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송선우 생일 (5)
* * *
“이온유 냉동고에서 얼음 꺼내와.”
백지수가 말했다. 응, 이라고 답하고 냉장고 쪽으로 갔다.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자지를 위쪽으로 올려서 숨기고 냉동고를 열어 얼음 봉지를 꺼냈다. 가위로 윗부분을 자르고 백지수의 앞에 놓아주었다. 백지수가 집게로 얼음을 집어 하이볼 잔을 채웠다.
“벌써 다음 거 준비하는 거야?”
깔루아 밀크를 한 입 마신 정이슬이 물었다.
“언니 벌써 거의 다 먹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너랑 온유는 별로 안 마셨잖아.”
“금방 마셔요. 이온유 보드카 까봐.”
“응.”
아일랜드 위에 보드카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거 도수는 얼마야?”
정이슬이 물었다.
“40도 조금 넘는 거로 알아요.”
“오, 되게 세다.”
“근데 이것도 주스랑 섞이면 도수 조금 아래로 내려가요.”
“그래도 또 이거랑 비슷하게 단 거 아냐? 주스니까?”
정이슬이 오른손 검지로 깔루아 밀크를 가리켰다.
“그렇겠죠?”
“진짜 큰일나겠다, 잘못하다가.”
“그니까요.”
“조심해야겠어.”
그리 말한 정이슬이 나를 쳐다봤다.
“왜 저를 보세요.”
“너 혼자 남자잖아.”
피식 웃었다.
“저 위험한 사람 아니에요.”
“오. 신빙성 완전 떨어져.”
백지수랑 송선우가 꺄르르 웃었다.
“두 분은 왜 웃으세요?”
“거울을 보세요.”
송선우가 말했다. 조금 억울했다. 팔장을 꼈다.
“얼음 봉지 이거 만 다음에 저기 있는 빨래 집게로 집어 가지고 다시 냉동고에 넣어. 팔짱 풀고.”
백지수가 말했다. 어, 라고 답하고 지시대로 했다.
“보드카 들어간 잔에다가 오렌지 주스 3온스씩 넣어. 그 지거 거꾸로 해서 두 번 가득 채워 부으면 돼.”
백지수가 말했다.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하면서 입을 열었다.
“시킨 거 하자마자 바로 또 일 시켜도 돼?”
“입으로는 투덜대면서 일은 착실히 하네?”
“이게 내 매력이지.”
백지수가 웃었다.
“뭐래.”
오렌지 주스를 네 잔에 담았다. 녹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수랑 온유 꽁냥꽁냥 모멘트 확실히 담았구요.”
정이슬이 폰을 보면서 말했다. 입을 열었다.
“뭐예요 또 말 안 하고 찍고.”
“지수한테 칵테일 만드는 거 찍는다고 했는데?”
“언니. 오늘 찍은 거 어디 올리지 말고 지워줘요.”
백지수가 말했다. 정이슬이 눈을 크게 떴다.
“응? 왜?”
“미성년자인데 칵테일 먹은 거 나중에 뜨면 또 논란되잖아요. 언니한테 안 좋고, 이온유 얘도 나중에 가수한댔는데 얘도 그렇고.”
“으음... 알겠어. 근데 온유 챙기는 거 왤케 설레지?”
“뭔 소리예요. 이온유 오렌지 슬라이스 하고 가운데까지 칼집 내봐.”
“응.”
도마를 꺼내서 오렌지를 슬라이스하고 눕혀서 중앙에 칼 끝부분을 대고 눌러 칼집을 냈다. 네 개를 만들어 지수에게 도마를 넘겼다. 바스푼으로 네 잔을 다 섞은 백지수가 칼집낸 부분을 하이볼 잔에 하나씩 끼워넣었다.
“완성.”
백지수가 말했다.
“너무 예뻐... 이거를 사진으로 못 남긴다구?”
“사진은 성인 되고 나서 많이 찍음 되잖아요.”
“그래도 좀 아쉬워. 근데 이거 바로 마셔봐도 돼?”
“네 마셔요.”
정이슬이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이것도 좀 그렇다. 거의 주스 맛.”
“베이스로 들어간 술이 보드카라 그런가봐요.”
내가 말했다. 정이슬이 씨익 웃었다.
“보드카가 어떤 술이길래 이게 주스 맛이 나는 거죠 바텐더씨?”
“무색무미무취한 술이라서 혼합된 재료 맛이 주로 느껴지실 거예요.”
백지수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개 재수 없어.”
송선우가 풋, 하고 웃었다.
“인정.”
“컨셉질 적당히 해라 이온유.”
백지수가 그렇게 말하고 깔루아 밀크를 마셨다.
“그거 내 건데.”
내가 말했다.
“어? 어 죄송.”
백지수가 내 깔루아 밀크를 내려놓았다. 하이볼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던 정이슬이 잔을 내려놓고 의도적으로 꺄악 소리를 냈다.
“간접키스 뭐냐구.”
백지수가 대답하지 않고 자기 깔루아 밀크를 들어서 마셨다. 나도 백지수의 입술이 닿은 부분을 피해서 내 깔루아 밀크를 마셨다. 뭔가 야릇했다.
“맛이 좀 이상한데?”
백지수를 보며 말했다. 백지수가 오른손을 주먹 쥐고 내 왼팔뚝을 쳤다.
“뭔 개 소리야 미친 놈이...”
피식 웃었다. 정이슬이 히죽히죽 웃었다.
“야 너희 둘 사귀지?”
“안 사귀어요.”
내가 답했다.
“아니 진짜 너무 달아서 내 이가 다 썩어버릴 거 같은데에? 이거 안 사귀면 범죄야 완전.”
“안 사귀는 게 어떻게 범죄가 돼요.”
내가 말했다. 정이슬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설렘 방조죄?”
“누나 취했죠.”
“아니? 뭘 어떻게 벌써 취해.”
“누나 지금 좀 이상한데.”
“아냐 아직은. 선우야아.”
정이슬이 갑자기 오른팔을 벌려 옆에 앉은 송선우를 껴안았다. 송선우가 정이슬을 받쳐주듯 끌어안았다.
“언니 왜 그래.”
“지수 너무 부럽다... 이온유랑 사귀고...”
“...”
송선우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이유 없이 목이 탔다. 깔루아 밀크를 마셨다. 별로 도움이 안 됐다. 오렌지 주스와 보드카를 믹스한 칵테일을 마셨다.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 먹음 맛있어?”
송선우가 물었다.
“왜?”
“아니, 우유 마시고 오렌지 주스 마시는 거잖아. 맛 안 이상해?”
“좀 이상하지.”
송선우가 피식 웃었다. 눈빛에 냉기가 묻어났다.
“이상하네.”
“...”
“선우야아... 난 누구랑 사겨야 돼...?”
정이슬이 주정부렸다. 심한 알쓰였던 모양이었다. 송선우가 시선을 내려 정이슬의 정수리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 순간 만큼은 시선을 분산해준 정이슬이 고마웠다.
“언니는 민우 오빠 있잖아요.”
“나 걔랑 안 사귄다구...”
“사겨요 그럼.”
“걔랑 사귀기 싫어...”
“민우 오빠 아니어도 언니 좋다는 남자 많잖아요. 뭔 걱정이에요.”
“그럼 넌 뭐야.”
“저 왜요?”
“넌 그냥 가끔은 내가 봐도 반할 거 같은데, 너무 예뻐서.”
송선우가 살폿 웃었다. 입꼬리 위로 티 안 나게 패인 보조개가 극도로 매력적이었다.
“언니가 더 예쁜데.”
“거짓말인 거 나도 알고 지수도 알고 온유도 알아.”
“진짜 그런지는 온유한테 물어보면 될 거 같은데요.”
송선우가 다시 나를 봤다. 가슴이 내려 앉는 듯했다. 왜 이렇게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지, 살짝 힘들었다.
“그럴까?”
정이슬이 말했다. 고민했다.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 뭐가 더 나은 선택일까, 그런데 둘 다 마음에 드는 결과가 예상되지는 않았다. 입을 열었다.
“솔직히 예쁜 건 선우가 더 예뻐요.”
송선우가 미소짓고는 나를 보다가 백지수를 보았다. 왠지 조금 무서워졌다. 나도 백지수를 보았다. 무표정했다. 더 무서워졌다. 고개를 돌려 정이슬을 봤다.
“근데 취향을 따지면 누나가 더 내 취향이에요.”
“으으음...”
정이슬이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너 나까지 꼬시면 어떡하자는 거야...?”
“네?”
“너 이미 지수 있잖아. 유은이도 너 좋아하구...”
“유은이요?”
백지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지수 너 유은이가 온유 좋아하는 거 몰랐어? 엄청 티 났는데...”
백지수가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봤다.
“알기야 알았죠. 근데 눈치 빠른 편도 아닌 언니가 알았다고 하니까 좀...”
“너 그럼 나 상처 받는다아?”
“죄송해요.”
백지수가 정이슬에게서 눈을 떼고 나를 봤다.
“유은이는 언제 또 홀렸냐?”
“어, 사랑 싸움.”
정이슬이 헤헤 웃었다. 속이 답답했다. 뭔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정이슬이 조금 미웠다.
“싸우지 마아...”
“싸우는 거 아니에요.”
백지수가 말했다. 송선우가 아일랜드에 오른팔을 대고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근데 둘이 진짜 사귀는 거 같다.”
어투가 시큰둥했다.
“잘 어울리네, 진짜.”
할 말이 없었다. 깔루아 밀크를 들고 다 마셨다.
“어, 온유 방금 백지수가 마신 데로 입술대서 마셨어! 간접 키스!”
정이슬이 나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정이슬이 양팔을 들어올려 손을 주먹쥐고는 응원이라도 하듯 앞뒤로 흔들며 입을 열었다.
“키스해! 키스해!”
미칠 노릇이었다. 정이슬이 나를 싫어하나 조금 의심이 갈 정도였다. 송선우가 하이볼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입 안이 말라갔다.
“언니 많이 취한 거 같은데 누울래요?”
송선우가 정이슬을 보며 물었다. 정이슬이 손사레쳤다.
“아냐아냐아냐 나 멀쩡해. 지수씨, 다음 잔 부탁해요!”
“진짜 마실 거예요 언니?”
정이슬이 오른손 검지만 세우고 왼손으로 오른손목을 받쳤다.
“응. 딱 한 잔만 더.”
“... 알겠어요.”
“근데 나 그 전에 화장실 좀.”
정이슬이 일어섰다. 송선우가 따라 일어서서 정이슬의 오른팔을 들어 목을 넣고 부축했다. 정이슬이 도움을 받아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갔다. 그 모습을 보던 백지수가 폰을 꺼내 봤다가 리큐르 두 개의 뚜껑을 땄다. 뭐라 대화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없었다. 백지수도 비슷한지 말을 안 했다. 분위기가 어색했다. 다 정이슬 탓이었다. 백지수가 깔루아를 들고 지거에 계량하려 했다.
“잠깐 잠깐 잠까안!”
어느새 나온 정이슬이 화장실 쪽에서 외쳤다.
“내가 만들어볼래!”
정이슬이 송선우의 부축을 받아 빠르게 왔다.
“이번에는 선우도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정이슬이 송선우를 보며 제안했다. 송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슬이 백지수를 보았다.
“오케이. 어떡하면 돼?”
“여기 깔루아, 베일리스, 미도리 이렇게 세 개가 이 작은 잔, 스트레이트 잔에 들어가면 되는데요. 이 세 개가 들어가면서 섞이면 안 되고, 제가 깔루아 밀크 만들었을 때처럼 층이 분리돼야 돼요.”
“응응. 플로팅하는 거, 맞지?”
“네. 맞아요.”
“계량은 어떡해?”
“이 지거 작은 쪽으로 2/3 정도만 채우고 담으면 돼요. 세 개 다.”
“담는 순서는?”
“깔루아가 처음, 다음이 베일리스, 마지막이 미도리요.”
“오키. 해보자.”
정이슬이 백지수가 있던 자리로 갔다. 나도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 송선우가 내 왼팔뚝을 잡고 힘 주었다.
“왜?”
“만드는 거 도와줘. 나 처음이잖아.”
백지수가 입꼬리를 비틀어올렸다.
“얘도 처음이잖아.”
“근데 온유는 두 번 만들어봤잖아.”
“그치. 지수야, 넌 내가 만드는 거 도와줘.”
정이슬이 말했다. 백지수가 2초 정도 침묵하고 송선우를 바라보다가 네, 라고 답하고 정이슬의 옆에 섰다. 송선우가 옅게 미소지었다. 선이 또렷한 옆얼굴을 보는데 왠지 모르게 소름 돋았다. 기 빨렸다.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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