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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260화 (260/438)

〈 260화 〉 사고 (9)

* * *

윤가영이 내 품에 안겨 눈을 감고는 이내 새근새근 잠들었다. 아무래도 심적으로 많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윤가영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스무 살이라 해도 무방할 만치 어린 얼굴인데 눈 밑으로 근심이 한 자락 내려와 있었다. 지워주고 싶었다. 내가 잘한다면 지울 수 있을 거였다. 잘못하면 오히려 다크서클을 더 짙게 할 수도 있었고. 결국에는 모두 내 손에 달린 거였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쓸었다. 별 움직임이 없는 게 잠에 깊이 든 듯했다.

이제 어떡해야 할까. 해답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백지수는 분명 엄청 화낼 텐데. 보기 두려웠다. 최악의 경우 헤어지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만은 안 되는데. 초조했다. 침대에서 조심히 빠져나가고 폰을 들었다. 윤가영의 번호로 문자를 남겼다.

[얘기하고 올게요.]

[나 없다고 놀라지 마요.]

[수아랑 저녁 먹어요. 나 걱정하지 말고.]

1층으로 내려가고 소파에 앉았다. 별장으로 가서 백지수를 봐야 할 텐데. 택시를 부를 마음도 당장은 들지 않았다. 진짜 어떡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맞기나 할까? 오늘 말고 다른 날에 얘기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양 팔꿈치를 허벅지에 대고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명쾌한 해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욕지기만 차오를 뿐이었다. 방으로 걸어가 화장실에 들어가고 변기 앞에 무릎 꿇었다. 토가 쏟아져나왔다. 신물이 혀에 불쾌한 맛을 남겼다. 혼자서는 영영 답을 못 찾을 것만 같았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폰을 켜봤다. 네 시 오 분이었다. 대충 세 시간 네 시간이 지나면 백지수가 별장으로 간다고 생각해야 했다. 백지수가 도착했을 때 내가 없으면 분명 전화를 하거나 해서 이유를 물을 거였다. 거짓말로 답을 하면 눈치 빠른 백지수는 이상함을 금방 눈치채고 궁금증이 해소될 때까지 며칠이고 캐물을 게 뻔했다. 그러면 나는 어느 정도 기만을 쌓다가 마지 못 해 털어놓아서 백지수에게 미움을 크게 살 거였다. 어쩌면 백지수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오를지도 몰랐다.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이준권이랑 다를 바 없는 놈이 되는 거였다.

기만을 쌓지 않은 채로 고백해야 했다. 당장 오늘은 아니라도 최대한 근시일 내에 해야 했다.

세면대의 수도를 틀고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수건에 얼굴을 묻어 물기를 닦았다. 말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백지수 방 침대에서, 거실 소파에서, 주방 테이블에서 백지수와 마주했다. 하나같이 겁나서 말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백지수는 눈살을 찌푸리고 뭔 말을 하려고 그리 꾸물대냐고 짜증을 냈다. 그러다가 내가 윤가영과 콘돔 없이 섹스해서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것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거나 화를 냈다. 울면서 화내는 백지수도 있었다. 가슴이 한없이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말하기 겁났다. 오늘은 말을 못 할 것 같았다. 오늘이 아니라고 해서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기 싫은 마음이 나를 망설이게 할 게 뻔했다. 나는 겁쟁이에 우유부단하기까지 해서 미루고 미루고 미룰 거였다. 윤가영이 정말 임신한다 해도 나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유예하기만 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대신 결단해주고 나를 부추겨줄 사람이 필요했다. 외조부모님 집 주소를 목적지로 택시를 불렀다. 빠르게 양치하고 방에서 외조부모님 집열쇠를 챙겼다. 외투를 걸친 다음 집을 나섰다. 택시가 곧 시야에 잡혔다. 뒷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면서 좌석에 앉았다. 택시 기사님이 예, 라고 짧게 답했다. 잠시 앞창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최대한 빨리 가주실 수 있으세요? 택시 기사가 백미러를 흘깃 봤다. 알겠어요. 택시가 출발했다. 속도가 빨리 상승했다. 감사합니다. 예. 시선을 왼쪽 차창에 던져 빌딩들을 보다가 두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졸음이 몰려왔다. 잠시나마 걱정을 지울 좋은 기회였다.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감각이 하나씩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손님.

“손님?”

두 눈을 떴다. 택시 기사님이 나를 보고 있었다. 택시는 정차해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오른쪽 차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외조부모님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 네. 감사합니다.”

“네.”

차 문을 열고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닫았다. 이렇게 푹 잘 줄은 몰랐는데. 윤가영이랑 섹스를 해서인지 그런 건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몰려서 그런 건지 나도 모르게 많이 피로했던 모양이었다.

오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켜 봤다. 다섯 시 오십이 분이었다. 상당히 빨리 온 거였다. 그래도 돌아가는 데 걸릴 시간을 생각하면 여유가 없었다. 대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밖에서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집 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 안으로 들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온유냐?”

외할아버지 목소리였다. 소리가 멀지 않은 게 거실에 계신 듯했다. 거실로 걸어갔다. 티비가 켜져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소파에 앉은 채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웬일이냐? 저녁은 먹었냐? 아니 안 먹었겠지 시간이 언젠데. 우리도 안 먹었다.”

멋쩍게 웃었다.

“외할머니는요?”

“외할머니는 왜?”

“그냥 상담 받을 게 있어서요...”

외할아버지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갔다.

“지금 방에서 잔다. 친구들 만나고 피곤했는지 어쩐지.”

“외할머니도 같이 들으셔야 할 거 같은데요...”

“아니 그냥 자게 두고 일단 나한테 말해라. 거기 서 있지 말고 와서 앉고.”

“네.”

외할아버지가 앉은 소파의 오른쪽 끝에 앉았다. 외할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지레 겁먹어 있어.”

“그게...”

입이 절로 다물렸다. 외할아버지의 반응이 상상됐다. 말하는 게 망설여졌다. 문득 이렇게 조언을 구하러 찾은 사람에게도 선뜻 이야기를 못 꺼내는데 백지수나 송선우한테는 아무 말도 못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여기 온 게 정답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리모컨을 잡고 티비를 껐다.

“말 좀 해라.”

“네. 할게요.”

목멘 소리가 났다.

“너 뭐 목마르냐?”

“아뇨 괜찮아요.”

“됐다.”

외할아버지가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마실래? 오렌지 주스랑 포도 주스 있는데. 커피랑 콜라도 있고.”

“그럼 커피로 주세요...”

“그래.”

외할아버지가 주방에 가 편의점 커피를 두 병 가져왔다. 양손을 뻗어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아구구, 하고 소리 내며 소파에 앉았다.

“허리 아프세요?”

“아니. 아픈 데는 없는데 습관처럼 내는 거다.”

“아프면 병원 가세요.”

“그래. 그거 마시고 얘기나 좀 해라.”

“알겠어요.”

뚜껑을 따고 커피를 두 모금 마셨다. 한 모금만 더 마시고 뚜껑을 닫아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머릿속으로 짧게 정리했다. 외할아버지가 속 깊은 눈으로 지그시 나를 바라봤다. 차마 마주 보기 어려워 외할아버지의 배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여자친구가 있는데요...”

외할아버지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세 명이 있어요...”

외할아버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그러니까, 사귄 여자친구가 여태 세 명 있었다는 게 아니라, 여자친구 셋을 동시에 사귀고 있어요...”

“그건 나도 이해했다.”

“... 차근차근 말하면요, 제가 원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여자친구가 아이돌 연습생이에요...”

“그래.”

외할아버지의 목소리 톤이 높았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이준권을 떠올리고 계실까? 자괴감이 몰려왔다. 외할아버지가 오른손을 말아쥐고 입 앞에 대서 큼, 하고 기침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외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외할머니가 안 깨게 하시려는 걸까. 아니면 그래도 내가 손자라고 세게 다그치지 않아 주시는 걸까. 전자의 이유가 우선하겠지만 후자의 이유가 크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게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 그 애가 있었는데, 제가 두 번째 여자친구가 된 애한테 심적으로 의지하고, 걔가 자취하는 집에서 며칠 묵기도 하면서 가까워져 가지고요...”

외할아버지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그냥 줄줄 말하라는 의미인 듯했다.

“그 애랑도 연인 사이 되고, 또 얼마 안 가서 어머니 장례식 치르고 난 다음에 소꿉친구였던 애랑도 연인 관계로 됐어요...”

“... 할 말 아직 많이 남았냐?”

“... 약간 남았어요...”

“그러냐.”

“네...”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오른손을 뻗어 자기 커피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 가시고는 소주를 가져와 자리에 앉았다. 외할아버지가 뚜껑을 열면서 입을 열었다.

“계속 말해라.”

“네...”

외할아버지가 병나발을 불었다. 소주가 외할아버지의 목구멍을 넘어갔다. 꼴깍꼴깍 소리가 들렸다.

“그만 드세요...”

외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에 소주를 내려놓았다. 소주의 삼 분의 일이 사라져 있었다.

“... 죄송해요.”

“됐다. 말이나 해라.”

“네...”

목이 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온유야.”

“네...?”

“너 여자친구가 셋이라는 게 여자친구들이 다 알고 그런 거냐?”

“알긴 아는데, 좀 복잡해요...”

“다 들을 테니까 말해봐라. 관계가 어찌 된 건지. 막 건너뛰지 말고 처음부터 차차.”

“... 네...”

외할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있어 봐라. 네 외할머니 부르고 오게.”

“네...”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온유 왔어, 빨리 일어나 봐요, 라고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술 마셨어요, 한 모금만 마셨어, 아유, 내가 술을 가져다 버리기나 해야지. 얼마 안 가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가 방에서 나왔다. 외할머니가 소파 가운데에 앉고 외할아버지가 소파 왼편에 앉았다. 외할머니가 소주병을 봤다가 나를 쳐다봤다.

“밥은 먹고 왔어?”

“아니요...”

“애가 할 말이 있어서 왔대.”

“그래요?”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보고 대답했다가 고개를 돌려 다시 내게 시선을 맞췄다.

“안 배고프니?밥해줄 테니까 일단 먹고 얘기해라.”

“아뇨 저 밥은 올라가서 먹으려고요. 시간도 별로 없고 해서...”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 시간도 밤 다 돼 가는데 어딜 또 가려고.”

“저 내일 학교 가야 돼서요...”

“아 그렇구나... 그래도 저녁은 먹어야지.”

“빨리 올라가 봐야 돼서요...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그럼 뭐 빵이라도 먹을래?”

아니라고 답하기 어려웠다.

“네...”

“그래. 너 도넛 같은 거 좋아하지? 단팥빵 같은 거 말고. 근데 저기 어디야, 빵집 새로 생긴 데 있는데 거기 단팥빵도 맛있어. 꽈배기도 맛있고.”

“맛있겠네요.”

“다 있는데 하나씩 해서 줄까?”

“아뇨 저 그냥 도넛만 주세요...”

“그래. 있어 봐봐.”

외할머니가 일어나서 도넛 박스를 가져왔다. 열었는데 글레이즈드 도넛, 초코 도넛, 핑크 도넛 같은 게 총 다섯 개 들어 있었다. 초코 도넛을 잡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봤다.

“당신도 먹을래요?”

“난 됐어.”

“그래요.”

외할머니가 박스를 닫고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나를 바라봤다.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한 번 심호흡했다. 외조부모님이 잠잠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한없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입을 열기가 미치도록 어려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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