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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183화 (183/438)

〈 183화 〉 수요일 (7)

* * *

“백지수한테 물어보세요.”

“이미 둘이 입을 맞췄겠지.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제가 그렇게 한량으로 보입니까?”

“어. 모르나 본데, 성격은 겉에 드러나. 밝음 음침함. 예민함 둔감함. 다. 넌 생긴 게 긍정적인 인상은 안 줘. 잘생기긴 했어도 척 보면 한량이고 안 좋은 분위기 풀풀 풍기는 기분 나쁜 새끼라고.”

“어떡하면 믿어줄 겁니까?”

“어쩌면 믿겠냐고? 너 여태 나랑 대화한 거는 맞냐? 믿기는 뭘 믿겠냐?”

“그러면서 무슨 얘기를 하러 왔다는 겁니까?”

“시인을 받으러 왔지. 백지수 남자친구 맞다는 시인. 그런데 지금 보니까 생각이 바뀌네. 그냥 꺼져라 이 집에서.”

“백지수가머무는 걸 허락했는데요?”

“말이 안 통하는 새끼네 이거.”

뭔가 처맞을 것 같았다. 지금 백도영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연기가 아니었나? 갑자기 겁났다. 백지수 아버님이 날 패지 않았으니 누군가는 언젠가 날 때리겠구나 싶었는데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듯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눈을 부릅 뜨고 마주 보았다. 백도영이 손을 올리지 않고 그냥 아이 컨택을 하다가 갑자기 피식피식 웃었다. 피식거리던 얼굴은 어느새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무슨 생각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매제.”

“...”

느닷없이 매제라니. 이게 목적이었나? 백도영이 도로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그럴 수 있지. 이해해. 피가 안 섞이긴 했어도 여동생인데 섹드립하고 지랄하면 눈 뒤집어져서 존나 팰 수도 있지. 아니 안 그러면 고추 떼야지. 달아서 뭐해. 쓰지도 못할 거.”

“...”

“매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진짜 뭔가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백지수는 그 사정을 알고 있어서 너를 받아들여준 거고.”

“제 말을 믿어준다면 매제라고 안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응? 야. 넌 지수가 널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을 이유로 네가 여기 있는 걸 허락해주는 거 같냐?”

“...”

“걔가 사리분별 못 할 애는 아니거든.”

“...”

백도영이 내 잔에 맥캘란을 좀 더 채워주고 자기 잔에도 따랐다. 백도영이 맥캘란을 한 모금을 머금고 꼴깍 삼키고는 입을 다셨다.

“요즘에 아무리 사람들이 서로 신경 안 쓰고 그걸 예의로 여기고 산다고 해도 이웃끼리 수군거리는 건 있어. 젊은 남자애랑 여자애, 그것도 고등학생인 애들이 같이 산다는 얘기는 특히 잘 돌 거고. 그러다이 주변에 사는 너나 지수 아는 사람이 너랑 지수랑 동거한다는 거 우연히라도 들어서 알게 되면 자기랑 가까운 애들이랑 알음알음 뒷담하듯이 얘기할 거고. 그럼 또 언제 한순간에 확 퍼져서 누구나 다 아는 공연한 사실로 되는 거고. 그때 되면 진짜 좆 박는 거지.”

백도영이 또 맥캘란을 한 모금 마셨다.

“너는 뭐 남자니까 다른 사람이랑 만나고 어떻게 한다고 쳐. 근데 백지수는 어떡하냐? 고딩 때 잘생긴 남자애랑 동거하다가 걸린 여자애되는 건데? 걸레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개 좆 같은 소리 다 듣지 않겠냐?”

백도영이 맥캘란을 벌컥벌컥 마셨다.

“아 진짜생각할수록 더 좆같네.”

백도영이 다시 잔을 채웠다.

“너 살면서 여자 몇 명 사귀었냐?”

“... 그런 걸 왜 묻는 겁니까?”

백도영이 눈을 마주쳐왔다.

“세 명? 네 명?”

“...”

“다섯 명? 일곱 명? 여섯 명? 두 명? 두 명. 음.”

백도영이 오른팔을 테이블에 대고 오른손으로 턱을 쓸었다.

“두 명이면... 그 선상카페에서 듀엣한 두 친구?”

서유은이랑 김세은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뭐라 답해야 할까. 그냥 입을 다무는 게 나을 듯했다.

“와 얼굴값하네. 보통이면 소문 다 나고 학교에서 친구 선배 후배한테 다 손절 당했을 건데. 선생님들도 아니꼽게 볼 거고...”

어조랑 말의 내용이 너무 사람을 긁었다. 속이 끓었다. 맥캘란을 마셨다.

“오. 게임하자는 거야? 대답하기 싫으면 독주 마시기?”

백도영이 내가 마신 만큼 맥캘란을 더 채워줬다.

“매제.”

“...”

“매제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어?”

“네. 숨 막힙니다.”

“그럼 매제 사연이나 들려줘.”

“듣고 나서는 매제라고 안 하실 겁니까?”

“내용에 따라서.”

왠지 거짓말 같았다.

“어차피 지수한테 물어볼 거니까 지금 얘기하는 게 네 이미지 관리에 좋을 거야.”

어지러웠다.

“빨리.”

“그럼 듣고 나가주세요.”

백도영이 큭큭 웃었다.

“알겠어.”

몇 번이고 늘어놓아서 이제는 아무 막힘 없이 기계적으로 말할 수 있었다. 빠르게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외도와 어머니의 귀향, 새어머니와 함께 등장한 여동생 이수아, 서로 얽힌 복잡한 감정과 투닥이는 사이, 이수아의 썸남과 아무 상의 없이 한 남자친구 행세, 이수아가 복수한다고 학교에서 연기를 펼친 일. 친구 한 명이 개소리해서 때려 버리고 화해하러 병원에 가서 병실에서도 쥐어 박은 일, 학폭위와 등교 정지, 그리고 애초에 집이 집 같지도 않았는데 등교 정지를 당한 지금 상태에 집을 가면 이수아를 때리기라도 할까봐 지금은 백지수한테 신세지는 중이라는 것까지 다 말했다.

“진짜야?”

백도영이 물었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턱을 괴고 곰곰히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던 백도영이 막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지은 채 오른손을 뻗어왔다.

“미안해. 몰아붙여서.”

“... 네.”

손을 맞잡았다. 만약 방금 친구라고 말하는 대신 여사친이라고 했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두려웠다. 백도영이 내 손을 한 번 흔들고 바로 놓아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원래 초면인 사람한테 예의 없게 구는 성격은 아니야. 아버지한테 지수 자취방에 어떤 남자애가 소파에서 자고 있더라는 말 듣고 어떤 놈인지 확인해봐야겠다, 하고 일부러 좀 거칠게 말한 거야. 예의 없고 강압적으로 구는 사람한테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보면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으니까.”

백도영이 맥캘란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나 다 먹고 가도 돼? 고기 되게 맛있어서.”

“... 네.”

백도영이 오른손에 포크를 잡고 스테이크를 두 점 찍어 입에 넣었다. 나도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순수하게 미친놈이었던 방금이랑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오히려 어색했다. 지금 보니 백도영은 순한 인상이었다. 백도영이 마늘 플레이크를 먹고 나를 봤다.

“나 너 잿더미부터 챙기는 거 보고 되게 놀랐어. 원래 그렇게 밀어붙이면 보통 사람이면 다른 생각 못 하고 지금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지, 하는 것만 궁리할 건데. 그때 딱 되게 괜찮은 애구나 싶었어.”

멋쩍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백도영이 맥캘란을 한 모금 마셨다.

“예의 없는 사람한테도 예의도 차릴 줄 알고. 마냥 굽히는 것도 아니라 자존심도 세울 줄 알고. 어느 정도 신중하기도 한 거 같고.”

백도영이 스테이크를 한 점 입에 넣었다. 왠지 칭찬을 들을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확실히 지수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널 고른 이유가 있겠지...”

“...”

내게 말을 걸어온다는 것보다는 혼잣말하는 느낌이었다. 뭐라 답해야 할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먹고 마늘 플레이크도 먹고 맥캘란도 마셨다. 접시가 비어서 백도영이 빨리 가줬으면 했다. 백도영이 내 글라스에 맥캘란을 채워줬다.

“이 위스키 마음에 드나봐?”

“... 네. 맛있네요.”

“그럼 이거 남는 건 두고 갈게. 지수랑 같이 먹어.”

“... 네.”

백도영이 살폿 웃었다.

“너 어디 계약한 회사는 있어?”

“아뇨 아직 없어요. 근데 생각해두는 데는 있어요.”

“으응... 만약에 별론 거 같다 싶어지면 나한테 연락해. 지수 통해서. 아니면 지금 내 연락처 받고. 그냥 이거 다 먹고 나서 이따 번호 교환할까?”

“... 교환하죠.”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서로 조용히 접시를 비웠다. 백도영이 폰을 잡았다. 나도 폰을 꺼내 켜서 전화 앱을 누르고 각자의 폰을 서로 건넸다. 내 번호를 적어 이온유라는 이름으로 기존 연락처에 저장했다. 다시 폰을 바꿨다. 내 폰은 화면이 꺼져 있었다. 백도영이 폰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는 오른 주머니에 폰을 집어넣었다.

“설거지는 맡겨도 되지?”

“네 제가 할게요.”

“그래. 고마워.”

백도영이 접시를 싱크대에 놓고 물을 뿌린 다음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신발을 신은 백도영이 우산을 오른손에 들고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가볼게 매제.”

“왜 또 매제라고 불러요?”

“마음에 들었으니까.”

“...”

백도영이 싱긋 웃더니 잘 있어, 라고 말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문을 잠갔다.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앉아서 폰을 켜서 연락처에 들어가봤다. ㅂ 정렬에서 백도영을 찾을 수 없었다. 스크롤링해서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 있나 확인해봤다. ㅊ 정렬에 처남 백도영이라고 써진 처음 보는 번호가 있는 게 보였다. 멍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분간이 안 됐다. 백지수 아버님이 백가는 한 번 문 건 놔주지 않는다고 말한 게 떠올랐다. 불안해졌다. 백도식은 내가 벌써 사위라도 된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백도영은 진심으로 날 보고 매제라고 했을까? 내가 백지수랑 결혼하게 되면 김세은은 어떡하지? 까마득했다. 미래를 전망하기에는 내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았다. 내가 만들어낸 수렁에 발이 묻힌 거였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화장실로 뛰어가서 변기 앞에 무릎 꿇고 토했다. 내가 저지른 잘못들도 이렇게 쏟아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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