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장례식 (20)
* * *
정이슬, 송선우, 백지수, 서유은을 전송했다. 피곤했다. 바로 자고 싶었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윤가영에게 문자 보냈다.
[이제 돌아와도 돼요]
곧바로 답장한다는 표시가 떴다.
[알겠어. 지금 갈게.]
[네.]
폰을 끄고 오른 주머니에 넣으려 했는데 안 들어갔다. 뭔가 하고 봤는데 담뱃갑 때문이었다. 비집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한숨이 나왔다. 백지수한테 고백해야 했는데,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다. 베개를 베고 누웠다. 멍하니 있는데 문이 열렸다. 외할아버지가 나를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밥 안 먹냐?”
“네 저 좀 잘게요...”
“... 그래. 일어나면 꼭 먹어라.”
“네 감사해요.”
외할아버지가 불을 끄고 문을 닫았다. 일곱 시 반에 알람을 설정해두고 눈을 감았다.
알람이 울렸다. 벌써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왼손을 뻗어 폰을 잡았다. 눈을 뜨고 오른손 엄지로 화면을 눌러 알람을 껐다.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외할머니가 주무시고 계셨다. 문 옆에 윤가영의 에코백이 보였다. 걸어가서 안을 들여다봤다. 새로 샀는지 뜯지도 않은 피임약이 있었다. 괜히 심술 피우고 싶었다. 피임약을 꺼내서 왼 주머니에 넣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서 외할아버지랑 윤가영의 가운데에 섰다. 장례식장에 사람의 절대적인 수가 줄어들어서인지 조금 한적했다. 오른편에 있는 윤가영이 눈을 꿈뻑꿈뻑 감으면서 자꾸 고개를 꾸벅거렸다. 오른 팔꿈치로 윤가영의 왼팔을 약하게 툭 쳤다. 윤가영이 고개를 들면서 눈을 번쩍 뜨더니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졸려요?”
“... 응...”
“자요, 들어가서.”
“으응...”
문을 열어줬다. 윤가영이 안에 들어가서 다섯 발자국도 안 디디고 바로 누워서 왼팔을 뻗어 내 베개를 집어 머리에 벴다. 어지간히 졸린 모양이었다. 문을 닫고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외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외할아버지는 안 졸리세요?”
외할아버지가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다. 이미 많이 잤다.”
“네.”
“근데 온유야.”
“네?”
“너 자기 전에 온 여자애들 말이다...”
“네.”
“그중에 네 여자친구 있는 거냐...?”
“... 있죠...”
“그래...”
침묵이 찾아왔다. 외할아버지가 흐음, 하고 콧숨을 내쉬고 또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말이다...”
“...”
“아침에 네 여자친구 희망자라고 한 애도 그렇고, 다 너한테 적잖게 호감을 품은 거 같은데... 그니까 이성으로서 널 좋아한다는 감이 드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
“...”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흐음... 애들이 호감을 가진 게 뭐 네가 막 뭘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마는... 좀 어떻게 여자친구 아닌 애들은 밀어내야 할 데까지는 밀어내고 해야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네...”
외할아버지가 오른손으로 내 등을 툭툭 쳤다.
“내 늙어서 그런가 걱정이 막 들어서 한 말이다. 네가 어련히 잘할 거 안다.”
“... 감사해요...”
“배고플 건데 밥 먹어라.”
“네. 근데 저 잠시만 바람 쐬러 나갔다 올게요.”
“그래.”
신발을 신고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피임약을 1층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옥상문을 잡고 열었다. 곧바로 들이닥치는 밤바람이 시원했다. 밖에 나오면서 문을 닫고 오른편 가드라인 쪽으로 걸었다. 흰빛을 뿜는 도시가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외할아버지는 오늘 온 사람 모두가 나한테 이성으로 호감을 많이 품은 거 같다 했는데, 그럼 유은이도 나한테 이성으로서 호감이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클까. 송선우나 정이슬처럼 내게 갑자기 입술을 부딪을 정도로 나를 좋아할까? 한숨이 나왔다. 모르는 사이라면 모를까 이미 너무 친한 사이인데 나를 좋아하는 여자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거리를 둬야 하는 건 맞겠지만 갑자기 여러 사람을 너무 밀어낸다면 여자친구가 생겼구나, 하는 의심을 받을 게 뻔했다. 어떻게 의심을 사지 않고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교우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뒤돌아 옥상의 안쪽 구석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왼 주머니에서 담뱃갑이랑 라이터를 꺼내 잠시 들여다보다가 담뱃갑을 열었다. 여섯 개비가 들어 있었다. 한 개비를 꺼내 필터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시 물고 입에서 빼면서 연기를 뿜어내기를 반복했다. 더럽게 썼다. 뭘 이딴 걸 피우는 걸까. 눈이 찡그려졌다. 한 입 빨아 들여봤다. 역겨운 기체가 목구멍을 넘어가 폐를 덥혔다. 콜록콜록, 하고 기침했다. 따뜻한 쓰레기를 입에 문 느낌이었다. 차츰 정신이 몽롱해졌다. 생각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방금까지 느껴지던 압박감도 줄어들었다. 지금이라면 어머니를 떠올려도 못 견디게 슬플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가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어떡하셨을까. 분명 담배를 잡은 내 검지랑 중지를 잡아 뜯으며, 너 내가 담배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그래, 라는 식으로 말했을 거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입에서 뺐다. 후, 하고 부니 연기가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곧바로 우울해졌다. 이제 나는 어머니를 꿈에서밖에 만날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에서 찾아야 하고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는 결코 다른 말을 하지 않는 동영상을 봐야만 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담배를 입에 물고 한 입 빨고 연기를 뿜어냈다. 회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윤가영과 일상적으로 말을 섞었던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복수해도 모자랄 사람인데. 헛웃음이래도 입꼬리를 올렸던 내가 혐오스러웠다.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새 담배를 입에 물어 불붙였다. 이준권과 윤가영 모두한테 복수해야 했다. 윤가영은 몰라도 이준권만큼은 어머니가 아파한 것 이상으로 아프게 해야 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했다. 담배 연기를 뿜었다. 속이 천천히 훈연되어 가는 듯했다.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윤가영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던 나를 스스로 벌주는 느낌이었다.
이준권한테는 어떻게 복수해야 할까. 막막했다. 도통 상처를 잘 받지 않는 사람인데 내가 무슨 수로 아프게 할까. 그냥 정지연이 사회적 위신을 떨어뜨리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까. 마음에 안 들었다. 내 손으로 끔찍한 아픔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흘린 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게 하고 싶었다. 담배를 쭉 빨아들이고 연기를 뿜었다. 다 타들어 가면 바닥에 떨어뜨리고 짓밟은 다음 새 개비를 물어 불을 붙였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이준권에게 복수할 방법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네 번째 개비를 피우고 있을 때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순간 화악, 하고 옥상문이 열려서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다. 누가 나를 찾으러 온 걸까? 그럼 담배를 피우는 걸 무조건 들킬 텐데. 지금이라도 입에 문 걸 땅에 버리고 일어서서 신발로 비벼 꺼 가지고 모르는 척해야 하나. 근데 그런다고 어차피 속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혼나고 말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문에서 나온 사람은 누굴까. 정면을 뚫어져라 봤다. 곧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 바지에 검은 양복 차림임에도 낭창한 허리랑 커다란 골반과 엉덩이가 눈에 띄었다. 틀림없이 윤가영이었다. 담배 연기를 뿜었다. 뛰어왔는지 숨을 막 헐떡이는 윤가영이 몸을 살짝 숙이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뒤돌아서서 나를 발견했다.
“하아... 후우... 온유야...”
“뛰었어요?”
“헤엑... 응...”
담배를 물고 한 입 빤 다음 연기를 내뿜었다. 허연 연기 너머로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는 윤가영이 느릿느릿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담배를 뺏으려 하는 거 같아서 일어나서 잠시 달렸다가 뒤돌아 뒷걸음질 치면서 담배를 빨고 연기를 뿜었다. 윤가영이 느리지만 꾸준히 발을 디뎌 다가왔다.
“담배 피우면 안 돼...”
“싫어요.”
담배를 빨고 연기를 뿜어냈다.
“어떡할래요?”
“어떡하긴...”
뒤를 슬쩍 봤다. 가드라인이 가깝지는 않았다. 갑자기 내 몸에 뭔가가 덮쳐오는 느낌이 들었다. 앞을 봤다. 헥헥대고 입으로 숨을 쉬는 윤가영이 내 가슴에 오른 볼을 붙인 채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백지수보다 커다란 가슴이 상체에 맞닿아 그대로 짓뭉개져서 부드러운 느낌이 몸을 덮쳐왔다. 자지가 껄떡거려서 윤가영의 배를 툭툭 건드렸다. 하아, 하아, 하고 입으로 숨 쉬는 윤가영이 고개를 들었다. 커다랗게 뜬 눈이 마구 흔들렸다. 아니 미친 진짜. 오른손 검지랑 중지에 끼운 담배를 놓고 두 손을 윤가영의 어깨에 얹어서 뒤로 밀었다.
“진짜 미쳤어요?”
“하악... 미안해... 헥...”
윤가영이 몸을 살짝 숙인 채 두 손을 무릎에 대고 고개를 숙여 숨을 헐떡였다.
“아니...”
한숨이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오른발로 비벼 껐다.
“뭐 할 때면 좀 생각하고 나서 해요.”
“헥... 알겠어...”
“...”
윤가영이 고개를 들고 왼손을 뻗어왔다.
“하아... 돌아가자... 외할아버지께서, 학... 너 밥 먹으래...”
“... 좀 이따가 갈게요.”
윤가영이 손을 내려 무릎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하악... 응...”
“...”
윤가영의 바닐라 베이지로 염색한 머리를 내려봤다. 뒤통수가 아무리 봐도 귀여웠다.윤가영이 밉고 또 미운데 외면하기 어려운 사소한 호감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양가감정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속 깊은 곳에서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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