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사고 (8)
* * *
몸이 흔들렸다.
“온유야아...”
윤가영 목소리였다. 두 눈을 떴다. 무릎 꿇고 있는 윤가영이 양손으로 내 양팔을 붙잡고 약하게 흔들고 있었다. 윤가영의 얼굴은 두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린 길이 나 있었다.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 울었어요?”
“흡... 응...”
상체를 세우고 윤가영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윤가영은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왜 울었어요?”
“나, 흑... 약 사 먹었는데, 흡... 근데도 임신하면, 끄읍... 어떡해...?”
“...”
자기 전 기억들이 머리를 스쳤다. 머리가 하얘졌다. 끔찍하게 미안했다. 지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윤가영한테도 미안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이돌 데뷔에만 전념하고 있을 김세은한테도 미안했다. 나를 믿고 집열쇠를 준 백지수한테도 미안했고, 내게 순애보를 보여온 송선우한테도 미안했다. 눈물 흘리는 윤가영이 흡, 끕,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나만을 바라봤다. 일단 두 팔을 벌렸다. 윤가영이 내 품 안에 들어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윤가영의 가슴이 부드럽게 짓눌렸다. 자지가 솟아올랐다. 이럴 때가 아닌데.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꾹 참고 윤가영을 세게 안아주었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나, 끕... 낙태해야 되는 거, 흡... 아냐...? 흐윽...”
“안 돼요.”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임신했을 때 어찌해야 할지를 두고 백지수랑 얘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애가 생긴다면 어떡할 거냐는 물음에 나는 낳아야 하리라고 답했고, 백지수도 그에 동의했다.
“애가 무슨 죄예요.”
죄는 내가 지은 거였다. 값을 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름 아닌 나였다.
“죄는 내가 지은 건데 왜 애가 벌을 받아요.”
“흡... 내가, 끅... 죄지었어...”
“... 우리가 죄지은 거인데 애가 왜 벌을 받아요.”
“흐읍... 흐윽...”
“만약에 애 생기면, 낳아요. 낙태 얘기하지 말고.”
“근데, 흑... 나 네 새엄만데... 흡... 낳으면 근친인데...”
“그건...”
말문이 막혔다. 어떡해야 할까. 애를 낳는다고 하면 생길 문제가 너무 다양했다. 당장 김세은, 백지수, 송선우한테 어찌 설명할 것부터 난관이었다. 출생 신고를 하고 기르는 것까지 생각하면 단순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미안해 온유야...”
“당신이 왜 미안해요.”
“내가, 흑... 다 망쳤잖아...”
“아니에요.”
“끅... 흡...”
“당신 잘못 아니에요. 내가 당신 덮친 거니까.”
“흑... 아니야아... 끕... 내가 너, 흡... 유혹했으니까...”
“그럼 서로 잘못한 거로 해요.”
“흡... 응...”
윤가영이 훌쩍이면서 호흡을 골랐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머리를 감싸 안고 오른손으로 윤가영의 등을 쓸어 주었다. 머릿속으로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별장으로 돌아온 백지수에게 내가 윤가영과 섹스했다고 고백하고 송선우에게도 말해야 했다. 윤가영이 정말 임신할지도 모르는 중대한 사안이니 전화로 하면 안 되고 만나서 말해야 할 거였다. 나중에는 김세은한테도 내가 윤가영과 섹스했다고 얘기해야 했고, 애가 생겼다면 낳아서 기를 작정도 해야 했다. 그리고 이준권도 염두에 둬야 했다. 이준권도 언젠가는 한국으로 돌아올 거고 윤가영의 임신 사실을 알 거였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콧숨을 내쉬었다.
그 모든 것을 하기 전에, 지금 당장은 침구를 정리하고 윤가영을 안정시켜야 했다. 이대로 윤가영이랑 껴안은 채로만 있으면 안 될 거였다. 일단 침대부터 정리하고 윤가영에게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서 마음을 달랠 수 있게 해야 했다. 혼자 내버려 두면 불안할 테니 내가 잠시나마 옆에 있어 줘야 할 거였다. 왼손을 뻗어 폰을 봤다. 세 시 사십육 분이었다. 백지수가 학교가 끝나고 바로 온다면 조금 위험한 시간대였다. 저녁에 홍대에서 버스킹을 하고 온다 하기는 했지만, 혹시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가영 씨.”
“응...?”
“우리 일단 집으로 가요. 택시 불러요.”
“너는...?”
“전 일단 시트 커버 갈아야 돼요.”
“그건 내가 할게... 일단 씻고 옷 입어...”
“알겠어요.”
화장실로 들어가 수건을 꺼내놓았다. 전신에 물을 대충 끼얹고 스펀지에 바디 워시를 짜 빠르게 거품을 묻혔다. 물로 씻어내리고 머리에 물을 묻혔다. 샴푸는 하면 안 될 듯했다. 바로 수건을 잡아 물기를 닦았다. 문을 나섰다. 윤가영이 시트 커버를 말아 품에 안고 있었다.
“이거 어떡해...?”
“일단 화장실에 대야 있으니까 거기에 넣고 물 담가놔요.”
“응...”
윤가영이 화장실로 들어갔다. 옷을 입고 물티슈를 여러 장 뽑아 침대 시트를 문질러 닦았다.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놓은 소리가 들려왔다.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시트 커버를 꺼냈다. 윤가영이 화장실에서 나와서 나를 쳐다봤다.
“도와줄까...?”
“네.”
윤가영이 침대 반대편으로 가 시트 커버를 맞잡았다. 빠르게 끼워 넣었다. 윤가영이 곧장 화장실로 도도도 달려갔다. 뒤따라 가봤다. 윤가영이 밸브를 잠그고 오른쪽으로 획 돌아 나를 쳐다봤다.
“이제 어떡해...?”
“택시 부르고 가야죠.”
폰을 잡아 집을 목적지로 해서 택시를 불렀다. 윤가영을 바라봤다.
“챙겨야 될 거 없죠?”
“응...”
“나가요.”
“알겠어...”
윤가영이 내 왼편으로 와서 섰다. 나만 올려다 보는 모습이 왠지 불안해보였다. 윤가영의 오른팔을 잡아서 왼팔로 팔짱을 꼈다. 윤가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걸어요.”
“응...”
빠르게 걸었다. 윤가영이 내 보폭에 맞췄다. 계단을 밟아 1층으로 내려갔다.
“저 외투 좀요.”
“알겠어.”
윤가영이 팔짱을 풀어줬다. 대충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 걸치고 윤가영에게 다가갔다. 안색이 별로였다.
“웃어요. 당신 웃는 게 예쁜데.”
윤가영이 미소 지었다.
“알겠어...”
“좀 낫네요. 근데 더 웃음 좋을 거 같은데.”
“웃을게...”
양손을 들어 올려 엄지로 윤가영의 입꼬리를 지그시 눌렀다. 윤가영이 눈웃음 지었다. 엄지를 뗐다. 윤가영이 빙긋 웃었다.
“이제 좀 말 듣네요.”
“응... 나 웃었으니까 너도 웃어줘...”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됐어요?”
“응...”
양손으로 윤가영의 얼굴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왠지 나 자신에게 스스로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알겠어...”
얼굴을 가까이 해 가볍게 입맞춤했다. 윤가영이 미소 지었다. 다시 입술을 맞췄다. 윤가영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제 나갈까요?”
“그래...”
왼손으로 윤가영의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현관을 향했다. 같이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섰다. 비가 그쳤지만 아직 먹구름이 남아 하늘은 어둑했다. 왼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가 없었다. 윤가영을 바라봤다. 윤가영이 나를 멀뚱히 마주 보다가 아, 하고 소리를 내고는 오른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나 나갔을 때 네 열쇠 챙기고 나갔어서...”
“알아요.”
“으응...”
윤가영이 문을 잠갔다.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가고 바로 닫아버렸다. 윤가영이 왼손 검지로 내 오른 손등을 쿡쿡 찔렀다. 윤가영을 바라봤다. 윤가영이 깍지를 낀 서로의 중지 사이를 왼손 검지 끝으로 훑었다. 간지러웠다. 살폿 웃으면서 깍지 낀 것을 풀어줬다. 윤가영이 미소 지으며 키링을 건네줬다. 오른손으로 받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윤가영이 자기 오른 주머니에 오른손을 넣었다. 윤가영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정면을 보면서 택시를 기다렸다. 이내 지정된 택시가 도착했다. 걸어가서 뒷문을 열고 윤가영이 먼저 들어가게 기다렸다. 윤가영이 나를 올려보다가 안에 들어갔다. 다음으로 타서 택시 문을 닫았다. 택시가 곧 출발했다.
택시 기사님이 과묵한 편인지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아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귀에 들어왔다. 말이 많은 기사님이 걸린다면 윤가영과 내 사이를 물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 다행인 일이었다.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윤가영을 바라봤다. 윤가영이 원래 나를 보고 있었는지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많이 불안한 건가. 왼손을 쫙 펴고 손등을 시트에 댔다. 윤가영이 내 왼손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보다 오른손을 얹었다. 내가 먼저 깍지를 꼈다. 윤가영이 마주 깍지를 끼고 왼쪽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윤가영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뭔가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윤가영도 이런 느낌을 받을까. 궁금했다.
집 앞에서 택시가 멈춰섰다. 그제서야 깍지낀 손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윤가영이 뒤따라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문을 닫았다. 윤가영이 나를 쳐다보면서 왼 주머니를 뒤져 키링을 찾고는 대문을 열었다. 집으로 들어가고 바로 문을 잠갔다. 신발을 벗으면서 신발장도 훑어봤다. 이수아가 평소 신는 신발은 안 보였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윤가영을 바라봤다.
“수아 아직 안 왔어요?”
“아마...?”
“뭐 문자나 연락 같은 거 없었어요?”
“다섯 시 반쯤에 온다고 하기는 했어...”
“저녁 같이 먹는 거네요.”
“응...”
수아가 올 때까지 있어주면 될 듯했다. 두 팔을 벌렸다. 윤가영이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그러지 말고 나 좀 안아줘요.”
윤가영이 살폿 웃고 두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윤가영을 세게 안아줬다.
“안아 들어서 침대로 데려가 줄게요.”
“안 그래줘도 되는데...”
“내 마음이에요.”
“으응...”
윤가영을 안은 팔을 풀었다. 윤가영이 나를 놓아줬다. 곧바로 왼무릎을 꿇었다. 윤가영이 두 팔로 내 목을 안아왔다.
“고마워...”
픽 웃었다.
“그래요.”
윤가영을 안아 들고 천천히 걸어 2층으로 올라갔다. 오른손으로 문손잡이를 열고 왼발로 밀어 안에 들어갔다. 왼발을 써 문을 닫고 침대에 윤가영을 살포시 내려줬다. 윤가영의 왼편에 누워 이불을 덮어주고 윤가영을 마주 봤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오른 볼을 어루만졌다. 윤가영이 오른팔로 나를 안았다. 얼굴을 가까이 해 윤가영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윤가영이 빙긋 웃었다. 사후 피임약을 먹었던 것을 감안하면 표정이 꽤 괜찮아 보였다. 장소를 옮긴 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윤가영한테도 내가 여자친구가 있다고 고백해야 하는데. 지금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럴 것 같았다. 아마 지금만 한 적기를 찾기도 어려울 듯싶었다.
“가영 씨.”
“응...?”
“나 말할 거 있어요.”
“뭔데...?”
“나 원래 여자친구 있어요.”
“... 으응...”
표정이 별로 바뀌는 게 없는 게 그리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세 명 있어요.”
원래도 큰 윤가영의 눈이 더 커졌다.
“어...?”
“이제 당신까지 네 명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
“당신이랑 섹스했던 데가 두 번째 여자친구 별장이었어요.”
“... 그니까 네 말은, 전여친이 아니라는 거지...?”
“네. 다 동시에 사귀고 있어요.”
“... 그렇구나...”
“미안해요.”
“... 아냐... 괜찮아... 내가 너 유혹한 거니까... 사과는 내가 네 여자친구들한테 해야지...”
살폿 웃고 윤가영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사과는 내가 당신 몫까지 할게요.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 알겠어... 고마워...”
뭔가 의기소침해 보였다. 네 번째라고 얘기해서 그런 건가. 확실히 삐쳐도 좋을 말이기는 했다. 근데 새엄마라는 사람이 새아들의 네 번째 연인이라 해서 기가 죽는다니. 조금 웃겼다. 윤가영이 내 얼굴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왼손으로 윤가영의 오른 볼을 어루만졌다.
“사랑해줄게요. 당신이 나 사랑해주는 만큼.”
“응...”
윤가영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사랑해요. 내 전용 보지 씨.”
윤가영이 흠칫했다. 픽 웃고 윤가영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윤가영이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나도 사랑해...”
“왜 존댓말 안 해요?”
“... 창피해서...”
“섹스할 때는 안 창피했어요?”
“... 네 거 안에 들어오면, 나 진짜 아무 생각도 못 해서...”
“진짜 야하네요 당신.”
“으응...”
눈웃음 지었다.
“키스할래요?”
“좋아... 요...”
왼손으로 윤가영의 얼굴을 붙잡았다. 윤가영이 오른팔로 내 등을 안은 채 몸을 밀착해왔다. 윤가영의 가슴이 맞닿아와서 부드럽게 짓눌렸다. 서로의 입술을 포갰다.
“하웁... 아움... 쮸읍... 츄읍... 헤웁... 아움... 쯉...”
윤가영의 혀가 얽혀들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이 늘었다는 느낌이 뇌에 꽂혀왔다.
이제 내가 평생토록 사랑하며 책임져야 할 사람은 넷이었다. 아니 어쩌면 다섯이 될지도 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