ히히...

존나 귀여웠다. 새엄마라는 여자가 이래도 되는 건가? 날아다닐 수만 있다면 당장 윤가영에게 찾아가 품에 안고 뽀뽀를 퍼부어주고 싶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여보.”

ㅡ저도 사랑해요 여보...

“그래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기사 댓글이나 인터넷 반응 같은 거 찾아보지 마요.”

ㅡ그럴려구요...

“네. 오늘 저녁 잘 챙겨 먹어요. 잠도 잘 자고.”

ㅡ네... 기다릴게요 여보...

“네. 내일 봐요.”

ㅡ네...

쪽, 하고 입 안쪽을 붙였다 떼는 소리가 났다. 윤가영은 뭐가 사랑스러운지를 너무 잘 알았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사랑해요 여보.”

ㅡ저도 사랑해요...

“네. 이제 끊을게요?”

ㅡ알겠어요...

“사랑해요.”

ㅡ히히... 저두 진짜 진짜 사랑해요.

“나도요. 진짜 끊을게요.”

ㅡ네에...

전화를 끊었다. 윤가영은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좋은 여자였다.

폰을 끄고 테이블에 내려놓은 다음 기지개를 켜고 소파에 등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제 지수랑 선우가 깨면 또 섹스를 할 거였다.

윤가영이 다른 여자친구들, 이라고 말한 게 머리를 맴돌았다. 세은이는 지금 뭐 할까. 빨리 시간이 생기고 기회가 닿았으면 했다. 세은이랑 만난 지가 오래된 느낌이었다. 정작 마지막으로 세은이를 보고 나서 흐른 시간은 3주도 안 되었지만. 사랑하는 만큼 체감되는 공백이 컸다.

다시 폰을 잡고 화면을 켜서 시크네스 티저를 반복 재생했다.밝은 조명을 받고 있는 예쁜 김세은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

피곤했다. 쉬는 시간이 이제 대충 칠팔 분 남았나? 한 십 분 정도나마 자고 싶었다. 소리 없이 한숨 쉬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끼워 넣은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어느 순간 부실 문이 열렸는지 바깥에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오른편에 누가 털썩 앉는 소리가 들렸다.

“온유야, 너 어제 나온 시크네스 티저 봤어?”

정이슬 목소리였다. 눈을 뜨려 했는데, 눈꺼풀이 좀 무거웠다.

“온유야.”

눈을 반쯤 떴다. 뭔가가 내 얼굴 앞에서 마구 흔들렸다. 가느다란 살구색 가지가 다섯 개... 오른손이다.

“응? 온유야?”

“아...”

간밤에 잠을 못 자서 정신을 도통 차리기 어려웠다. 수업 시간에 졸음이 몰려와서 수업 내용도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제 백지수랑 송선우한테 동시에 착정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나 하나를 두고 둘이 일정 시간마다 번갈아 가며 섹스하기도 하면서 잠, 섹스, 식사, 섹스, 잠, 섹스 같은 사이클을 따라 새벽 다섯 시까지 몸을 섞었으니, 지금은 살짝 멍한 상태로나마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상태 좀 안 좋은 거 같은데? 노래 한 곡 부를래?”

피식 웃었다.

“상태 안 좋다고 노래 한 곡 부르는 거는 뭐예요.”

“기분 전환에 좋으니까. 밴드부실에서 따로 뭐 할 것도 없고.”

“그거 갖다 놓은 거 있잖아요, 스탠딩백.”

“근데 그건 같이 할 수는 없으니까.”

“듀엣하려 했던 거예요?”

“당연하지.”

웃음이 나왔다. 정이슬이랑 있으면 실없이라도 자주 웃게 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너 시크네스 티저는 봤어?”

“봤죠.”

“으응. 그럼 같이 다시 보자.”

뭔가 비슷한 말을 들었던 거 같은데.

“네.”

정이슬이 폰으로 티저를 켜고 왼손으로 내 오른팔을 붙잡아서 딱 붙어왔다.

“누나. 거리감이 좀 필요해요.”

“아냐 지금 딱 좋아. 티저 제대로 볼 수 있게 이제 조용히 해줘.”

어이없었다. 정이슬이 티저를 다시 틀었다. 한 번 소리 없이 가만히 영상을 감상한 정이슬이 그 상태에서 세 번을 다시 봤다.

“세은이 진짜 멋있다...”

살폿 웃었다. 여자친구 칭찬은 어디서 어떻게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누나 저 팔 좀 놔주세요.”

“응.”

정이슬이 내 오른팔에서 떨어지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근데 온유야.”

“네.”

“너 드라마 준비하는 거 있지.”

“어? 그거 누나가 어떻게 알았어요?”

정이슬의 눈에 장난기가 들었다.

“히. 안 알려줄래.”

“알려주세요.”

정이슬이 짓궂은 아이처럼 웃었다.

“너 방금 그거 한 번만 더 해봐.”

“알려주세요.”

“딱 한 번만 더. 애교 가능한 한으로 진짜 최대한 듬뿍 담아서.”

“아 뭐예요...”

정이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지금만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는 것 같았다.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봐.”

“... 알려주세요...”

“응. 알려줄게.”

정이슬이 오른손을 말아쥐고 입 앞으로 가져다 대더니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정이슬은 취하는 제스처가 항상 눈에 띄고 귀여웠다.

정이슬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연기할 드라마 있잖아, 그거 대본 쓴 작가가 사실 내 동생이야.”

“헐. 진짜요?”

“응. 이름 정서아. 고2. 맞지?”

“네...”

“걔도 대단해 나보다 어리면서 드라마 작가나 되고... 그리고 내 두 살 여동생이 그 드라마에 연기하는 거 알아? 비중 있는 여주 급 캐릭터로.”

정시은 말하는 건가?

“‘이서은’ 역할 맡은 사람이요?”

“어, 어. 이서은. 그 이름 맞았던 거 같아.”

“와. 자매가 다 능력이 미쳤네요.”

“그치. 진짜 미쳤어 걔들.”

“네? 왜 걔들이라고 해요?”

정이슬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했다.

“왜? 맞지 않아?”

“전 누나도 포함해서 말한 건데요? 누나는 노래 잘하고, 정서아는 글 잘 쓰고, 막내인 애는 연기 잘하는 거니까,”

정이슬이 흐흥, 하고 웃었다.

“고마워. 근데 난 아직 뭐 직업적으로 뭐 하는 게 없으니까...”

“그래도 커리어는 쌓고 있잖아요.”

정이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음? 내가 모르는 뭔가를 내가 하고 있기라도 한 거야?”

살폿 웃었다.

“아뇨. 누나 우리 학교 밴드부 보컬이잖아요.”

“흠. 우리 학교 밴드부 보컬 다 따지면 가수로 성공한 사람은 퍼센트가 엄청 높지는 않잖아.”

“그 비율은 진로를 어찌 정하느냐가 좌지우지하는 거잖아요. 누나는 노래 잘하니까 가수 되면 기회만 있음 바로 뜰걸요?”

정이슬이 씩 웃었다.

“그래?”

“네, 제 예감 상 그래요.”

“히. 근데 만약에, 진짜 만에 하나 못 뜨면 어떡해?”

“그럴 리 없을 거 같은데요.”

“아니 정말 만약에 그런다고 하면.”

“글쎄요. 전 누나 진짜 잘 될 거 같아서.”

정이슬이 히히 웃었다.

“아 이럼 안 되는데?”

“왜요?”

“나 그 말 하려 했단 말야. 나 망하면 네가 나 책임져줘야 된다.”

“네? 어떻게 그게 그런 쪽으로 이어져요?”

“그냥 네가 나 뜬다 해서 그 말만 믿고 꿈을 굳혔는데, 막상 하다가 망하면 길이 없으니까? 그때가 되면 이미 할 줄 아는 건 노래 말고 없는 무능력자 유사 백수 될 테니까 나를 이렇게 한 데 일조한 네가 책임져주는 게 맞다는 그런 느낌?”

살짝 어이없어서 픽 웃었다.

“그럼 제가 책임은 어떻게 져야 되는데요?”

“어? 진짜 져주게?”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흐음...”

정이슬이 양손으로 자기 팔을 감싸고 위아래로 쓸었다.

“좀 쌀쌀하다.”

“몸이 춥다는 거예요?”

“아니, 너.”

“왜요?”

“그냥,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나한테 좀 철벽 치는 느낌이야.”

“누나가 너무 어프로치하니까요.”

“으응. 그럼 내가 좀 소프트해지면 티키타카 잘해줄 거야?”

“그건 고민해볼게요.”

정이슬이 눈웃음 지었다.

“역시 나빴어.”

“나빴다면서 웃는 건 뭐예요.”

“오히려 좋아서. 공략하기 어려운 만큼 너를 가지게 되는 순간은 짜릿하겠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상하게 실소가 멈추지를 않아서 살짝 어지러웠다.

“아, 누나 저 진짜 미치겠어요.”

“흫. 나한테 미치겠다는 거지?”

“아니요.”

“또 너무 딱딱하게 받아치는데? 계속 이러면 나 살짝 서운해질지도?”

웃음이 나왔다. 정이슬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 나누기 좋은 대화상대였다.

“나 서운해질지 모른다고 했는데 케어 안 해줄 거야?”

“어떡해야 되는지 몰라요.”

“알려주면 그 방법대로 해줄래?”

“아마 누나가 말해주는 거로는 안 할 거 같아요.”

“헐.”

정이슬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마상 입었어.”

픽 웃었다.

“뭔지나 얘기해줘요.”

“음, 그냥 안아주는 거? 뽀뽀도 괜찮고.”

“둘 다 에바네요.”

“그럼 손잡기는?”

“지금 흥정하는 거예요?”

“몰라? 흥정이랑 비슷한가. 뭐 암튼. 손잡기도 안 되는 거면, 내 손등에 0.0001초 정도 입술 댔다가 떼는 거는 어때?”

“안 돼요. 그리고 누나 멘탈 케어 이미 다 된 거 같은데요?”

“음, 왜?”

“저랑 티키타카했잖아요.”

정이슬이 흐응, 하면서 눈웃음 지었다.

“진짜 요망하네 이온유?”

“누나가 더 요망해요.”

“아니거든? 난 그냥 여우 코스프레하는 정도지만 너는 휴먼 팍스거든?”

피식 웃었다.

“지금 말투 되게 유치했어요 누나.”

“그만큼 내가 순수하다는 거지.”

“누나 진짜 순수한 거 같긴 해요.”

“그치. 내 자부심이야, 젊은 느낌을 유지한다는 거.”

웃음이 나왔다.

“누나 나이 얼마나 먹었다고 젊다는 표현을 써요.”

“나 나이 되게 많지. 비성인 중에 최고 연장자인데.”

“비성인이면 젊다고 안 하고 어리다고 표현하죠.”

“근데 어리다고 하면 조금 부정적인 의미가 섞이는 거 같아서. 난 젊음이라는 단어가 갖는 긍정적인 인상이 순수하다는 말에 더 어울리는 거 같아.”

“오.”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돼요.”

“그치.”

“네. 누나 좀 다시 보여요.”

정이슬이 히 웃었다. 그러더니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져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한숨 쉬었다.

“왜요?”

“그냥, 조오금 현타와서...”

“현타 올 이유가 뭐 있다고요?”

“아니 내 여동생들은 다 하고 싶은 거 직업적으로 하는데, 나는 싱어송라이터하겠다는 맘만 있고 막상 하는 거는 없으니까...”

“하는 게 왜 없어요, 밴드부도 하고 버스킹 자주 하는데. 그걸로 영상 남으면 그게 포트폴리오 만드는 거고 커리어 되는 거 아니에요?”

“으응...”

“저는 누나 너무 조바심낼 필요 없을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응, 고마워.”

정이슬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도 뭐라도 하고 싶어. 내 여동생들처럼, 그리고 세은이나 너처럼.”

빙긋 웃었다.

“그럼 뭐 하면 되잖아요. 가사부터 쓴다거나 그런 거.”

정이슬이 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래야겠다. 일단 뭐라도 해야겠어.”

정이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밴드부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이슬이 뒤돌아 나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나 반 들어가서 인생 플랜 좀 짤게.”

피식 웃었다.

“노트 같은 거는 폰으로 하면 되지 않아요?”

“나 지금 배터리 없어서 반에다 놓고 충전시켜놨어 가지고.”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응. 기분도 낼 겸 아날로그 감성으로 기록해두려고. 암튼, 가볼게.”

“네.”

정이슬이 빙긋 웃으며 밴드부실에서 나갔다.

정이슬이 세울 계획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응원해주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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