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수요일 (9)
* * *
강혜린이 원장실 문을 잠그고 나를 쳐다봤다.
“밤 돼도 비 온다 해서 나 오늘은 차 끌고 왔는데. 집까지 태워줄까 온유야?”
“아뇨 괜찮아요.”
“음? 그럼 어떻게 가?”
“걸어가요.”
“비 엄청 오는데? 그냥 타.”
“아뇨 저 근처에 만날 사람 있어가지고요.”
“으응...”
강혜린이 유리문을 나섰다. 나도 밖에 나오자 강혜린이 열쇠를 내게 넘겨줬다. 유리문을 잠그고 열쇠를 돌려줬다. 강혜린이 반투명한 우산을 펼치고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 태워줄 수는 있으니까 일단 타.”
“진짜 괜찮아요. 그리고 저 가는 방향도 혜린 쌤 집 반대 방향이에요.”
“잠깐 태워주는 건데 반대 방향이어도 되지.”
“아뇨 저 진짜...”
왠지 이런 식으로 무르게 사양하다가는 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냥 가주세요 누나...”
“... 알겠어.”
강혜린이 우산을 접고 바닥에 떨어뜨렸다. 바람이 세차서 빗방울이 강혜린이랑 나를 우수수 덮쳐왔다. 강혜린이 눈을 질끈 감으며 나를 껴안았다. 살면서 본 가슴 중 제일 커다란 가슴이 내 가슴에 맞닿아 부드럽게 짓뭉개졌다. 발기했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자지를 아래로 누르면서 하늘을 올려봤다. 저주스러웠다.
“괜찮아 온유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필요하면 누나 찾아. 내가 위로해줄게.”
“... 고마워요. 그니까 놔줘요.”
“응.”
강혜린이 몸을 떼고 무릎을 굽혀 왼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잡았다. 내려 보고 있자니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서 어떤 각도로 보든 눈에 띄는 크기의 가슴이었다. 강혜린이 일어나서 우산을 펼치고 나를 쳐다봤다.
“잘 가 온유야.”
“누나도 잘 가요.”
“응.”
강혜린이 아이처럼 미소 지었다. 언제 봐도 남자를 끌어들이는 강한 매력을 가진 미소였다. 강혜린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미소 하나만 보더라도 강혜린이 여태 한 명도 남자친구가 없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할 거였다.
강혜린이 고개를 돌리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우산을 펼치고 별장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모르는 길, 모르는 건물, 우산을 쓴 모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 사이로 비가 쏟아져 공간을 메웠다. 공기가 꿉꿉했다. 가슴이 뜨거웠다. 숨이 막혀왔다.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 빛이 웅덩이에 반사되었다. 사방이 우중충하게 밝은 밤이었다. 이런 밝음은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멈춰서서 눈 감고 싶었다. 편히 숨쉬고 싶었다. 꽃집 쇼윈도로 바이올렛이 보였다. 바이올렛 이것도 영원한 사랑인데, 라고 플로리스트가 왼손에 바이올렛을 집으며 했던 말이 문득 기억났다. 머리가 아파왔다. 김세은이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내 잘못을 빌고 싶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소리 없이 울면서 계속 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갔다. 아무 아파트 단지 쪽으로 들어가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코트랑 바지가 푹 젖었다. 바람이 계속 불어와서 내 몸에 꾸준히 빗방울을 묻혔다. 코트랑 바지가 천천히 젖어갔다. 그냥 우산을 접고 오른편에 내려놓았다. 빗방울이 오른눈에 들어갔다. 오른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입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라갔다. 등골이 서늘했다. 몸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겨드랑이를 감쌌다. 내 두 팔은 나를 감싸기도 버거웠다. 무서웠다. 김세은을 마주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해봐도 머리가 하얘지기만 했다. 왜 백지수에게 재워달라 부탁했을까. 후회스러웠다. 목이 멨다. 울면서 숨을 헐떡이느라 벌어진 입으로 빗방울이 계속해서 들어왔지만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폐가 아팠다. 가슴이 찢겨나가는 것 같았다. 문득 내 품에 안겨 눈물 흘렸던 김세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장면 하나마다 눈물은 같았지만 시간과 장소는 매번 달랐다. 모두 나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다. 모두 내가 울린 거였다. 모두 내 잘못이었다.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용서를 빌고 싶었다. 김세은이 보고 싶었다. 무릎 꿇고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다. 아파한 만큼 몇 번이고 되풀어서 사랑한다고 해주고 싶었다. 트렌치 코트를 입고 검은 장우산을 쓴 어떤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여자가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이고 에코백에서 휴대용티슈를 꺼내 내게 건넸다. 여자의 코트랑 뒷머리카락이 빗방울로 빠르게 젖어갔다. 고개 숙이고 도리도리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주세요... 아, 그, 그냥 휴지만 받아주세요... 아뇨, 끅, 가주세요. 여기에서 비 맞지 마시고 어디든 건물 안으로 들어가세요... 괜찮아요... 그냥, 가요... 정 안 되면 우산만 써주세요... 알아서, 흡, 할게요... 여자가 측은한 눈을 하고 나를 내려보다가 왼손으로 내 오른 어깨를 툭툭 쳤다. 힘내세요... 대답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여자가 갈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서 우산을 펴 머리 위를 막았다. 그제야 여자가 물러났다. 여자가 아파트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보고 다시 우산을 접고 내려놓았다. 발이 축축했다. 발치에 웅덩이가 차서 신발 안으로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제가 우산 쓰라 했잖아요!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여자였다. 내가 걱정된 건지 발길을 돌려 나를 다시 확인한 모양이었다. 오른손으로 우산을 챙기고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많아서 우산을 펼치고 얼굴 쪽을 가렸다. 추웠다. 손이랑 몸이 떨렸다. 빠르게 걸었다. 왼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앞쪽으로 무너졌다.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어머...! 반대편에서 중년 남자랑 같이 우산을 쓰고 걸어오던 중년 여자가 놀랐다. 괜찮으세요? 중년 남자가 물으며 다가왔다. 목소리를 의식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바로 일어섰다. 중년 남자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오른손으로 내 왼팔을 툭 치고 입을 열었다. 힘내요. 네 감사합니다. 중년 남녀가 가던 길을 걸어갔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발길은 결국 백지수의 별장을 향하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도저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두드드, 오른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우산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 꺼내봤다. 백지수였다. 받고 오른 귀 가까이에 댔다. 너 어딨어. 나 지금... 오고는 있어? 응... 그럼 빨리 와. 지금 비도 얼마나 오는데 늦게 오고 있어. 혹시 뭐 했어? 아니... 나 걱정시키지 말고 빨리 와. 알겠지? 알겠어... 너 울었어...? 아냐 안 울었어. 쓰읍, 근데 목소리 좀 운 거 같아 가지고. 진짜 아니지? 응. 안 울었어. 으응... 알겠어. 끊을게. 응. 전화가 끊겼다. 폰을 오른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잠시 몸이 휘청였다.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어봤다. 뜨거웠다. 내일은 엄마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걱정은 끼쳐드리면 안 됐다. 걷는 속도를 빠르게 했다. 왼손으로 키링을 쥐고 있다가 바로 대문이랑 현관문을 열고 우산을 접어 안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캐리어에서 옷을 챙긴 다음 화장실 쪽으로 갔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자취를 남겼다. 옷을 다 벗고 샤워기 헤드를 손에 쥔 채 주저앉아서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차가웠다.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수온을 따뜻하게 바꿨다. 감기 같은 거라도 걸려서 엄마를 걱정시키면 안 됐다. 빠르게 몸을 씻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다음 옷을 입었다. 밖에 나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휴지랑 물티슈로 빗물로 더러워진 바닥을 닦았다. 너 언제 왔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방금까지 자위했는지 얼굴이 상기됐고 브라 없이 입은 흰 민소매는 땀에 젖어 살에 달라붙어 바짝 선 유두를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돌핀팬츠는 보지 쪽이 흠씬 젖어 있어서 최소한 한 번은 절정했다는 걸 알려줬다. 방금. 나 피곤해서 그런데 바로 자도 돼? 미안해. 어...? 어... 근데 이거 물은 또 뭐야...? 오면서 좀 많이 젖어서. 우산 가져갔잖아. 응. 백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대로 나를 가만히 보더니 백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안아줄까...? 아냐 됐어. 고마워.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 먼저 잘게 지수야. 응... 올라가. 넌 침대에서 안 자게...? 응. 백지수가 잠시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내 오빠가 매제라고 해서 그래...? 고개 저었다. 아니야. 그 말보다는 내 죄가 더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으응... 백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수가 2층으로 올라가는 걸 보고 냉장고를 열어 이온 음료를 입 안 대고 벌컥벌컥 마신 다음 불을 껐다. 폰을 충전기에 꽂고 알람을 다섯 시에 맞췄다. 일정에 어머니 보러 가기, 라고 적은 다음 소파에 정자세로 누웠다.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몸이 금방 뜨거워졌다. 왠지 깨어나고 나서는 기침할 것 같았다. 피곤했다. 수마가 몸을 짓눌러 말단부터 감각을 하나씩 뺏어갔다. 깨어났을 땐 기적처럼 엄마가 있는 곳에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엄마를 보고 나서는 투명인간이 되어서 김세은을 만날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럼 정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거였다. 유치한 상상이었지만 미소 지어졌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많이 어린 모양이었다. 스스로도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굳이 이유를 파헤치고 싶진 않았다. 수마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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