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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164화 (164/438)

〈 164화 〉 화요일 (2)

* * *

전화가 걸려 왔다. 백지수였다. 받고 오른 귀 가까이에 댔다.

ㅡ나 업고 가주라.

헛웃음이 나왔다.

“장난해?”

ㅡ너도 힘들 거 알고 나도 진짜 미안한데 업고 가주라...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뻔뻔하고 당당하게 나오니 도리어 꾸짖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ㅡ나도 업고 가주라 온유야.

송선우 목소리였다. 백지수 옆에 붙어서 전화기에다 대고 말한 모양이었다.

“둘 다 지금 진심이야?”

ㅡ응.

백지수 목소리가 들렸다.

ㅡ난 반 장난.

송선우 목소리였다.

ㅡ야 네가 그러면 난 뭐가 돼.

ㅡ지금 온유 화난 거 같아서.

ㅡ화난 건 나도 알지 근데 밀어 붙여줘야지 같이.

ㅡ그러려 했는데 너무 화난 느낌이라서 그냥. 그래도 완전 장난이라고는 안 했잖아.

내가 못 듣는다고 생각하나? 스피커를 손가락으로 막았거나 폰을 멀리하거나 했는지 소리가 작게 들려오긴 했지만 내 귀가 워낙에 좋아서인지 다 들을 수 있었다.

ㅡ암튼 일단 조용히 해봐.

백지수 목소리였다.

ㅡ미안해 온유야.

이젠 넋이 반쯤 이탈해버려서 더는 화나지도 않았다.

“어.”

ㅡ많이 화났어?

“아니.”

ㅡ그냥 내가 내려갈까?

“됐어. 내가 올라갈게.”

ㅡ진짜 고마워 온유야.

“어.”

전화를 끊었다. 올라가기 싫었다. 요리해주고 설거지하고 머리 감겨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런 식으로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부려지는 건 싫었다.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내가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올라가면서 화가 차올랐다. 백지수 방으로 걸어가다가 중간에 눈을 감고 심호흡해서 가라 앉힌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송선우랑 백지수는 진짜 내가 안아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 누워 이쪽을 보고 있었다. 둘 다 오른손에 폰을 쥐고 있는 걸 보면 내가 오기 전까지 폰을 보고 있다가 내 발소리를 듣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척하려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진짜 대단하다 둘 다.”

송선우의 눈에 측은한 빛이 돌았다.

“미안해 온유야.”

백지수를 바라봤다. 눈꼬리가 축 늘어져 슬퍼보이는 눈을 한 백지수가 두 팔을 벌려왔다.

“미안해 온유야. 그리고 와줘서 고마워.”

신기하게 미운 마음이 살짝 가셨다. 남자는 여자가 예쁘고 가슴이 크면 어떻게든 용서가 되는 건지 백지수가 잘못을 취소하듯 이대로 내게 조금만 잘 대해주면 용서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여자의 가슴 크기가 남자의 마음의 크기로 치환되는 듯했다. 다가가서 왼팔을 백지수의 무릎 뒤에 넣고 오른팔을 백지수의 등 뒤에 넣어 들어 올렸다. 백지수가 나를 꽉 끌어안아 가슴이 맞닿았다. 커다란 가슴이 지그시 눌려와서 부드러운 감촉에 머리가 쭈뼛 서는 듯했다. 정말 얄팍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결국엔 나도 가슴에 목을 메는 한 명의 사내였다. 뒤돌아 방을 나와 계단 쪽으로 갔다. 내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백지수가 갑자기 싱긋 웃었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걸쳐졌다. 지금은 웃으면 안 됐는데. 백지수가 입꼬리를 올리고 오른손으로 내 왼 볼을 쓰다듬었다.

“너 진짜 잘생겼다.”

“어 고마워.”

“삐졌어?”

“응.”

계단을 내려보며 천천히 발을 디뎠다. 백지수가 내 오른 볼에 입 맞췄다.

“미안해.”

“미안하면 그런 짓도 안 하는 게 맞지 않아?”

“미안해서 한 거야.”

“들키면 어떡하려고.”

“안 들켜. 선우도 지금 힘들어서 못 내려와.”

“그럼 넌 학교는 갈 수 있겠어?”

“택시 부르고 학교에서 자야지.”

“너 공부는 어떡하게.”

“괜찮아 체육 시간도 있고 하니까.”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 안 되는데 왜 자꾸 웃게 되는 건지. 계단을 다 내려오고 주방을 향했다.

“체육 시간이면 자도 돼?”

“그럴 수도 있지, 양해 구해서.”

“양해 구하는 거면 인정.”

오른발로 의자를 뒤로 밀어서 꺼내고 몸을 낮춰 조심히 백지수를 앉혔다. 백지수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해왔다. 송선우한테 들키면 어떡하려고. 진짜 아주 막무가내였다. 입을 굳게 닫았다. 백지수가 그대로 내 윗입술이랑 아랫입술에 키스를 퍼붓고는 얼굴을 멀리했다.

“너 뭐 먹었지.”

“응. 김치볶음밥. 그래서 입 닫았어.”

“가글하고 와.”

“키스하자고?”

“응.”

“그럼 시간 오래 걸리니까 선우가 의심하지 않을까?”

“그런가?”

“당연한 거지.”

“그럼 올라가.”

“알겠어.”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백지수 방으로 갔다. 문 쪽을 보고 있던 건지 송선우랑 바로 눈이 마주쳤다. 송선우가 두 팔을 벌려왔다. 백지수를 안았던 것처럼 무릎 뒤로 왼팔을 넣고 등 뒤로 오른팔을 넣어서 들어 올렸다. 송선우가 가슴을 밀착해오고 내 오른 어깨에 턱을 얹었다. 이온 음료가 다 비워진 컵 두 개가 침대 옆 탁자에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런지 자세를 해서 오른손 검지랑 중지에 컵 손잡이를 끼워 들고 다시 일어선 다음 주방으로 갔다. 백지수가 고개만 뒤로 돌린 채로 나를 쳐다봤다. 입을 열었다.

“선우 앉을 의자 좀 뒤로 꺼내줘.”

“어. 컵 나 줘.”

“응.”

백지수가 의자를 꺼내고 일어서서 컵을 받아 싱크대에 내려놓았다. 송선우를 조심히 앉혔다. 비로소 자리에 앉았다. 백지수가 테이블 위의 도마 같은 걸 치우고 그릇이랑 수저를 준비했는지 테이블은 세팅이 돼 있었다. 유리 머들러로 초코 라떼를 섞어주고 다른 잔에 넣었다. 초코 라떼를 한 모금 입에 넣고 눈을 감은 채 음미했다. 단맛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백지수가 나무 주걱으로 밥그릇에 볶음밥을 퍼주고 송선우가 국자를 들어 국그릇에 콩나물국을 퍼줬다. 토마토 달걀 볶음을 한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은 뚜껑을 빼고 숟가락으로 토마토 조각 하나랑 스크램블 에그를 약간 퍼서 입에 넣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식감에 짭쪼름한 맛 단맛 새콤한 맛이 다 있어서 쉽게 질리지 않을 듯했다. 백지수가 볶음밥을 담은 그릇을 송선우에게 먼저 주고 다음 걸 내게 건넸다. 송선우도 백지수에게 콩나물국을 주고 다음 그릇을 내게 줬다.

“아침밥 해줘서 고마워 온유야.”

송선우가 말했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고 입을 열었다.

“고마워.”

“응.”

볶음밥을 한 입 먹고 콩나물국을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도는 느낌이 들었다. 절로 탄식이 나왔다. 초코 라떼를 한 모금 꼴깍 삼킨 송선우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송선우가 끅끅거리면서 왼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당혹스러웠다.

“미치셨어요 갑자기?”

송선우가 오른손으로 얼굴에 부채질했다.

“아... 아니 나 어제 너무 웃겨서. 진짜 생각할수록 존나 광기였어 가지고. 지수 갑자기 쳐들어와서 대뜸 우리한테 섹스 안 했지 이러고. 너는 뭐 가슴만 닿으면 그거 세우고.”

창피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그건 솔직히 불가항력이지 나도 남잔데.”

“나도 아는데, 진짜 개 웃겨서.”

송선우가 고개를 돌려 백지수를 바라봤다.

“근데 지수야.”

“응?”

“너 평소에 어떻게 했어? 이온유 그거 세울 때?”

“나? 그냥 모르는 척했는데?”

“그거 진짜 모르기도 어렵잖아.”

“그래도.”

송선우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야.”

“네?”

송선우가 피식 웃었다.

“왜 갑자기 존댓말 써?”

“그냥요.”

“그래. 근데 너 그거 세울 때 지수가 모르는 척해준 거잖아.”

“네.”

“설마 막 일부러 뭐 한 거 없지?”

“일부러라니?”

“일부러 지수 몸에 그거 닿게 한다거나 막 비빈다거나.”

헛웃음이 나왔다.

“너 아직 취했지.”

“아니 이 정도도 말 못해?”

“넌 성적으로 보수적인 거야 아님 열린 거야?”

“몰라 걍 꼴리는 대로 하는 거지. 근데 기준 확실한 거 하나는, 미성년자 섹스는 안 된다.”

눈을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아침부터 이렇게 어지럽게 할 줄은 몰랐다. 두 손을 치우고 눈을 떠서 송선우를 바라봤다. 눈빛이 흐리지 않은 게 제정신처럼 보였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듣는 내가 다 부끄러운데.

“밥 먹을 때 대화하기 좋은 주제 같지는 않은데 그만하면 안 될까요...?”

“아니 내가 질문한 거만 대답해봐. 그럼 관둘게.”

“안 했어...”

“오키.”

송선우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이제 제대로 밥을 먹나 싶었는데 송선우가 백지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수야.”

“응.”

“내가 온유 데려가도 돼?”

백지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뭔 소리야?”

근데 진짜 뭔 소리지? 나를 설득하는 건 안 될 거 같아서 타겟을 바꿨나?

“그냥 말 그대로. 너한테만 신세지면 온유 미안해질까봐.”

“음? 아냐. 약간 공생하는 느낌이라 이온유도 괜찮을 걸?”

“이온유 속마음 잘 안 터놓잖아. 너한테 미안해하면서도 선택지 없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같이 있는 거일 걸?”

본인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이겠지만 맞는 말이었다. 백지수가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있는 거 괜찮지 않아?”

“괜찮지. 좋지 오히려.”

백지수가 미소지으며 송선우를 쳐다봤다.

“그렇다는데?”

“으음...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송선우가 숟가락으로 볶음밥을 한술 퍼 입에 넣었다. 긴장이 풀려서 한숨을 쉴 뻔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참았다. 초코 라떼를 한 입 머금었다.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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