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뭐라도 해야지 (2)
* * *
백지수 별장으로 돌아가서 가방에 있는 AOU 엔터 김민준 실장의 명함을 찾았다. 키패드로 번호를 적어두고 잠깐 바라만 보고 있다가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여러 번 났는데 도통 받지를 않았다. 음성 사서함 안내음이 나오기 전에 먼저 끊었다. 많이 바쁜가, 괜히 초조했다. 폰을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도수가 높은 술을 꺼내려 했다가 그냥 캔맥주를 하나 집어서 따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두드드, 테이블에 올려놓은 폰이 진동했다. 달려가서 확인했다. 김민준 실장 번호였다. 받고 귀에 가까이 댔다.
ㅡ여보세요.
“김민준 실장님이죠?”
ㅡ네 맞습니다. 근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제 폰에 저장이 안 돼 있네요?
“저 저번에 선상 카페에서 명함 주셨던 이온유예요.”
ㅡ아! 온유 학생! 얘기 들어보려고 전화 건 거예요?
“그게 아니라, 제가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ㅡ뭔데요?
“제가 등교 정지를 당해서요.”
ㅡ... 등교 정지요? 학폭이라도 저질렀어요?
“네.”
ㅡ흐음... 일단 만나서 사정이나 들어보죠. 이따가 저녁에 시간 돼요?
“네 됩니다.”
ㅡ그럼 주소 보낼 테니까... 음, 여섯 시 반에 거기에서 볼래요?
“좋아요.”
ㅡ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저 뭐든 괜찮아요.”
ㅡ그럼 고기나 먹죠. 뭐 더 할 말 있어요?
“아뇨 딱히 없어요.”
ㅡ그럼 끊을게요. 지금 좀 바쁜데 잠깐 화장실 들어와서 누군지만 확인하려고 전화 건 거였어서.
“네. 여섯 시 반에 봬요.”
ㅡ그래요.
전화가 끊겼다. 목소리에서 크게 회의적이라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정말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너무 큰 기대를 걸어서도 안 됐다. 기대가 좌절되면 그만큼 절망이 클 것이었다.
저녁이 될 때까지 시간을 죽여야 했다. 그런데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았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고 싶은데 이미 너무 많이 자버려서 졸음이 올 턱이 없었다. 결국엔 또 냉장고를 열어서 술을 바라봤다. 참고 도로 냉장고 문을 닫았다.
2층으로 올라가 백지수 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바지랑 팬티를 벗어 던지고 세탁기에 있는 백지수의 팬티랑 브라를 왼손으로 집어 들어 코를 박았다. 야한 냄새가 진하게 났다. 세 번 자위하고 정액을 씻어 내린 뒤 하의를 들고 1층으로 내려가 샤워했다. 옷을 입고 나와 소파에 드러누워 문자를 확인해 어디인지 보고 알고리즘에 뜬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죽였다. 세 시 반이 넘어서 서유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받았다.
“응 유은아.”
ㅡ오빠. 지금 바빠요...?
“바쁘진 않아.”
ㅡ그럼요, 저 지금 오빠 보러 가도 돼요?
보러 간다니, 백지수 별장에 있는 걸 아는 건가? 백지수가 말해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마 아닐 거였다.
“안 돼. 미안. 지금 말고 주말에 만나자. 토요일에.”
ㅡ아 네... 알겠어요. 힘내세요...!
피식 웃었다.
“고마워. 끊어.”
ㅡ네에... 토요일에 봬요...!
“응.”
전화를 끊었다. 그냥 보자고 할 걸 그랬다. 다섯 시 십삼 분에 백지수가 돌아왔다. 백지수가 마이랑 가방을 소파에 대충 내려놓고는 냉장고를 열어 1.5L짜리 콜라를 꺼내 컵에 따르지도 않고 그냥 입을 대서 마셨다. 백지수가 다시 콜라를 집어넣고 냉장고를 닫고는 몸을 돌려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지금 머리 감겨줘.”
오자마자 또 머리 감고 자위하려는 건가? 조금 어지러웠다. 백지수가 1층 화장실로 들어가 샴푸 의자에 앉았다. 발걸이를 올리고 오른손으로 샤워기 헤드를 들어 왼손으로 물 온도를 확인한 다음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샴푸를 하는데 백지수가 입을 열었다.
“너 속옷 있잖아, 그거 내 속옷이랑 같이 빨래하려고 2층 세탁기에 넣었거든? 내가 원래 속옷이랑 그냥 옷이랑 분리해서 빨래해서, 1층은 그냥 옷 넣고 2층은 속옷 넣고 해. 그렇게 해도 괜찮아?”
딸감으로 존나 써놓고는 다른 불순한 의도가 없는 듯 말하는 게 퍽 귀여웠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고 얼마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을까. 수고했다고 하면서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다.
“응 괜찮아.”
“오키. 이제 귀 만져줘.”
“응.”
귀를 만져줬다. 백지수가 으응, 흐읏, 거리면서 몸을 배배 꼬고 다리를 모았다. 와이셔츠에 가슴이 착 달라붙은 게 미치도록 선정적이었다. 브라만 없었으면 꼭지가 선 게 곧바로 드러났을 게 분명했다. 따먹고 싶었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줬을 때 백지수가 또 입을 열었다.
“머리 내가 알아서 말릴 테니까 2층 올라오지 마.”
“알겠어.”
또 자위할 게 분명했다. 미치도록 음탕한 년이었다. 백지수가 소파에 둔 가방이랑 마이를 챙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치마 밑 오른 허벅지로 미약한 물줄기가 흐르는 게 보였다. 다리를 모은 게 애액이 흐른 걸 감추려고 그랬던 모양이었다. 귀를 만져주는 것만으로 질질 흘려대는 수준이면 자지를 박았을 때는 어떻게 될까, 당장이라도 알아보고 싶었다. 자위하러 올라간 백지수는 여섯 시가 되어도 다시 내려오지는 않았다. 백지수에게 있어서 식욕 따위는 결코 성욕을 이기지 못했다. 이 정도로 성욕의 화신이면 그냥 나한테 따먹어 달라고 대놓고 말하고 몇 번이고 따먹히면 될 것을 자위만 해대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여섯 시 오 분에 택시를 부르고 백지수한테 나 밖에서 밥 먹고 돌아온다고 문자를 보내고 나갔다. 답장이 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자위에 빠져 있는 듯했다. 택시를 탔는데 교통 신호가 극적으로 앞길을 막아서 조금 늦을 듯했다. 삼사 분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럼 고기 먼저 주문해서 구워놓고 있을 테니까 들어와서 저 찾아요]
[내 얼굴 기억하죠?]
[네]
6시 34분에 도착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내려서 빠르게 뛰어서 안에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면서 김민준 실장을 찾았다.
“온유 학생. 여기예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봤다. 찬거리랑 된장찌개, 콜라 두 병이 있는 원형 테이블에 김민준 실장이 오른손에 집게를 들어서 불판에 고기를 굽고 있었다.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콜라 좋아하죠?”
“네.”
“사이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서 생각 없이 시켰다가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고기 제가 구울까요?”
“잘 구워요?”
“네 좀 구워요.”
김민준 실장이 웃었다.
“그럼 저야 고맙죠.”
“네. 저 주세요.”
“네.”
집게랑 가위를 건네받았다. 김민준 실장이 젓가락으로 삼겹살을 한 점 집어 쌈장에 찍어 먹었다. 상추에 깻잎을 얹고 삼겹살 두 점을 올린 다음 쌈장을 조금 찍어 바르고 마늘이랑 양파를 넣어 싼 다음 입에 넣었다. 김민준 실장이 눈으로 미소지었다.
“많이 배고팠나봐요?”
씹어 넘기고 왼손으로 입을 가린 다음 입을 열었다.
“저 오늘 먹은 게 별로 없어서요.”
“뭐 먹었는데요?”
“저 아침으로 식빵 하나 반에 바나나 하나랑 점심에 콘치즈 먹고 끝이요.”
“콘치즈만 먹었어요?”
“네. 그냥 그것만 먹었어요.”
“음. 그럴 수도 있죠. 맛이야 있으니까.”
김민준 실장이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삼겹살을 한 점 집어 쌈장을 찍어 먹었다.
“그래서, 무슨 사정이에요?”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폰을 꺼둔 다음 자초지종을 세세하게 설명했다. 아버지의 외도와 새어머니와 새여동생. 새여동생과의 신경전과 복수. 그걸 보고 소문난 학교. 입 놀린 강성연에 대한 보복. 화해하러 갔다가 또 한 번 날린 주먹과 학폭위 결과까지.
김민준 실장이 고기를 집어 먹으면서 음, 아 그래요, 으응, 같은 추임새를 넣으면서 듣다가 이야기가 끝났을 때 고개를 두 번 끄덕이더니 콜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술을 핥았다.김민준 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쪼그려 앉고 조용히 소리 냈다.
“근데 진짜 여자애라고요...?”
“네...”
“흐음...”
김민준 실장이 도로 자리에 앉고 불판을 지그시 바라봤다.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김민준 실장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온유 학생이 학생회장 하고, 용서도 받죠. 그럼 될 거 같은데.”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데요?”
“우선 학생회장 타이틀이 있으면 본래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까 학생회장을 하면 어쨌든 좋아요. 일단 한번 들어봐요, 학생회장이 되면 이야기 전개가 어떻게 가능한지. 이온유 학생은 학생회장도 할 정도로 타학생의 모범이 되고, 주변인의 지지도 받는 사람이고, 또 굉장히 가족을 아끼는 사람이에요. 가족을 극진히 아끼는 온유 학생으로서는 여동생을 모욕한 친구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고, 그렇게 손을 쓴 해프닝이 한 번 벌어진 것뿐이죠. 만약 그게 해프닝 수준이 아니었다면 학생회장도 못 했을 거다, 같은 얘기도 할 수 있고요. 여기서 온유 학생이 때린 친구의 용서까지 공식적으로 받아내야죠. 그래서 그런데, 그럴 생각은 있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준 실장이 입을 열었다.
“온유 학생은 일단 퇴폐미가 풍기니까, 한번 폭발하면 주체가 안 되는 이미지랑 자기 가정에 헌신적인 이미지를 어떻게 잘 섞어보면 답이 나올 거 같아요. 이런 이미지는 연기자 쪽으로 가면 더 잘 살 거 같은데... 혹시 연기도 할 생각 있어요?”
연기는 원래 그리 할 생각은 없었는데 송선우랑 같이 연극부를 하면서 흥미가 조금 생겼다.
“네.”
“좋네요. 그런데 새여동생분이 연기를 잘한다고요?”
“네.”
“배우 지망생인가봐요?”
“잘은 몰라요. 그런데 그런 거 같긴 해요, 돌이켜보면.”
“얼굴은 어때요?”
이런 건 왜 묻는 거지 싶어서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일단 답해야 할 듯해서 입을 열었다.
“예쁩니다.”
김민준 실장이 왼손으로 털이 조금 나 있는 턱을 더듬었다. 일이 바빠서 수염 관리를 꼼꼼히는 못 하는 모양이었다.
“여동생분도 AOU 엔터에 들어오면 더 좋은 그림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등교 정지라는 해프닝이 오히려 기회가 되어서 여동생분이 온유 학생이랑 같이 엔터에 들어오게 되는 인연으로 바뀌었다, 까지 스토리 메이킹도 가능하겠고. 일단 여동생분을 만나보고 외모랑 연기력 같은 거를 확인해봐야 그걸 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는데. 온유 학생이 그렇다면 그런 거일 테니까, 뭐 거의 결정된 거 같아요.”
김민준 실장이 불판 옆쪽으로 오른손을 뻗어왔다.
“일단은 저만 믿으세요.”
잠시 고민하다 손을 맞잡았다. 김민준 실장이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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