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수요일 (4)
* * *
주방으로 가서 와플팬부터 찾아서 안이 더럽지 않나 확인한 다음 플러그를 꽂고 예열했다. 보울에다 박력분이랑 베이킹파우더를 체에 걸러 내렸다. 소금이랑 설탕을 넣고 거품기로 두어번 섞었다. 다른 그릇에 계란이랑 우유를 넣고 거품기로 섞어 준 다음 보울에 조금씩 흘려가며 가루끼리 뭉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섞었다. 바닐라 익스트랙이랑 올리브유를 조금 넣고 마지막으로 섞어줘서 반죽을 완성했다. 예열한 와플팬을 열은 다음 손을 살짝 가까이해 뜨거운 정도를 확인해봤다. 넣어도 될 듯했다. 올리브유를 발라주고 반죽을 적당히 부은 다음 닫았다. 핸드폰으로 타이머를 4분 30초 맞춰놓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음료를 만들려고 몸을 움직이는데 뭘 마실 거냐고 물어보지를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와플에 누텔라랑 생크림을 바를 거였으니 초코 라떼보다는 커피를 만들어주는 게 나을 터였다.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스팀완드로 우유에 공기를 주입해 부풀렸다. 타이머가 울려 와플팬을 열어 와플을 접시에 꺼내고 남은 와플 반죽을 또 팬에 넣어 닫았다. 바닐라 라떼를 아이스로 할까 핫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폰으로 날씨를 찾아봤다. 오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가 내일 오후까지 내내 온다고 예보가 떠 있었다. 진짜일진 모르겠지만 일단 바닐라 라떼를 뜨겁게 해야겠다는 결정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 타이머를 4분으로 맞추고 켠 다음 두 머그잔에 샷이랑 바닐라 시럽을 부었다. 왼손으로 잔을 잡아 45도 정도로 기울이고 오른손으로 스테인레스 피쳐를 들어 스팀 밀크를 조심히 붓다가 잔이 적당히 차오르고 둥근 모양이 나왔을 때 과감하게 피쳐를 위로 밀어올리듯 해서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다른 잔도 똑같이 아트를 완성했다. 백지수에게 문자 보냈다.
[다 했으니까 빨리 와]
와플에 누텔라를 발라주고 그 위에 생크림을 얹은 다음 반으로 접었다. 타이머 시간이 흐르는 것만 기다리는데 1분 10초가 남았을 때 백지수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봤다. 머리가 촉촉한 백지수가 CK 브랜드의 회색 팬티랑 교복 와이셔츠만 입고 형광등을 다 끄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오렌지 색의 따뜻한 조명만 켜둔 백지수가 내 앞에 다가왔다. 왼쪽 의자를 꺼내줬다.
“너 그 팬티 좋아해?”
“응. 예쁘잖아.”
백지수가 익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약속한 듯 얼굴을 가까이해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백지수가 두 팔로 내 목을 감싸왔다. 진하게 키스하자는 백지수 나름의 표현인 듯했다. 혀를 섞었다.
“하움... 츄읍... 쮸읍...”
타이머가 울렸다.
“쯉... 뭐야...?”
“와플.”
“으응...”
백지수가 내 목을 감은 팔을 풀어줬다. 와플팬을 열어 접시에 와플을 꺼내고 누텔라를 바른 다음 생크림을 올렸다. 백지수가 접시를 가져가서 사진을 찍고 톡으로 내게 사진을 전송했다. 백지수가 내가 첫째로 만든 와플을 오른손 검지로 가리키며 나를 쳐다봤다.
“이게 내 거지?”
“응.”
다시 자리에 앉고 머들러로 바닐라 라떼를 섞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달달했다. 백지수가 와플을 한 입 베어물었다. 잠시 조용히 오물거리던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며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존맛이다.”
“고마워.”
“넌 평생 내 아침밥이나 해라.”
“뭔가 되게 고백 멘튼데?”
“뭐. 해주기 싫어?”
“그런 건 아니고.”
“흐응...”
백지수가 머들러로 바닐라 라떼를 휘저었다.
“근데 왜 안 아이스?”
“오늘 비 온대서. 따뜻하게 가라고.”
“으응...”
백지수가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거 좀 더 달아질 수 있을 거 같은데.”
“너무 달면 또 그렇지 않아?”
“난 완전 단 게 좋아.”
백지수가 바닐라 시럽을 넣고 머들러로 저은 다음 또 한 모금 마셨다.
“맛있어?”
백지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와플을 손에 들어 한 입 베어물었다. 나도 와플을 들고 베어물었다. 와플의 바삭한 식감과 함께 생크림의 부드러운 달달함과 누텔라의 진한 단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마주 웃어보였다.
백지수가 와플이랑 바닐라 라떼를 다 먹었다. 먹는 시간을 대충 맞춰서 나도 금방 다 먹어치우고 같이 일어섰다. 백지수 방으로 가 헤어드라이어로 백지수의 머리카락을 말려줬다. 침대에 누웠다. 백지수가 교복을 입고 내 옆에 누워 나를 껴안은 다음 내 왼 가슴에 오른 볼을 얹고 폰을 켜서 봤다.
“너 자세 안 불편해?”
“응.”
“... 그래.”
백지수가 이내 자세를 고쳐 머리를 비스듬히해 내 왼 어깨에 맞대고 양손으로 폰을 들어 올려 봤다. 백지수가 무릎을 세우고 있어서 치마가 흘러내려 팬티랑 골반, 허벅지가 보였다. 왼손으로 오른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백지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가 계속 폰을 봤다.
“나 학교 가면 너 뭐 할 거야?”
“음. 일단 잘 거 같애.”
“졸려?”
“약간.”
“그럼 자고 일어나서 점심 먹고 기다리다가 유치원 가는 거야?”
“아마도?”
“으응...”
백지수가 폰을 끄고 침대에 내려놓고는 나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옆으로 누워 눈을 감고 나를 껴안아왔다. 나도 백지수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옆으로 누워 백지수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샴푸 향이 느껴졌다. 잠이 올 듯했다. 입을 열었다.
“너 나갈 때 우산 챙겨 가야 돼.”
“알겠어. 너도 유치원 갈 때 잘 챙겨가.”
“나 나갈 때면 비 내리고 있을 거라서 우산 알아서 챙기게 될 걸.”
“야 이럴 땐 그냥 응이라고 답하면 되는 거야.”
“응.”
백지수가 내 품 안에서 피식 웃었다.
“지금 같은 때 말고.”
“알겠어.”
백지수가 내 품 안에 더 깊숙이 들어오려는 건지 몸을 밀착해왔다. 커다란 가슴이 내 가슴에 맞닿아와 부드럽게 짓눌렸다. 잠시 서로의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 슬슬 학교 가야 되는데.”
“가기 싫지.”
“응. 이대로만 있고 싶어.”
이대로만 있고 싶어, 라는 말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가슴 한구석이 아파왔다. 김세은,김세은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나가긴 해야지.”
“그니까...”
백지수가 잠시만 더 내 품에 안겨 있다가 침대에서 나왔다. 1층으로 내려가는 걸 같이 따라가 현관까지만 마중했다. 백지수가 밖에서 검은 우산을 챙기고 대문을 나섰다. 하늘을 올려봤다. 먹구름이 뒤덮여 우중충했다. 현관문을 닫고 잠근 다음 옥상에 널어놓은 것들을 다 걷었다. 수건을 접고 1층이랑 2층 화장실 선반에 나눠 넣은 다음 백지수 방으로 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폰으로 열한 시 반에 알람 세 개 맞춰 놓고 밀린 문자들에 답장했다. 스크롤해 정이슬의 이름을 찾아내고 눌러서 텍스팅했다.
[학교는 갔어요?]
폰을 끄고 머리맡에 내려놓은 다음 정자세로 누워 두 손을 배에 얹고 눈 감았다. 폰이 켜졌는지 밝았다. 눈 뜨고 확인해봤다. 정이슬에게서 답장이 온 거였다. 누르기 싫었는데 답장을 안 하면 또 무슨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았다. 엄지로 눌러 들어가봤다.
[학교는 갔어요? 가 뭐야]
[학교는 당연히 왔죠]
[내가 무슨 양아칩니까 이온유씨?]
[그냥 딱히 보낼 말이 없었어요]
[아 그러시구나]
[이렇게 선연락을 퉁치시겠다?]
[그럼 뭐 어떡해요]
[글쎄]
[하지만 나는 네가 더 나은 문자를 보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그 믿음을 네가 부숴버린다면 나는 그땐 정말]
또 뭔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걸까. 텍스팅을 하고 있다는 표시가 떴다.
[정말 다음에 할 말이 없네]
헛웃음이 나왔다.
[누나 개 웃겨요]
[내가 뭐만 하면 개웃기대]
[아니 근데 진짜 웃겨서 웃긴다고 하는 거예요]
[어느 포인트에서 내가 웃기다는 건데?]
[몰라요 말로 잘 설명 못 하겠어요]
[그냥 누나가 웃겨요]
[아 이거]
[살짝 화가 나그등요?]
[왜요?]
[어릿광대가 된 느낌이 든다 이 말입니다]
[근데 그런 느낌 드는 거 누나가 다 자처한 거 아니에요?]
[뭔 소리야]
[난 널 유혹한 거예요]
[웃기려 한 게 아니라]
[이런 게 웃겨요]
[아]
[너 학교로 나와]
[혼내줘야겠으니까]
[공개고백 안 통해요]
[내가 공개고백 할 거 같아?]
[네]
[정답]
[개 똑똑해 이온유]
[이러니까 내가 반하지]
한숨이 나왔다.
[누나 저 지금 한숨 쉬었어요]
[나 때문에?]
[아마도요?]
[너 진짜 언제 한 번 세게 혼나야겠다]
[세게 혼나는 건 뭐 어떻게 달라요?]
[달라야지. 세게라는 말이 들어갔는데]
[당장은 못 하는 거죠?]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다행이네요]
[누나 근데 저 이제 잘 거예요]
[와]
[부럽다]
[난 수업 듣는데]
[지금 수업 시간이에요?]
[아니]
[근데 좀 있으면 시작하지]
[그럼 누나도 폰 꺼야겠네요]
[그치]
[아]
[수학 싫다]
[ㅋㅋㅋㅋ 저도요]
[너 잘 때 나도 자야겠다]
[잘 자 온유야]
[네. 잘 잘게요]
[누난 자지 말고 수업 들어요]
[알겠어]
폰을 끄고 침대에 내려놨다. 더 답장은 안 오는 듯했다. 눈을 감았다. 잠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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