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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238화 (238/438)

〈 238화 〉 왜 그래요 (3)

* * *

왼팔이 아팠다.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근력 운동을 왜 했을까. 그래놓고 약도 안 먹고. 어제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눈을 뜨고 왼 소매를 걷어봤다. 아직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폰을 잡아 켜고 빛을 비췄다. 뭐 어디 덧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은 가야 할 듯했다.

폰 화면을 봤다. 4월 12일 월요일, 시간은 9시 27분이었다. 대충 씻고 택시를 불렀다. 방을 나서니 허기가 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운동하고 나서 먹은 게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냉장고에서 200ml 우유를 한 팩 꺼내고 초코 도넛도 하나 집어서 나갔다. 먹으면서 기다리니 택시가 왔다. 탑승해서 다 먹어치우고 창밖을 내다봤다. 조금 멍했다. 약간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그랬나. 이수아는 학교 간 거일 테고, 윤가영은 왜 없었지? 그냥 2층에서 계속 자는 걸까. 그럴 수도 있을 듯했다.

감사하다고 하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병원에서 접수하고 진료실 안에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의 의사가 눈을 크게 뜨면서 팔이 또 아프냐고 말했다. 왼팔이 조금 아프다고 답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소매 걷어보세요.”

“네.”

소매를 걷어붙여서 왼팔을 내보였다. 의사가 양손으로 내 왼 손목을 잡아 들여다보더니 오른쪽으로 돌려서 반대편도 들여다봤다.

“음. 어제 팔 많이 썼어요?”

“조금 썼어요. 근데 엑스레이 좀 찍어보면 안 될까요?”

“그래요.”

의사가 말하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겨 엑스레이를 촬영했다. 의사가 화면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화면 좀 볼래요.”

“네.”

고개를 기울여 화면을 바라봤다. 그냥 척 봐도 멀쩡해 보이는 왼팔 뼈가 있었다.

“뼈에는 정말 아무 이상 없어요.”

“네. 저도 알 것 같아요.”

의사가 피식 웃었다.

“팔 줘보세요.”

“알겠습니다.”

왼팔을 뻗었다. 의사가 손목 부분부터 약하게 누르면서 점점 위쪽으로 올라갔다.

“아프면 말해요.”

바로 다음 순간에 눈살 찌푸려졌다.

“아파요.”

“반대편 팔도 줘봐요.”

오른쪽 팔도 줬다. 의사가 똑같이 주물렀다.

“약간만 아파도 아프다 해요.”

“네 아파요.”

의사가 웃었다.

“그냥 근육통이에요. 어제 팔 되게 많이 썼죠? 조금 쓴 게 아니라.”

“... 네.”

“알겠어요.집에 약 아직 많이 남았죠.”

“며칠 먹어야죠.”

“지금 많이 아프면 하루 치만 처방해줄게요.”

“네. 해주세요.”

“알겠어요. 좀 쉬어요, 힘 쓰지 말고. 상처 덧나지 않게.”

“알겠습니다.”

의사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빙긋 웃었다. 의사가 이제 나가서 처방전 받고 가면 돼요, 라고 말했다.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녕히 계세요, 라고 말하고 나갔다.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았다. 택시를 타고 생각 없이 집 주소를 불렀다. 택시가 출발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그래도 어차피 내가 사는 집인데 못 갈 것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문자 앱을 확인했다. 정이슬에게서 문자가 많이 와 있었다. 요즘은 별로 안 보냈는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눌러봤다.

[온유야]

[온유야]

[이온유]

[ㅇㅇㅇ]

[ㅑ]

[ㅑ]

[ㅑ]

[ㅑ]

[ㅑ]

[자?]

[지금 잘 시간 아닌데]

[온ㅠㅑ]

[ㅑ]

[ㅑ]

[너 목요일에 학교 나오는 거 맞지?]

[보면 바로 답장해줘]

[목요일에 가는 건 맞아요.]

[근데 누나 진중해지겠다고 했으면서 왜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폰을 오른 주머니에 넣었다. 금방 진동이 울렸다. 다시 꺼내봤다.

[나인데 이 정도면 진중하지 않아?]

[너 목요일에 오는 거는 오케이 확인]

불길했다.

[뭐 할 거 아니죠?]

바로 숫자가 사라졌다. 근데 지금 쉬는 시간인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작성 중 표시가 떴다.

[뭐 안 해]

[누나 근데 지금 수업 안 해요?]

[수업 중]

[근데 왜 폰 만져요?]

[네가 더 중요하니까]

[누나 시험 안 볼 거예요?]

[시험 그거 어차피 사월 말에 보니까 아직 널널하지]

[아 근데 너 어떡해 시험 쳐야 하는데?]

[다른 애들한테 물어봐야죠. 누나 이제 폰 그만 봐요.]

[아냐 괜찮아 쌤 잡담하는 시간이야]

[근데 너 진짜 힘들겠다. 수업 진도 다 나갔을 건데.]

[내가 공부만 잘 했으면 수학이나 영어 그런 거 다 알려줬을 텐데]

[우리 집에 불러서(중요)]

피식 웃었다.

[괄호치고 중요 쓴 거 뭐예요]

[왜?]

[귀여웠어?]

[어떻게 본인 입으로 귀엽다고 해요?]

[그럴 수도 있지]

[누난 좀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오히려 좋아]

[하나씩 맞춰가는 재미]

[죽을 때까지 즐길 수 있을 거야]

[좀 무섭네여]

[어 너]

[오타예요]

[너 지금]

[나한테 애교 부린 거야?]

[오타라 했잖아요]

[이미 박제했어]

[너 내 인별에 올릴 거야]

[아 하지 마요]

[우리 학교 밴드부장의 실태 이러면서]

[누나 그럼 누나 수업시간에 폰한 거 들키잖아요]

[그냥 네가 한 말만 자르면 되지]

[아 좀 하지 마요]

[그럼 너 목요일에 학교 오면 제일 먼저 나 보러 와야 돼]

[네 반 들어가기도 전에 우리 반 찾아와서 나 먼저 봐]

이걸 뭐라 답장해야 할까.

[아니다. 나 그냥 밴드부에 있을게.]

[일곱 시부터 있을 테니까 나랑 얘기 많이 하고 싶으면 빨리 찾아와줘]

헛웃음이 나왔다.

[누나 때문에 저 진짜 미칠 거 같아요]

[너도 나한테 빠지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와 왤케 단호해?]

[온점 보고 살짝 마상 입었다]

[전 누나가 문자 보낸 거 알았을 때나 누나가 전화해서 화면에 누나 이름 뜨면 심장 떨려요]

[진짜?]

[너 그거 사랑이야]

진짜 밑도 끝도 없었다.

[잘 됐다]

[우리 함께 예쁜 사랑 가꿔보자.]

[누나 이제 수업 들어요]

[다 들었어]

[지금 쉬는 시간이야]

[그럼 다음 수업시간 준비해요]

[말 돌린다]

[너 그럼 안 돼]

[아 왜요]

[너 이것도 박제할 거야]

[이건 왜 박제하는 건데요?]

[앙탈이잖아]

[이게 어떻게 앙탈이에요?]

[귀여우니까?]

한숨이 나왔다.

[누나 저 지금 한숨 쉬었어요]

[지금 전화해도 돼?]

[전화 가능해요?]

[나 밖에 나왔어]

전화가 걸렸다. 정이슬이었다. 그냥 전화할 거면 왜 물어본 건지. 엄지로 화면을 눌러 연결했다.

“여보세요.”

ㅡ여보세요! 온유야!

목소리가 쾌활했다.

“기분 좋은 일 있어요?”

ㅡ있지. 너랑 전화하는 거.

픽 웃었다.

“누나 옆에 누구 없죠?”

ㅡ없지 당연히. 근데 있음 안 돼?

“누나가 막 이상한 말 하잖아요.”

ㅡ뭐가 이상한 말인데?

“아니 방금 전화 받았을 때도 너랑 전화하는 거, 라고 말했잖아요.”

ㅡ그게 왜?

“약간 목소리부터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남자친구인가 하고.”

ㅡ너 지금 내 남친 되겠다고 선언한 거야?

“아니...”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렇게 억지예요.”

히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정이슬한테는 악동 같은 순수함과 짓궂음이 있었다.

“제가 좋아요 그렇게?”

ㅡ응. 근데 너 지금도 나 살짝 홀렸어.

“아 장난치지 말고요.”

ㅡ너 앙탈 부린 거에 또 완전 빠졌어 지금.

“아니... 그냥 말을 하지 말라는 거잖아요 그 정도면.”

ㅡ아니지. 좋으니까 말 계속해달라는 거지.

“그건 제가 싫어요.”

ㅡ그렇게 밀어내는 것도 좋아.

웃음이 나왔다. 살짝 어지럼증이 났다.

“누나 저 살짝 어지러워요.”

ㅡ많이 웃어서?

“몰라요. 아마 그런가 봐요.”

ㅡ그럼 나랑 사귀자. 매일 웃게 해줄게.

“안 돼요.”

ㅡ안 되는 게 안 돼.

“떼쓰지 마요.”

ㅡ히. 난 네가 예스맨이 되는 날까지 계속 이렇게 떼쓸 거야.

“안 받아주고 무시할 거예요.”

ㅡ글쎄.

“뭐가 글쎄라는 거예요?”

ㅡ안 받아주기에는 네가 너무 착하다? 그런 느낌?

“누나가 저 잘못 본 거예요.”

ㅡ아닌데. 너 지금도 내 얘기 너무 잘 들어주잖아.

“지금 너무 심심해서 그런 거예요.”

ㅡ음. 너 츤데레지.

헛웃음이 터졌다.

“뭔 소리예요.”

ㅡ틱틱대면서 다 받아주잖아.

“아뇨 저 이제 전화 끊을 거예요.”

ㅡ왜?

“저 그냥 유튜브 볼 거예요.”

ㅡ헐. 이건 좀 심했다.

“끊을게요.”

ㅡ안 돼.

“왜요?”

ㅡ선생님 썰푸시는 것도 못 듣게 하면서까지 노리개로 써놓고 이렇게 내팽개치겠다고?

“쌤 말 안 들은 건 누나 선택이지 제가 강요한 게 아니잖아요.”

ㅡ아냐. 난 네 부름에 답할 수밖에 없는 노예야 반 정도는.

“오바하지 마요.”

ㅡ아니 진짜루.

“저 갖고 장난치는 거잖아요.”

ㅡ아냐 너 나 진지한 거 알잖아. 토요일에 사과했을 때 다 말했는데.

“... 그럼 제가 왜 그렇게 좋은데요?”

ㅡ그냥?

“그냥이 뭐예요.”

ㅡ그냥이 그냥이지. 근데 이거 제대로 말하려면 좀 진지하게 답해야 되는데. 괜찮아?

“전 괜찮죠. 오히려 듣고 싶어요. 왜 좋은지.”

ㅡ어... 내가 정말 말해주고 싶기는 한데, 쉬는 시간이 다 되어가네?

픽 웃었다.

“누나 지금 진지해지려니까 창피하죠.”

ㅡ나 진지해진다고 창피해지는 사람 아니거든?

“그럼 얘기해줘요.”

ㅡ하... 너 진짜 집요하고 나쁜 남자다.

“맞아요.”

ㅡ그래서 더 좋아.

헛웃었다.

“돌림노래예요? 오히려 좋다, 그래서 더 좋다.”

콧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ㅡ그냥 네가 좋아서 네 모든 게 좋아지는 거 같아.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 지금 진지하게 얘기한 거예요?”

ㅡ응.

“...”

ㅡ난 그냥 네가 좋아.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하나도 없고. 근데 무슨 이유를 더 찾아야 돼.

정말 진심이라는 게 느껴져서 섣불리 답할 수가 없었다.

ㅡ이제 진짜 수업시간 된다. 끊을게.

창피한 모양이었다.

“알겠어요.”

ㅡ응. 목요일에 나 제일 먼저 봐야 돼.

“... 네.”

히 웃는 소리가 들렸다.

ㅡ고마워.

“네.”

ㅡ네가 전화 끊어주라.

“알겠어요. 수업 열심히 들어요.”

ㅡ응.

전화를 끊었다. 한숨이 나왔다.

일부러 자리를 피해서 전화를 받은 걸 보면 조금 달라진 거 같기는 한데. 지금까지의 경험 탓에 돌발행동을 아예 안 할 것이라는 확신은 잘 안 들었다.

언젠가 한 번 크게 혼나봐야겠다고 말한 것도 있었고. 그건 진짜 자기실현적 예언으로밖에는 안 들렸다.

지레 걱정하는 걸까. 제발 그런 것이기를 바랐다.

차창 밖을 내다봤다.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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