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송선우 생일 (4)
* * *
“슬슬 일어날까?”
정이슬이 말했다. 고기는 다 먹었다. 밥을 조금 남기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죄책감은 가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먹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살게.”
백지수가 말했다. 송선우가 고맙다고 말했다. 결제하고 밖에 나왔다. 어두운 밤을 건물 조명과 가로등이 억지로 밝히고 있었다.
“이대로 헤어지긴 좀 아쉽지 않아?”
정이슬이 말했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칵테일 만들어볼래요?”
백지수가 답했다.
“칵테일?”
정이슬이 화색을 띠었다.
“나 한번도 안 먹어봤어. 근데 어디서 만들어?”
“제 자취방에 있어요.”
“오! 가자! 바로 고!”
정이슬이 신나서 백지수의 뒤에서 어깨를 잡았다. 기차놀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송선우가 정이슬의 뒤에 서서 어깨를 잡았다. 나도 송선우의 뒤로 가서 어깨를 잡았다. 흠칫한 송선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종례 뒤에 뒷문에서 송선우가 내 볼에 뽀뽀를 한 게 떠올랐다. 그때 맡은 달콤한 향이 코에 감돌았다. 발기했다. 송선우가 고개를 도로 앞으로 돌렸다. 다행이었다.
“근데 마시다 취하면 어떡하게요 언니?”
송선우가 물었다.
“안 취하게 마심 되지. 정 안 되면 지수 자취방에서 자고. 그래도 되지 지수야?”
“네 괜찮아요.”
“그럼 지수 자취방 가서 칵테일 마시는 거로?”
정이슬이 물었다. 묻지 않아도 이미 다들 그러기로 마음 먹은 듯했다.
“다른 의견 없음 가자.”
“택시 부를게요.”
백지수가 폰을 꺼냈다.
“응응.”
정이슬이 답하고 백지수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나도 송선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오른쪽으로 한 발짝 옮긴 다음 입을 열었다.
“누나 술 좋아했어요?”
정이슬이 돌아봤다.
“응? 딱히?”
“근데 왜 칵테일은 그렇게 궁금해해요?”
“보면 되게 예쁘잖아. 맛도 궁금하고. 온유 넌 먹어봤어?”
“아뇨 저도 칵테일은 안 먹어봤어요.”
“그럼 다 처음 마셔보는 건가 지수 빼고?”
정이슬이 송선우를 봤다. 송선우가 입을 열었다.
“저도 안 마셔봤으니까 그렇겠죠?”
“저도 안 마셔봤는데요?”
백지수가 말했다. 정이슬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응? 뭐야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그냥 리큐르랑 잔이랑 계량할 지거 같은 거만 집에 두고 아직 시도도 안 해봤어요.”
“그럴 수도 있나?”
“어제 돼서 다 모아 가지고요.”
“으음... 그럼 다 첫경험이네? 어? 저 택시 같은데? 근데 되게 빨리 온 거 보면 아닌가?”
“저거 맞아요.”
백지수가 답했다. 택시가 정차하자마자 정이슬이 곧바로 앞문을 열었다.
“갑시다 갑시다.”
정이슬이 신나서 말했다. 백지수가 먼저 들어가고 내가 가운데에 앉고 송선우가 마지막에 탔다.
“선우 생일인데 누나가 더 신난 느낌이네요.”
정이슬이 벨트를 매고 고개를 돌렸다.
“어, 그렇네. 선우씨 느낌이 어때요?”
“약간 기대되네요.”
“약간 기대되면 안 되는데?”
“많이 기대돼요.”
“저보다 더 기대되나요?”
“네.”
“언니 진정 좀 해요.”
백지수가 말했다. 정이슬이 고개를 도로 돌려 앞을 봤다.
“알겠어. 진정할게.”
조용해진 택시는 백지수 별장 근처에 있는 산책하기 좋은 장소에서 멈췄다. 토요일에 버스킹을 하고 뒤풀이한 다음 같이 걷던 그 길이었다. 기사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내린 다음 백지수를 바라봤다. 백지수가 시선을 마주쳤다가 정면을 보고 걸어갔다. 따라 걸었다.
“여기 근처야?”
정이슬이 물었다.
“네.”
“왜 여기서 내렸어? 집 앞으로 갔어도 될 건데.”
“약간 소화시켜야 되니까요.”
“으응... 근데 칵테일인데 배 좀 부른 상태로도 먹을 수 있지 있지 않아?”
“혹시 모르잖아요.”
“오키. 그럼 빨리 걷자. 운동 효과 나게.”
정이슬이 앞장섰다.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언니 어디로 가야 되는 줄도 모르잖아요.”
정이슬이 고개만 뒤로 돌리고는 계속 빠르게 걸었다.
“맞다. 빨리 앞장서주라.”
“네.”
백지수가 다리를 재게 놀렸다. 정이슬의 재촉으로 금방 별장에 도달했다. 정이슬이 안에 들어가고는 감탄했다.
“자취방 수준이 아닌데?”
“빨리 둘러보고 와요 언니.”
백지수가 주방에서 말했다. 정이슬이 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백지수가 정이슬을 바라보았다.
“둘러보는 거 아니었어요?”
“칵테일이 더 궁금해서.”
정이슬이 송선우와 함께 아일랜드 앞 의자에 앉았다. 아일랜드 앞에는 우유와 오렌지 주스 같은 섞을 것과 보드카와 가지각색의 리큐르가 깔려 있었다. 가니쉬로 쓸 것인지 오렌지도 꺼내져 있었다. 백지수가 나를 보고 말했다.
“이온유 글라스 꺼내는 거 도와줘.”
“어.”
백지수가 선반에서 모양이 서로 다른 온더락 잔과 스트레이트 잔, 그리고 하이볼 잔을 네 개씩 꺼내서 내게 건넸다. 주는 대로 받고 아일랜드에 옮겼다. 지거 같은 기구들도 옮겼다.
“너 계속 서있어.”
백지수가 뒤에서 말했다. 의자를 가져와 앉으려고 했다가 어정쩡하게 몸을 돌려 돌아가서 섰다. 백지수가 집 안의 불을 다 끄고 주황빛이 감도는 어두운 조명만 켰다. 이건 또 언제 설치한 건지, 분위기가 제대로 났다. 가본 적도 없는 바가 어떤 느낌일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크... 분위기 진짜 미쳐따...”
정이슬이 즐거워했다.
“왜 이리 신났어요 누나.”
“기대되잖아.”
“언니 너무 기대하면 안 돼요, 저 이거 처음하는 건데.”
돌아온 백지수가 그리 말하면서 내 옆에 섰다.
“응? 부담 갖지 마. 미안해.”
“풋, 알겠어요.”
백지수가 리큐르 하나를 땄다. 그러고는 왼손으로는 방금 딴 리큐르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지거를 들었다.
“나 하는 거 보고 따라해.”
“응?”
백지수가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쳐다봤다.
“따라하라고.”
“어.”
아일랜드 위를 둘러봤다. 백지수가 든 것과 같은 리큐르가 하나 더 있었다. 따고서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지거를 들었다.
“뭐야 이거는?”
정이슬이 백지수를 보며 물었다.
“깔루아요. 커피 향 나는 리큐르예요.”
정이슬이 으음, 하고 고음을 냈다. 백지수가 지거에 깔루아를 가득 채우고 온더락 잔에 따랐다. 나도 따라서 했다. 백지수가 다음 잔에도 지거를 꽉 채워서 깔루아를 넣었다. 또 따라 했다. 백지수가 깔루아를 내려놓고 우유를 든 다음 지거에 채우고 조심스레 담았다. 명암이 나뉘었다. 정이슬과 송선우가 우와, 소리를 냈다.
“예쁘다.”
“첫 잔이니까 좀 연하게 할게요.”
“네. 바텐더님 맘대로 해주세요.”
백지수가 살폿 웃었다. 온더락 잔을 내려다보며 지거를 기울이는 모습이 마냥 생소했다. 백지수가 두 번째 잔에도 우유를 부으며 입을 열었다.
“이온유, 안 할 거야?”
“어, 해야지.”
우유를 들고 깔루아와 우유의 층이 분리되도록 세 번 조심스레 부었다. 다음 잔에도 똑같이 했다.
“비켜봐.”
“응.”
백지수가 유산지를 잔 위의 절반을 가리게 덮고 코코아 파우더를 뿌린 다음 유산지를 걷어냈다. 살짝 블렌드된 깔루아와 우유가 보이는 측면부와 코코아 파우더 반 우유 반으로 나뉜 윗부분의 단면이 상당히 미적이었다. 정이슬이 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진짜 너무 예쁘다. 지수 완전 바텐더해도 어울릴 듯. 엄청 멋있어. 이온유도 방금 폴인럽한 눈빛으로 봤잖아.”
백지수랑 송선우가 갑자기 나를 쳐다봤다.
“왜요.”
“아냐 걍.”
송선우가 말했다. 백지수는 말이 없었다.
“지수야 이 칵테일 이름 뭐야?”
“이거 깔루아 밀크요.”
“으응... 오케이. 마실까?”
“근데 마시려면 일단 섞어야 돼요.”
백지수가 말했다.
“그래? 그럼 섞어주라.”
“넹.”
백지수가 바스푼을 써 깔루아 밀크를 섞었다. 정이슬이랑 송선우가 먼저 깔루아 밀크를 들었다. 백지수랑 내가 다음에 섞인 깔루아 밀크를 들었다. 다 같이 자연스럽게 잔을 든 손을 한 데 모아서 짠, 하고 말한 뒤 한 입 했다. 잔을 내려놓고 아일랜드에 두 손을 짚은 채 눈을 감아 음미했다. 정이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음. 맛있다. 커피 우유 같애. 근데 뭔가 술 마시는 느낌이 안 난다. 좀 연한 거 같구.”
“근데 그냥 술은 맛 없지 않아요?”
눈을 뜨고 물어봤다. 정이슬이 미소지었다.
“별로 맛 없지. 근데 너 그러고 있으니까 나한테 작업 거는 거 같애.”
아일랜드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정이슬이 킥킥 웃었다.
“온유 넌 뭔가 진짜 바텐더 바이브가 있는 거 같애.”
“바텐더 바이브가 뭔데요?”
송선우가 물었다.
“글쎄? 퇴폐미? 암튼, 어두운 조명이랑 어울릴 거 같은 느낌. 뭔지 알지?”
송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유가 좀 음침하긴 하죠.”
백지수가 말했다. 내가 자주 발기한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건가, 그렇게 치면 진짜 음침한 건 누군데. 백지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백지수가 씨익 웃고는 고개를 내려 시선을 하이볼 잔 쪽으로 돌렸다. 둘만 알 수 있는 암호 같은 말을 남들 앞에서 해대는 것부터 사소한 눈짓까지 진짜 하나 같이 요망하기 그지없었다. 발기했다. 취할 때까지 같이 술을 들이붓고 둘 다 정신 없는 상태에서 넋이 나가도록 자지를 쑤셔박고 싶었다. 우선 뒤에서 바지와 팬티를 바로 끌어내리고 키스하면서 느리게 박아 한 번 사정하고 백지수의 방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딸린 화장실에 들어가 백지수의 음침함을 혼내며 여러 자세로 몇 번이고 따먹고 싶었다.
시선을 밑으로 내려 깔루아 밀크를 봤다. 잔을 들어 입 바로 앞에 두고 아무도 모르게 작게 한숨쉬었다. 한 모금 마셨다. 달콤쌉싸름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