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밤 (7)
* * *
백지수가 다시 내려올까. 김세은이 씻고 나서 다시 전화 건다고 했는데. 조금 두려웠다. 만약 백지수가 내려온 다음 김세은이 전화를 걸어오거나 김세은의 전화를 받고 있는데 백지수가 내려온다면 다시 화장실에 들어가거나 해야 할 텐데, 그럼 의심을 살 게 뻔했다. 그냥 변비라도 걸린 척 화장실에서 죽치고 있어야 하나.
차라리 먼저 물어보는 게 마음이 편할 듯했다. 백지수에게 전화 걸었다. 또 받지도 않고 끊겼다. 문자를 보냈다.
[뭐 해?]
[존나 갑자기 전화하는 건 무슨 버릇이냐?]
[걸 수도 있지.]
[배려라는 걸 모르냐?]
[아직 바빠?]
[어. 전화 걸 생각하기만 해봐 진짜 뒤진다. 그 순간에 내쫓을 거야.]
[알겠어. 미안해.]
안 내려올 모양이었다. 완전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보다는 나았다. 다시 카톡을 켰다. 서유은이 보내온 게 맨 위에 있어서 그것부터 봤다.
[오늘 버스킹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오늘 감사하다고 얘기도 못 드렸죠? 문자로 말할 게 아닌데 죄송해요 오빠 ㅠㅜ]
[어썸플레이스 뉴욕 치즈 피스]
[서유은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치즈 케이크 좋아하시죠...?]
[어썸플레이스 바닐라 라떼 (L)]
[서유은님이 선물과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도와주신 거랑 영화관 값 내주신 거, 밥 사주신 거, 서울숲 같이 가주신 거, 택시 비까지 다 합치면 정말 보답이라기도 뭐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보내요...! 그래도 나중에는 제가 살게요!!]
피식 웃었다.
[고마워. 안 줘도 되는데. 내가 낸다고 한 거였잖아.]
바로 1이 사라졌다. 곧 답장이 왔다.
[그래도요! 받은 게 있는데 주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그럼 나도 줘야겠네?]
[아뇨아뇨아뇨 주지 마요 그럼 저 부담된단 말예요]
나도 선물하기를 누르고 골랐다. 마카롱 두 개, 초콜릿 라떼 레귤러 사이즈, 떠먹는 아이스박스가 세트로 되어 있는 거였다. 메시지는 테이크 댄 기브, 로 했다.
[먼지가 방구석에서 우는 이모티콘]
[오빠가 그럼 전 어떡해야 되는 거예요..?]
[안 갚아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정 미안하면 담에 만나서 같이 깊콘이나 쓰고 나눠 먹자.]
[좋아요!]
[좋은데요,, 맨날 이렇게 자연스럽게 약속 잡으시는 거예요?]
[아니. 나 약속 잘 안 잡는다니까.]
[믿을게요..!]
[응]
톡이 더 오지는 않아서 뒤로가기를 누르고 다른 사람들이 보내온 거에도 답장했다. 뒷사람으로 갈수록 더 귀찮아져서 답이 건성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단답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김세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세은아.”
ㅡ너 전화 바로 받으니까 넘 좋다.
픽 웃었다.
“네 전화인데 바로 받아야지.”
ㅡ너 평소에는 바로 안 받잖아.
“그때는 뭔가 하고 있는 일이 있는 거고. 지금처럼 하는 일 없음 바로 받지.”
ㅡ으응. 알겠어.
“너 지금 뭐 해?”
ㅡ나 하는 거 없어. 그냥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 있어.
“내일부터는 뭐 해?”
ㅡ스케줄 따라가야지. 부모님이랑 조금 얘기하다가 매니저 오빠 오면 또 돌아가야돼.
“그럼 너 부모님이랑 있을 시간 내가 뺏는 거 아냐?”
ㅡ응? 아냐. 시간 많으니까. 그리고 부모님이랑 있는 거보다 너랑 얘기하는 게 더 좋아.
이 말이 진심일까? 듣는 내 기분이 좋아지라고 한 소리라기에는 내용이 조금 입에 올리기 어려운 것이었다. 김세은은 어쩌면 부모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렇게 한마디만을 근거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을 사람들의 사이를 유추해도 좋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나간 것이고 무례이기도 한 것 같아서 생각을 관뒀다. 결국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나도 그런데.”
뿐이었다.
ㅡ히힣. 그럼 우리 빨리 독립해서 동거할까?
어, 으응, 이라고 답하면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가슴이 다시 뜨거워지면서 답답해졌다. 땀이 날 듯했다. 김세은은 자기가 툭툭 던지는 한마디가 내게는 부담으로 돌아온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안다면 그걸 노리고 하는 걸까? 힘들었다.
“나중에. 구설수 오름 안 되잖아.”
ㅡ그치.
김세은이 한숨 쉬었다.
ㅡ괜히 아이돌 같은 거나 된다고 해 가지고. 아니었음 바로 너랑 같이 사는 건데.
“아쉽다.”
대답하면서 살짝 소름 돋았다. 전혀 농담 같지가 않아서. 나를 이만큼 사랑해주는구나, 하고 감격하려고 해도 당장 드는 느낌은 부담감이었다.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ㅡ한 4년 지나면 되려나?
김세은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글쎄. 평생 먹고 살 돈은 벌어야 하지 않을까? 동거 사실 밝혀지면 그때는 완전 끝나는 걸 수도 있으니까.”
ㅡ그럼 좀 오래 걸리겠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ㅡ히힣. 그래? 몇 년 걸릴 거 같은데?
“몰라. 7년이면 되지 않을까?”
ㅡ으음... 그때 되면 우리 스물 다섯이니까... 괜찮겠다.
“응.”
입 안이 텁텁했다. 주방에 가 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마셨다. 그러는 동안 김세은은, 너는 남자애가 좋아 여자애가 좋아, 서른 살까지 애 셋만 낳고오... 첫 째는 남자애, 둘째랑 막내는 여자애였음 좋겠는데... 라고 재잘댔다. 정신이 멍했다.
ㅡ너는 어때?
김세은이 다시 내 의식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나도, 나도 네가 말한 대로 애 생겼음 좋겠어.”
ㅡ으응... 다행이다.
“근데 선택할 수는 없잖아.”
ㅡ흐응... 너무 아쉽다...
“그니까.”
시간을 확인했다. 아홉 시 사십 칠 분이었다.
“근데 너 언제 나가?”
ㅡ나 열 시 삼십 분.
“그럼 별로 시간 없네. 부모님이랑 얘기할 시간 내가 계속 뺏는 거 같아서 미안하기도 하구.”
ㅡ아냐 괜찮아.
“내가 미안해서. 이제 끊을게?”
ㅡ나 진짜 괜찮은뎅...
피식 웃었다.
“너 진짜 왜 이리 귀엽게 굴어?”
ㅡ네가 좋아하니까.
“고마워. 너무 좋아.”
ㅡ히힣. 고마우면 맨날 문자 보내고 전화 걸어.
“노력해볼게.”
ㅡ노력해보지 말고 그냥 해.
“네 말버릇이잖아. 노력해보겠다.”
ㅡ근데 난 그렇게 말하고 실제론 안 하잖아. 너도 그러겠다는 거야?
“몰라?”
ㅡ꼭 해. 안 그럼 나 삐질 거야.
“알겠어.”
ㅡ흐응...
“왜?”
ㅡ너 빨리 끊으려고 하는 거 같아서.
감이 좋았다.
“아냐. 나도 아쉬워 죽겠어. 오늘 다시 보지도 못하구.”
ㅡ알겠어. 하아... 이제 진짜 끊어야겠다. 사랑해 온유야.
“응. 사랑해 세은아.”
ㅡ응.
쪼옥 소리가 들리고 전화가 끊겼다. 문자가 왔다.
[마지막은 선물]
[고마워요]
진이 빠졌다. 잔이 반 정도 채워지게 물을 다시 뽑아 들이키고 소파로 돌아갔다. 다시 문자 앱을 켰다. 한 오 분 정도 폰을 두드리다 만사가 다 귀찮아져서 폰을 내려놓고 허공을 보고 있는데 2층에서 백지수가 내려왔다.
“뭐하냐 너?”
“문자 답장하기 너무 귀찮아.”
“병신.”
백지수가 피식 웃었다.
“답장하기 싫음 하지 마.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못 봐서 미안, 대충 그렇게 보내고 끝내.”
“그건 예의가 아니잖아.”
“예의 이 지랄. 넌 좀 예의 없이 굴어야 돼.”
“왜라는 질문을 해도 될까요?”
“해봐.”
“갑자기 왜 내려왔어?”
백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미친 놈이네 이거?”
“대답해줄 거지?”
“곧 알게 될 거야.”
백지수가 주방에 갔다. 할 것도 없어서 따라갔다. 백지수가 주방 구석에 있는 선반을 뒤져 뭐를 꺼냈다. 츄르였다.
“츄르?”
“어.”
백지수가 현관 쪽으로 갔다.
“뭐하세요?”
“열 시 쯤 되면 고양이 찾아와서 밥 달라고 존나 울어대거든? 함 봐봐.”
“암만 생각해도 거짓말 같은데.”
“아냐 진짜임.”
고양이가 안 찾아오면 어떻게 골려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냐옹, 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현관문 바로 앞에서. 고양이가 현관문 틈새에 대고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이렇게 선명하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진짜지?”
백지수가 미소지었다.
“이것 참 신기하네요.”
“내가 구라는 안 치거든요.”
“구라 말고 거짓말이라는 예쁜 말이 있는데.”
“내 맘. 너 거깄어.”
“응.”
백지수가 현관문 앞에 있는 유리문을 닫은 다음 현관문을 열었다. 문에 머리를 비벼대던 고양이가 도도도 들어와 유리문에 머리를 박았다. 평소에는 바로 거실에 진입하던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다시 냐옹, 하고 울고 백지수를 쳐다보았다.
“우리 잿더미 머리 박았어요?”
몸이 전체적으로 회색인 고양이라서 잿더미라고 부르는 건가. 회색 고양이는 그리 예쁘지는 않다는 편견 아닌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잿더미는 상당히 예뻤다. 예쁜 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길고양이 특유의 더러움이 엿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잿더미가 뽀송뽀송한 꼬리를 살랑이며 백지수의 다리에 머리를 박고 몸을 비벼댔다. 동그랗게 뜬 노란 눈이 초롱초롱한 게 퍽 귀여웠다.
“잿더미 츄르 먹자.”
백지수가 다리를 굽히고 츄르를 뜯었다. 잿더미가 뒷다리를 굽혀 앉아 백지수가 내민 츄르 끝자락에 입을 댔다. 챱챱챱, 하고 분홍빛 혀를 내보이며 먹는 게 너무 귀여워서 절로 웃음 지어졌다.
“나도 먹이고 싶어.”
백지수가 오른손으로 츄르를 짜주면서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잿더미가 너 싫어하면?”
“친해지고 싶어서 츄르 먹이려는 거지.”
“네가 잿더미랑 친해져서 뭐하게?”
“어쩌면 자주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사이 좋아서 나쁠 건 없지.”
백지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너 존나 미친 소릴 존나 당연하게 한다?”
잿더미가 냐옹, 하고 울었다. 츄르를 더 달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나 문 연다?”
“... 어.”
유리문을 열었다. 잿더미가 갑자기 일어나 머리를 돌리고 생겨난 틈새에 돌진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 뭐 하는데?”
“잿더미가 너무 빨랐어.”
백지수가 답도 안 하고 츄르 봉투를 내게 준 다음 안으로 뛰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거실에는 백지수에게 포획된 잿더미가 있었다. 양반 다리를 한 백지수의 다리 위에 얹혀져서 백지수의 양손에 두 앞발이 붙잡힌 채로 냐앙냐앙 하고 울어대는 게 애처로운 동시에 귀여웠다.
“너 츄르 안 준다?”
잿더미가 냐앙, 하고 구슬피 울었다.
“말 알아듣나봐? 잿더미?”
“어 얘 좀 똑똑해.”
다가가서 츄르를 뜯고 잿더미 입 앞에 가져다댔다. 나를 보는 잿더미의 눈은 경계심이 깃들어 있었다. 어쩌면 잿더미가 애처롭게 운 건 나라는 잠재적 위험 요소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놓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먹어. 잿더미야.”
최대한 상냥하게 목소리를 냈다. 오른손으로 츄르를 조금 짰다. 잿더미가 혀를 날름댔다.
“얘는 거의 집냥이다.”
“그치. 난 얘가 존나 당당하게 행동해가지고 얘가 원래 나랑 동거하던 앤 줄 알았다니까.”
“그럼 얘 키워.”
“조금 귀찮은데...”
“나 얘 맘에 들어.”
“하, 그래서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츄르를 다 짜주고 왼손으로 잿더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잿더미가 눈을 감고 그르릉거렸다.
“골골송인가?”
“어 맞아.”
백지수가 답했다. 마음이 조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외로움을 견디는 좋은 방법이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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