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뭐라도 해야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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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다 먹고 밖에 나왔을 때 김민준 실장이 여동생한테 주라면서 명함을 새로 줬다. 고맙다고 말하면서 받고는 왼주머니에 넣었다. 대충 찢어질 분위기였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한데, 토요일까지 표준계약서라도 주실 수 있으세요? 이메일 말고 종이로요.”
“음? 왜요?”
“저 어머니한테 보여드리려고요.”
김민준 실장이 미소지었다.
“알겠어요. 내일 바로 줄게요. 아 근데 3년짜리 원해요 5년짜리 원해요?”
“가능하면 둘 다 주세요.”
“그래요 그럼. 대충 점심 먹기 전에 만날래요?”
“네.”
“그럼 내일 연락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김민준 실장이 멀지 않으면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정중히 거절하고 택시를 불렀다. 내 주변에 백지수 별장을 아는 사람은 최대한 적었으면 했다. 다음에 보자며 서로 인사했다. 김민준 실장이 차에 올라 떠나갔다. 얼마 안 가 택시가 도착했다. 뒷좌석에 타서 등을 편히 기댔다. 폰을 켜봤다. 백지수한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야 너 밖에서 먹으면 먹는 거지 폰은 왜 꺼두냐?]
[ㅈㄴ 기분 나쁘네 진짜]
[너 들어와서 처잘 생각 어디 하기만 해봐]
많이 화난 것 같은데 귀엽기만 했다.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세 번 갔을 때 연결됐다.
“미안해 지수야.”
ㅡ뭐가.
웃음이 나올 뻔했다. 겨우 참아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엔터 실장님 만나서 밥 먹으면서 얘기했어. 어떻게 할지.”
ㅡ... 그래?
“응.”
ㅡ그래서 뭐 어떻게 될 거 같은데?
“당장은 모르지. 근데 막 답이 없다거나 한 건 아닌 거 같아.”
ㅡ다행이네.
“나 네 별장에서 자도 돼?”
ㅡ... 되는데, 다음부터 그러면 진짜 너 다시는 못 오게 할 거야.
“알겠어. 미안해.”
ㅡ내가 착해서 딱 한 번만 봐준다.
“고마워. 나 돌아갈 때 뭐 사갈까?”
ㅡ나 바닐라 라떼나 사와줘.
“따뜻한 거로?”
ㅡ아니. 아이스로.
“근데 너 저녁은 먹었어?”
ㅡ아직 안 먹었어.
“먹지 그랬어.”
ㅡ아니 나 너 문자 하나 띡 보낸 거 보고 존나 빡쳐 가지고 속에 뭐 집어넣을 생각이 아예 안 들었어.
“미안해.”
ㅡ아 아직도 화나. 어떡하면 존나 굴릴 수 있지 너?
“미안해. 굴리지 마.”
ㅡ아 짜증나... 너 돌아오면 바로 주방 가서 내 저녁 만들어.
“뭐 만들어야 돼?”
ㅡ네가 만들 수 있는 제일 어렵고 맛있는 거.
“제일 어렵다고 제일 맛있는 건 또 아닌데.”
ㅡ아 몰라 걍 존나 빨리 만들 수 있는 맛있는 거나 해.
“알겠어. 근데 집에 재료 뭐 뭐 있어?”
ㅡ그것도 파악 안 해놨어?
“파악 안 해놔서 죄송합니다.”
ㅡ고기 종류 개 많고 계란 있고 면 있고. 걍 이것저것 많아.
“뭐 먹고 싶은데?”
ㅡ스테이크랑 필라프.
“필라프는 좀 힘든데 다른 거로는 안 돼?”
ㅡ걍 볶음밥이나 하든가.
“알겠어. 그럼 일단 스테이크로 먹을 고기 꺼내놓고 시즈닝해줘.”
ㅡ어.
냉장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고기로 할 거야?”
ㅡ안심.
“고기 꺼냈어?”
ㅡ응.
“도마에다가 고기 먹을 만큼 올리고 양쪽 면에다가 알 굵은 거로 소금이랑 후추 뿌리고 꾹꾹 눌러서 잘 묻혀준 다음에 올리브 오일도 발라줘.”
ㅡ알겠어.
“볶음밥은 무슨 볶음밥으로 해줄까?”
ㅡ김치 볶음밥 해줘. 차돌 넣어서.
“응.”
테이블에 도마가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ㅡ끊어. 나 고기 시즈닝해야 돼.
“알겠어요.”
전화를 끊었다. 기사 아저씨가 백미러를 흘깃 보시더니 입을 열었다.
“요리하는 분인가봐요?”
“아뇨 그냥 취미로 요리해요.”
“전화한 사람은 여자친구예요?”
아니라고 하면 또 이상하게 보려나, 그냥 그렇다고 해야 할 듯싶었다.
“네.”
“혹시 동거하고 그래요?”
“... 아뇨.”
“그게 맞아요. 동거하면 못 볼 꼴 보고 그러니까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아요. 그 전까진 결혼하고 싶다, 생각 들던 사람이라도 동거해보고 하다가 어디 안 좋은 부분 보이면 또 헤어지고 한다니깐요? 그래 가지고 이어질 사람도 안 이어지고 해서 우리나라 출산율이 이렇게 바닥치는 거예요. 이게 다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물들어서 사람 사이 관계에서도 손해는 절대 안 보려고 해 가지고 생기는 일이에요. 결혼할 상대도 내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값어치를 가진 사람, 결점 없고 장점 많은 사람을 구하고. 근데 그게 쉬운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비혼이 많아지고. 그리고 만약 그걸 성공한다고 해도 또 자기 삶을 즐겨야겠다고 YOLO니 뭐니 하면서 애는 안 낳거나 딱 한 명만 낳거나 해서 애는 점점 줄어들고. 근데 YOLO거리는 사람이 어디 또 노후 대비를 하겠어요? 안 하지. 그럼 나중에 세금내야 되는, 지금은 갓 난 애거나 아직 안 태어난 애들만 죽어나가는 거예요.”
“아 네. 그쵸.”
“이래서 나라에 철학이 기반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철학이. 사람이 어디 돈만 갖고 살 수 있겠어요? 돈은 따지고 들면 결국 수단인데. 그 외, 그런 말도 있잖아요, 그 무슨 다리 들어가는 명문장 있는데, 뭐더라, 뭔지 알아요 학생?”
“사람은 다리 위에서 살 수는 없다?”
“으응! 그거예요. 아 학생 똑똑하네. 명문대 다니죠?”
“아, 예에...”
“학생 같은 사람이 애를 많이 가져야 해요. 그래야 국력이 자라고 나라가 유지되는 거예요. 똑똑하고 잘생기고 한 사람 하나가 수십 수천 명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내고 그러잖아요. BTS만 해도 그렇고. 아 근데 학생 연예인이에요?”
“아뇨.”
“학생 가수 한번 해봐요. 목소리 되게 좋은데.”
“네 노력해볼게요.”
“그리고 크게 성공하고 나면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애도 많이 낳고 하고 살아요. 사람한테는 사랑만큼 중요한 게 없어요, 정말.”
“네, 애 많이 낳을게요.”
택시 기사님이 내 말을 듣고 호쾌하게 웃었다.
“진짜죠? 아유, 고마워요, 얘기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보통 이런 말 늘어놓으면 손님들 인상 구겨지기만 했는데 학생은 말을 잘 들어줘서 주저리를 많이 했네요.”
“아뇨. 기사님이 달변이셔서 빠져서 들었어요.”
“말도 곱게 하시네.”
“감사합니다.”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백지수 별장이 가까워져 있었다. 택시기사님들은 어떻게 이렇게 말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건지, 마냥 놀라웠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편의점에서 썰은 김치 두 개랑 즉석밥 두 개를 샀다. 별장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바닐라 라떼 라지 사이즈를 두 잔 테이크 아웃했다. 박다솔한테 가망이 있는 것 같다고 문자 보냈다.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백지수가 소파에 누워서 양손으로 폰을 들어 올려서 보고 있었다. 백지수가 고개를 젖혀 나를 거꾸로 보고는 입을 열었다.
“요리 바로 해.”
“알겠어. 너 커피는?”
“테이블에 내려놔.”
“응.”
아이스 바닐라 라떼 두 잔을 테이블에 꺼내놓고 프라이팬을 둘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았다. 냉장고에서 파를 꺼냈다. 나무 도마에 파를 올리고 잘게 썰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을 올렸다. 파를 집어넣고 나무주걱으로 휘저으며 볶았다. 파기름이 났을 때 편의점에서 산 김치를 뜯어 다 넣고 테이블에 꺼내져 있던 차돌박이도 한 줌 투하했다. 다진 마늘, 설탕, 맛술, 후추를 조금 넣고 불을 강불로 해서 볶았다. 고기가 금방 익었다. 즉석밥 두 개를 뜯어 바로 넣고 주걱으로 눌러서 부쉈다. 고개를 돌려 백지수 쪽을 보고 입을 열었다.
“매운 거 좋아해?”
“어.”
냉장고에서 고추장을 꺼내 반 스푼 넣고 색이 고르게 나도록 섞었다. 불을 끄고 냉장고에서 들기름을 꺼내 조금 넣고 잔열로 볶아줬다. 프라이팬을 테이블에 옮겼다.
“차돌 김치볶음밥 다 했어.”
“오키.”
백지수가 일어나서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냉장고에서 버터랑 통마늘을 꺼냈다. 시즈닝한 안심 세 덩이가 올라간 도마 측면에서 통마늘을 가로로 반으로 잘랐다. 도마를 들어 아직 안 쓴 프라이팬 앞으로 갔다. 강불로 틀어서 프라이팬을 뜨겁게 달궜다. 연기가 올라왔을 때 올리브유를 두르고 집게로 안심을 집어 조심히 올렸다. 30초 굽고 뒤집어서 또 30초 구웠다. 옆면으로 세우고 팬을 기울여 옆면에 색을 냈다. 다시 눕히고 반으로 자른 통마늘과 로즈마리, 타임을 넣었다. 향이 화악 올라왔다. 불을 중불로 줄였다. 스테이크를 뒤집어주고 버터를 넣었다. 버터가 녹았을 때 통마늘 위로 스테이크를 올려두고 팬을 기울인 채 숟가락으로 아로제했다. 스테이크를 뒤집고 마늘로 비벼서 향을 입혔다. 침을 삼켰다. 불을 끄고 마늘 위에다 스테이크를 올려 레스팅했다. 이마로 땀이 흘렀다. 왼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핸드폰으로 6분 타이머를 맞춘 다음 뒤돌았다. 백지수가 그릇에 김치볶음밥을 조금 옮겨 담아 숟가락으로 퍼먹고 있었다. 백지수 옆자리에도 그릇 하나랑 숟가락, 포크가 있었다.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내 바닐라 라떼를 오른손으로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나 저녁 먹고 왔는데.”
“근데 네가 2인분 했잖아. 스테이크 포함하면 3인분 수준이고. 여기서 모르쇠 하면 너 뒤져.”
“알겠어, 먹을게.”
“그래야지.”
다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스테이크 곁들일 채소 없어도 돼?”
“응.”
“그럼 암것도 안 한다.”
“어. 한 입 크기로 잘라서 갖고 오기나 해.”
“알겠어.”
핸드폰으로 맞춘 타이머가 다 지나기까지 기다렸다. 다 됐을 때 일어나서 프라이팬에 놓인 스테이크를 도마에 옮겨 한 입에 먹을 수 있을 크기로 잘랐다. 도마를 그대로 들고 테이블에 놓았다. 백지수 옆자리에 앉았다. 백지수가 열심히 오물오물대면서 오른손으로 포크를 들었다. 웃음이 나왔다. 백지수가 눈살을 찌푸리고 왼손으로 입을 가렸다.
“왜 웃냐?”
“너 귀여워서.”
“미친 놈...”
백지수가 스테이크 한 점을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나도 오른손으로 포크를 들어 한 점 찍어 먹었다. 씹자마자 육즙이 입안에 퍼졌다.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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