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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106화 (106/438)

〈 106화 〉 In touch

* * *

방으로 돌아가 폰을 켰다. 7시 13분이었지만 아직도 백지수에게서 답장이 안 와 있었다. 아직 자는 건지 아니면 어제의 추태를 기억하고 일부러 문자를 안 보고 있는 것인지. 일단 전화 걸었다. 수신음이 일곱 번 들리고 나서야 전화가 연결됐다.

“백지수.”

ㅡ... 어.

목소리가 약간 어색했다. 어제의 기억이 남아있긴 한 듯했다.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속은 어때?”

ㅡ속이라니...?

여기서 왜 되묻는 거지? 지가 존나 큰 딜도로 자위한 거 아냐고 떠보는 건가? 미친 거 아닌가? 이성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다면 떠보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해서는 안 될 거라는 것을 알 텐데.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게 분명했다.

“그냥 숙취 어떻냐고.”

ㅡ으응... 걍, 괜찮아. 잠 푹 자서.

“이온음료 마시고 그래.”

ㅡ응. 넌 괜찮아?

“약간 찌뿌둥한 정도. 근데 곧 나아질 거 같아.”

ㅡ으응. 근데 너 어제 돌아갈 때 어떻게 돌아갔어?

“나 걍 걸어갔어. 집에 1초라도 더 있기는 싫어서.”

ㅡ그럼 왜 돌아갔어...? 그냥 잤음 됐잖아.

자기가 자위했다는 사실은 기억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했다는 것까지는 기억을 못 하는 건가? 그러기도 어려울 건데. 뭐 어찌 됐건 잘 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였다. 평소처럼 백지수가 자위 중독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척을 하면 어찌저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여동생이 이상해서, 얘기 좀 해야 될 거 같아 가지고.”

ㅡ... 굳이 집까지 가서?

“전화나 문자하면 씹고 그러니까 면대면으로 해야 돼. 좀 무서워, 시한폭탄 같애서.”

ㅡ으음... 그래서 무슨 얘기했는데?

“요즘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지.”

헛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ㅡ네가 무슨 일 그 자체 아냐?

“그니까 내가 무슨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거지.”

ㅡ... 너 존나 무섭다.

“왜?”

ㅡ아니 가스라이팅 아니야 그거?

“몰라. 근데 안 통한 거 같애, 반응하는 거 보면.”

ㅡ... 너랑 거리를 좀 둬야겠다.

“아니 왜.”

ㅡ좀 소름 돋아서.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고 살아?

내가 이상한 건가?

“머리 좀 굴리면 다 떠올릴 수 있는 거 아냐?”

ㅡ아니? 그런 건 아무나 생각할 만한 게 아니야.

“...”

ㅡ근데 너 나가기 전에 있잖아. 내가 자러 간다고 말하고 나서랑 너 설거지 할 때 그 사이에.

“응.”

ㅡ막 내 방 들어오거나 그러지는 않았지...?

확실해졌다. 백지수는 어제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 하고 있었다. 방에서 자위를 한 것도 불확실해서 평소처럼 화장실에서 자위했을 거라고 스스로 추측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손님이 있는 상황에 자기 방에서 문을 열어놓고 신음을 가감 없이 내뱉으며 천박하게 자위했을 거라는 상상은 의식적으로 하기 어려웠다. 은근 자기 위신을 챙기는 백지수라면 더욱 그럴 것이었다.

“응. 왜?”

ㅡ아니 그냥. 그럼 됐어. 나 이제 등교 준비해야 되니까 끊어.

“응.”

전화를 끊었다. 문득 백지수가 통화 중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건 아무나 생각할 만한 게 아니야, 라고 백지수는 말했다. 나도 비정상이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곧 나가야 했다. 교복을 입고 기타랑 가방을 챙겼다. 노크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었다. 이수아가 있었다. 오랜만에 중간까지 같이 등교했다. 몸이 가려웠다. 왠지 불길했다. 교실에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아 애들이랑 얘기를 나눌 때도 이수아가 의식 한구석에 붙박여서 떠나지 않았다. 어제 해결해야 했는데. 후회가 막심했다.

점심을 거르고 밴드부로 갔다. 언제나처럼 정이슬이 있었다. 의자를 가지고 다가가서 옆에 앉았다.

“누나.”

“응?”

“시크네스 티저 영상 댓글에서 누나 이름 봤거든요?”

“응. 그거 나야.”

정이슬이 미소지었다.

“나 좋아요 그렇게 많이 받아본 거 처음이야, 진짜루.”

웃음이 나왔다.

“그게 그렇게 좋아요?”

“어. 진짜 찐 찐 관종인가봐, 나.”

“그러면 누나도 아이돌하지 그랬어요.”

“세은이처럼?”

“네.”

정이슬이 살폿 웃고 오른손을 내 가슴에 대서 나를 살짝 밀어내려 했다. 안 밀려났다.

“왜 그래요.”

“야.”

“네?”

“너 내 고백은 안 받아주면서 왜 그렇게 달달하게 멘트쳐?”

“나 말하는 거 그렇게 이상해요?”

“너 일부러 그러지.”

“뭐가요?”

“너 지금 반존대한 것도 그렇고 진짜 훅 들어온다니까? 내 심장에?”

웃겼다.

“너 나랑 안 사귈 거면 내 앞에서 웃지도 마.”

“너무 억지잖아요 그건.”

정이슬이 눈을 감았다.

“그래, 그냥 내가 눈을 감고 살아야지. 네 말이 법이야.”

“누나 또 오바한다.”

정이슬이 눈을 뜨고 시선을 마주쳐왔다.

“또 반존대하지.”

“하면 안 돼요?”

“너 자꾸 그러다 내가 너 추행하는 수도 있어.”

“그럼 신고할 거예요.”

“나도 너 모르게 혼인 신고할 거야.”

헛웃음이 나왔다.

“너 내가 웃지 말랬지.”

“누나가 웃겨놓고 그러면 어떡해요.”

“그래도 안 돼. 너 나 보면서 웃을 거면 각서 하나 쓰고 웃어.”

“뭔데요 또?”

“혼인서약서.”

“둘이 결혼해?”

3학년 베이시스트 김현우가 어느새 다가와서 물었다. 정이슬이 고개를 돌렸다.

“응. 온유랑 나 미래를 약속했어.”

“진짜 그만해요 누나.”

내가 말했다. 김현우가 베이스를 품에 안아 들고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온유가 아깝긴 해.”

“야 사람이 사귀고 결혼하는 거에 무슨 아깝다 이런 소리를 해.”

“많이들 하죠?”

“그니까 그런 사람들이 잘못된 거지. 너도 그렇고.”

김현우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온유야 너 화장하냐?”

“그냥 피부 관리 같은 거만 하죠?”

김현우가 정이슬을 봤다.

“너 화장 빼봐.”

정이슬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쳤어?”

“내가? 아님 네가?”

“너 말하는 거지 미친 놈아.”

“미친 건 네 화장인 듯.”

“뭐래? 개소리하지 마 진짜.”

“너 화장 빼고 태곳적 모습 그대로면 지금 외모 몇 퍼 나오는데?”

“야 태곳적 그런 의미 아니거든?”

“그래서 몇 퍼?”

“나 지금 생얼이랑 거의 그대로야.”

김현우가 피식 웃었다.

“진짜면 아깝다고 안 함.”

“진짜거든?”

정이슬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치 온유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대답하기 껄끄러웠다. 일단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김현우가 입을 열었다.

“온유 빈말은 못하는 타입인데 이렇게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건 거짓말이라는 거죠.”

“와, 진짜. 너 내 생얼 본 적도 없으면서 왤케 사람 속 긁어?”

“그럼 온유는 봤어 네 생얼?”

“어.”

정이슬이 입꼬리를 올렸다.

“온유가 만들어준 칵테일 취할 때까지 마신 담에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생얼 보여준 적 있거든?”

“칵테일?”

김현우가 나를 봤다. 왼눈썹이 치켜 올라간 게 어서 해명하라는 듯했다. 정이슬이 또 입을 열었다.

“응. 그땐 몰랐는데 온유가 레이디 킬러 칵테일만 만들어줬더라? 스크류 드라이버랑, 깔루아 밀크랑...”

정이슬이 칵테일 이름을 나열할 때 오른손을 들어 엄지부터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호명했다.

“다음 거는 말하지 마요.”

“뭔데?”

“퀵 퍽.”

“온유 이 새끼 이거?”

김현우가 음흉하게 웃었다. 정이슬이 오른손 중지랑 검지만 세웠다.

“두 번 마셨어.”

“와.”

김현우가 감탄과 비슷하지만 감탄은 아닌 소리를 냈다. 정이슬이 이상하게 말하기는 했다. 퀵 퍽이라는 칵테일 이름만 듣고 두 번 마셨다고 하면 두 번 했다고 듣기 십상이었다.

“지금 내가 이해한 게 그게 그 뜻이 맞나?”

“아니요.”

내가 답했다.

“맞아. 내가 말한 의미 그대로야.”

“그니까 누나가 한 말의 의미 그대로라는 거지 거기에 무슨 숨겨진 뜻 같은 건 없어요.”

내가 부연설명했다. 정이슬이 킥킥 웃었다. 아무래도 정이슬은 모호한 말로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걸 즐기는 모양이었다. 살짝 어지러웠다.

“내가 음란마귀 씌었던 건가?”

“응. 그런 듯.”

“음란마귀는 형 말고 누나한테 붙은 거 같아요.”

“그래, 정이슬이 존나 이상하게 말하기는 했어.”

“난 순수하게 말했는데? 네가 그런 쪽으로만 듣고 상상한 거지?”

“온유랑 나 대 너니까 2대1이죠?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너한테 음란마귀 씌인 게 맞음.”

“아냐 이거 좀 불공정해. 온유 나한테 약간 악감정 같은 거 있어서 네 편 들어준 거일 수 있어.”

“누나 나 이런 거에는 감정 안 섞어요.”

“맞아. 온유 이럴 때 가끔 진지충이잖아.”

“아냐. 온유가 의식적으로는 공정해도 무의식적으로는 너한테 기울어져서 그런 거일 수 있다니까?”

“뭔 개소리야 건 또.”

“아 몰라, 너 수능 공부 안 해? 왜 여깄어?”

“점심시간이니까 좀 쉬려고 왔지. 노래나 부르실?”

“뭔 곡?”

“네가 정해. 입시곡으로 할 거 하든가.”

“그럼 나 ‘In touch’ 해야겠다.”

정이슬이 나를 쳐다봤다.

“뭔 노래인지 알아?”

“네.”

“같이 부를래?”

“그럼 전 어느 파트부터 불러요?”

“‘when you miss that crush’ 하는 데부터. 알지?”

“알죠. 근데 저 기타 좀요.”

기타를 매고 와서 악보를 찾았다. 정이슬이 입을 열었다.

“시작할까?”

고개를 끄덕였다. 기타를 퉁기며 화음을 섞을 부분을 기다렸다.

ㅡWhen you miss that crush Let's get in touch

I'll wait up so call when you want to

정이슬이 미소지었다.

“약속한 거다?”

정이슬이 곧장 노래를 이어불렀다. 뭔 뜻인가 생각해봤는데 가사로 말장난을 친 거였다. 앞으로 연락하겠다는 거 같은데, 김세은이 알면 눈에 불을 킬 일이었다. 그냥 농담이었기를 바랐다. 정이슬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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