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수요일 (5)
* * *
손만 뻗어서 알람을 껐다. 벌써 열한 시 반이 됐나.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빗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걷고 하늘을 봤다. 먹구름들이 물방울을 쏟아붓고 있었다. 내일까지 이 기세로 비가 쏟아질까. 비는 싫은데. 금방 그쳤으면 했다. 도로 커튼을 걷고 1층으로 내려갔다. 화이트보드를 확인해봤다.
[저녁: 남은 갈비찜 먹을게]
그럼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 소파에 가 앉아 왼팔을 팔걸이에 올렸다. 비가 와서 그런가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폰을 켜봤다가 다시 끄고 소파에 내려놓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듯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 별장에 홀로 고립된 것 같았다. 외로웠다. 기타방으로 가 기타를 꺼내고 로망스를 쳐봤다. 기타현 튕기는 소리가 방안에 조용하게 울렸다. 기타 소리 사이로 애처로운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그냥 지나가는 길고양인가 싶었는데 점점 가깝게 들렸다. 현관문에 대고 울기라도 하는 듯했다. 잿더미가 왔나? 지금 비가 얼마나 쏟고 있는데 다 젖지 않았을까. 기타를 내려놓고 뛰어서 현관문을 열었다. 온몸이 푹 젖은 잿더미가 문틈새로 바로 머리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와서 머리 먼저 털고 몸을 부르르 떨어 물기를 털었다. 웃음이 나왔다.
“야 잿더미! 뭐 해!”
닫힌 유리문에 머리를 비비던 잿더미가 나를 쳐다보며 냐아, 하고 울었다. 안에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잿더미의 몸을 들고 왼 팔꿈치로 유리문을 열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왼발로 문을 닫고 잿더미를 내려놓았다. 수건을 하나 꺼내 목에 걸치고 선반을 뒤져 고양이 샴푸가 없나 찾아봤다. 있었다. 샴푸를 꺼내고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왼손으로 잿더미의 목덜미를 잡고 오른손으로 샤워기 헤드를 잡았다. 잿더미가 계속 냐아냐아 울어댔다. 너무 귀여워서 미소 지어졌다. 미지근한 물을 약하게 틀어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잿더미의 몸을 씻겼다. 고양이 샴푸도 해주고 다시 물을 틀어 잿더미의 몸을 씻겨줬다.
“가만히 있어.”
왼손으로 잿더미의 목덜미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수건을 잡는데 잿더미가 냐아, 하고 울면서 엉덩이를 털어댔다. 물이 마구 튀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큭큭 웃음이 나왔다. 수건으로 잿더미의 몸을 덮고 양손으로 잡아 물기를 닦아내줬다.
“너 왜 이렇게 말 안 들어.”
잿더미가 냐아 울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었다. 물기를 다 닦아내주고 수건을 감싼 채 잿더미를 안아들어 밖에 나와 백지수 방으로 갔다. 잿더미를 화장대에 앉히고 왼손으로 몸통을 잡은 채 헤어드라이어를 약하게 켜 멀리서 따스한 바람을 쐬게 해줬다. 잿더미의 몸을 다 말리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 소파에 앉았다. 잿더미가 얌전히 내 무릎 위에 앉아서는 눈을 감고 몸을 말았다.
“잿더미 졸렸어?”
잿더미가 눈 감은 채 냐아 울었다.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했다. 왼손으로 잿더미의 오른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털이 뽀송해서 감촉이 좋았다.
“엄청 추웠지.”
잿더미가 입을 짝 벌려 혀를 내보이며 하품했다. 웃음이 나왔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와줘서.”
잿더미가 냐아 울고 머리를 자기 오른 허벅지 위에 올렸다. 사랑스러웠다. 외로운 마음이 가셨다. 홀로 있는 건 도통 못 견뎌 하니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고 잿더미가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잘 자.”
왼손으로 잿더미의 오른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이내 골골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잿더미를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폰을 들어 켜봤다. 열 시 반 쯤에 송선우가 문자를 보내온 게 있었다.
[와 씨바]
[나 밥 얻어 먹으려고 지금 너 있는 데로 걸어가고 있는데]
[비 오는 거 실화냐?]
[ㅈ같다 진심]
두 손으로 텍스팅했다.
[그럼 지금 너 어딨는 거야?]
폰을 켠 상태로 소파에 내려놨다. 양손으로 잿더미를 만지면서 폰을 내려봤다. 얼마 안 가 답장하고 있다는 표시가 떴다.
[집이지]
[엄마 아빠가 나가지 말래]
[뭐 하길래 맨날 나가냐고, 지금 비 오는데 나가서 뭐 하냐고]
[그래서 내일까지는 집에 갇혀 있을 듯]
[불쌍]
[불쌍?]
[하네]
[너 지금 내 옆에 있었음 때렸다]
[왜?]
[개단답이잖아]
[바로 예절 주입]
[야 톡 들어가봐]
[왜 문자로 하면 되잖아]
[아 걍 들어가봐]
[응]
톡을 켜고 송선우 채팅을 확인했다.
[(고양이가 오른 앞발을 말아쥐어 허공에 주먹질하는 이모티콘)]
헛웃음이 나왔다. 텍스팅했다.
[이거 보여주려고 톡 보라 한 거야?]
[당연하지]
[너도 이 이모티콘 사]
[아님 내가 선물해줄까?]
[내가 살게]
이모티콘을 구매하고 바로 똑같은 이모티콘을 보냈다.
[ㅇㅋ]
[잘했어]
[담에 보면 내가 특별히 포상줌]
[안 주셔도 되는데]
[준다 하면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받으세요]
[네.]
[아 띠꺼워]
안에 누구 있어요, 라고 남자가 크게 외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잿더미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뜨고 고개 들어 두리번거렸다. 피식 웃고 오른손으로 잿더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별장은 아니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순간 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멀지 않고 가까운 게 별장 대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아니 여기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안에 있음 나와봐요, 라고 외치는 굵은 목소리는 내가 아는 그 누구의 목소리랑도 닮아있지 않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고성으로 주민신고가 들어오기라도 할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잿더미를 들어 소파에 조심히 옮기고 일어나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우산을 편 다음 대문도 열었다. 왼손에는 무슨 병이 들어간 듯한 까만 봉투를 들었고 오른손에는 반투명한 우산을 든 투블럭 헤어스타일에 검은 맨투맨이랑 슬랙스를 입은 근육질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날선 눈매랑 콧날이 눈에 띄는 얼굴인게 백도식이 젊었을 때 이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별장 안에서 들었던 다그치듯 하는 커다란 고성이 아닌 조용한 저음이었다.
“네가 지수 남자친구구나.”
“...”
백지수 오빠라도 되는 건가. 뭔가 눈빛이 고요하면서도 그 속에 감춰둔 사나움 같은 게 느껴졌다. 무서웠다.
“추운데 안에 좀 들어가면 안 될까?”
“... 네.”
먼저 뒤돌아 가 우산을 접고 현관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백지수 오빠로 보이는 남자가 대문을 닫고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왼손으로 신발장을 잡아 신발을 벗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 누군지 말 안 했지?”
“네.”
“백지수 여덟 살 터울 오빠고, 이름은 백도영이야. 지수 친구니까 말 편히 놓을게.”
백도영이 말하면서 유리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뭐 저렇게 제멋대로인 사람이 있지? 어이없어서 멍했다. 안에서 잿더미가 냐아앙, 하고 앙칼지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리고 안으로 뛰어갔다. 잿더미가 털을 세워 몸을 한껏 부풀리고 허리를 들어 몸이 최대한 커보이게 한 채로 백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백도영이 웃으면서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잿더미가 백도영을 보며 하악질했다. 백도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얘는 이름 뭐야?”
“걔... 잿더미요.”
“잿더미. 으응...”
백도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잿더미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뻗은 채 오리걸음쳤다.
“잿더미.”
잿더미가 계속 하악질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백도영은 계속 다가갔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가 싶었다. 백도영이 시선은 여전히 잿더미에게 맞춘 채 입을 열었다.
“야 얘 나 왜 이렇게 싫어하냐?”
“처음 보는 사람이라서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그치.”
백도영이 왼손에 든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내게 다가왔다. 어디까지 가까워지려는 거지 했는데 백도영이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난 백지수 오빤데 쟤가 이렇게 싫어하고 너는 얼마나 처봐왔길래 저 고양이 이름도 알고 쟤가 너를 경계하지도 않냐.”
백도영이 갑자기 내 멱살을 잡았다. 고요하던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아까는 사나움을 감춰뒀던 게 아니라 억지로 짓눌러둔 거였다. 백도영은 그냥 순수하게 미친놈이었다. 잿더미가 백도영을 보며 계속 하악질해댔다.
“너 이름 뭐야.”
“이온유입니다.”
“뭐 하는 새끼야.”
“그냥 백지수 남자사람친구인 고등학생입니다.”
“남사친? 그걸 나 보고 믿으라고?”
“... 사정이 있어서 빌붙어 사는 것뿐입니다.”
백도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웃기는 새끼네 이거?”
“...”
백도영이 갑자기 멱살을 놓고 주방으로 걸어가 싱크대 물을 틀어 손을 씻었다. 그냥 하는 행동들이 다 갑자기라는 말로밖에는 설명이 안 됐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었다. 백도영이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으면서 나를 바라봤다.
“너 요리 좀 하냐?”
“... 취미라서 약간 합니다.”
“저기 봉투에 있는 거 위스키거든. 맥캘란. 점심시간이니까 뭐 좀 만들어봐. 먹으면서 얘기하자.”
“...”
잘못 걸렸다. 후회스러웠다. 주민신고를 당해서라도 무시했어야 했는데. 백도영이 테이블 앞 의자를 하나 꺼내 앉고 나를 계속 쏘아봤다. 일단 입을 열었다.
“네.”
“그래. 근데 너 계속 대답이 늦는다?”
“죄송합니다.”
“대답 좀 바로바로 해. 존나 멍청해보이잖아.”
“네.”
“그래, 그렇게.”
“근데 저 잿더미 좀 2층에 올려보내도 될까요?”
“음? 그래.”
잿더미를 안아 들어 백지수 방에 있는 상자 안에 내려놓아 줬다. 속이 급속도로 답답해졌다. 어지러웠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에 물을 끼얹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다음 심호흡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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