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저녁 (4)
* * *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중앙에 누구 건지 모를 포크가 놓여 있었다. 서유은이 오른손으로 자기 포크를 접시에 세우고 가만히 멍 때리고 있었다. 순간 포크가 조금 미끄러져서 작게 끼릭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자기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다가오는 걸 본 백지수가 내가 앉기 편하게 의자 틈새를 조금 벌려줬다. 고맙다고 말하면서 앉았다. 입을 열었다.
“유은이 술 마셨어요? 상태가 메롱인데?”
“앉자마자 유은이 챙기기? 이거 망붕 회로 돌아가도 무죄다?”
정이슬이 물었다. 아마 이 사람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애를 얼마나 놀려댔으면 얼굴이 저래요.”
“이유가 있지.”
정이슬이 씨익 웃었다.
“뭐 했는데요 또.”
“걍 가볍게 진실 게임. 벌칙은 없고 무조건 진실 말하기.”
“그래도 돼요?”
“응. 너 늦게 왔으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뭐요.”
“너 현재 좋아하는 사람 있어?”
단골 질문이었다. 이거로 서유은이 정신을 못 차리게 된 거였나. 김세은이 나를 봤다. 백지수랑 서유은도 나를 봤다. 그냥 거의 다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하자고 김세은이랑 얘기했지. 갑자기 기억이 안 났다. 모호한 거에는 그냥 답해주자 했나. 서로 마음 확인할 수 있게.
“있어요.”
“오오!”
“뭐냐구 이온유!”
“누구야!”
“맨날 아니라고 빼기만 하던 새끼 맞나?”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이거 구라치는 거 아니지?”
폰을 보던 이들도 갑자기 폰을 꺼서 주머니에 집어넣거나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나를 쳐다보며 달려들듯 했다. 뒤 테이블에서도 일어나서 우리 쪽으로 왔다.
“왜 이리 시끄럽나 보러 왔습니다.”
“이온유 좋아하는 사람 있대!”
“누가 이온유를 좋아한다는 거야, 아님 이온유가 누굴 좋아한다는 거야?”
“후자.”
“무친. 누구야.”
“우리 너무 시끄러운 거 아냐?”
“아 몰라 얘 빨리 토하게 만들어.”
“교지 뉴스 감이다 이건 리얼.”
“이온유 얘 웃는 거 보면 우리 갖고 노는 것도 같은데?”
“거짓말이면 얘 죽어야 돼 진짜.”
“어서 누군지 말하세요.”
“룰 위반이에요 이거.”
내가 겨우 말했다.
“돌려. 빨리 돌려버려.”
정이슬이 흥분했다.
“돌린다고 걸려요?”
내가 말했다.
“제가 돌릴게요.”
어느새 다가온 송선우가 백지수와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왼팔을 테이블에 대고 오른손으로 포크를 잡아 돌렸다. 포크 끝자락이 나를 향했다. 노린 건가? 이게 노린다고 돼?
“제가 돌렸으니까 질문권 저한테 있는 거죠?”
“응! 빨리 물어봐!”
정이슬이 재촉했다.
“너 밴드부 내에서 좋아하는 애 있어?”
“있어.”
“무치이이인!”
누가 뒤에서 내 옷을 잡아당겼다.
“누구냐고오!”
“아 옷 늘어나요 잡아당기지 마요.”
“아 죄송.”
“유은이 얼굴 개 빨개.”
“어으, 유은이 어떡해. 볼 개 만지고 싶어.”
“저기 좀만 조용히 해주시면...”
직원이 와서 부탁했다. 다들 빠르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일어서신 분들은 앉으셨던 자리에 앉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해요.”
“아 네.”
부원들이 도로 앉는 걸 확인한 직원이 돌아갔다. 성질 급한 몇 명이 다시 일어났다. 눈치 보던 다른 이들도 일어나서 다가왔다.
“그만해야 되는 거 아녜요?”
내가 물었다.
“이거는 캐낼 때까지 못 참지.”
정이슬이 말했다.
“안 돼요 진짜. 더 시끄럽게 하면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는 건데.”
“으음... 그렇긴 해.”
정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앉자 얘들아. 진실 게임 그만 하고.”
김민우가 정리했다. 이미 한 번 흥분을 가라앉힌 터라 다들 자리에 순순히 돌아갔다. 김세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없을 때 진실 게임한 거 내용들 좀 알려주라.”
“나 중간부터 있었어서 잘 몰라.”
“아 그치.”
고개를 돌려 백지수를 바라봤다. 만약 김세은한테 안 물어보고 바로 백지수에게 물어봤다면 김세은이 ‘왜 나한테 안 물어보고?’ 같은 말을 할 것 같아서 김세은에게 먼저 물어봤는데, 돌이켜봐도 영리한 대처였다. 웃음이 나왔다.
“왜 웃냐?”
“그냥. 진실 게임 뭐 나온 거 있었어?”
“별 거 없는데? 그냥 유은이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물었을 때 어버버댄 거? 그 정도.”
“뭐라 어버버댔는데?”
“그거 그냥...”
“말해주시면 안 돼요오...”
서유은이 불쑥 말했다.
“모야모야? 왜 말해주면 안 되는데?”
정이슬이 참치캔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또 달려들었다.
“아녜요... 제가 말할게요오...”
“어 얘기해줘.”
내가 말했다.
“그냐앙... 제가 걸리고, 현재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질문 들어와서, 그게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그런 거냐고 되물었는데, 선배들이 막 있나봐라고 하셔서어...”
“응. 그래서?”
“네에...?”
“밴드부에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야?”
백지수가 나를 쏘아봤다. 김세은은 오른손에 포크를 들고 관심 없는 척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로 감자튀김을 으적대면서 왼손 엄지와 검지로 내 오른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비명을 참았다. 오른손을 조심히 덮어 김세은이 꼬집는 걸 막았다. 김세은이 왼손을 뒤집어 내 손을 한 번 마주 잡고 도로 자기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으... 제가 답을 한 거는, 현재 좋아하는 사람 있냐는 거였어요오... 밴드부 내에까지 말고오...”
“그럼 있어? 좋아하는 사람?”
백지수가 입을 벌렸다 도로 닫았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식인 듯했다. 서유은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 있어요오...”
“분위기 뭐냐구우.”
정이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은 킥킥대며 말했다. 정이슬이 이렇게 별 악의 없이 즐길 동안 내 속은 타들어갔다. 김세은이 서유은을 보다가 나를 흘겨볼 때마다 허벅지나 팔이 꼬집히는 느낌이었다. 백지수는 나에 대한 잘못된 평가를 굳히려는 건지 나를 볼 때면 눈빛을 예리하게 했다. 아마 백지수가 보기에 나는 가슴팍에 주홍 글자를 매단 사람이기라도 하지 않을까. 벗어나고 싶었다. 나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와 이 난감한 상황으로부터.
“그만 놀리시고, 슬슬 나가죠. 다 배 채울 만큼 채운 거 같은데. 오늘 일요일이라서 많이 못 놀기도 할 거고.”
말하면서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여섯 시 이십육 분인데. 사 분 있다가 나갈까요?”
“그러자.”
김민우가 답했다. 다시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식어버린 버거는 먹기 조금 그래서 사이드 메뉴나 포크로 찍어 먹었다. 드드드, 내 폰이 울렸다.
“누구야?”
김세은이 나를 보며 물었다. 폰을 꺼내 확인했다. 외조부였다. 왠지 불길했다.
“외할아버지. 잠깐 나갈게.”
“응.”
김세은이 의자를 옆으로 살짝 당겨 내가 나가기 편하게 해줬다. 나가면서 카운터에 카드를 주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ㅡ어. 온유야. 밥은 먹었냐?
“네 먹었어요.”
ㅡ그러냐. ... 네 엄마 지금 병원에서 링거 꽂고 있다.
“... 어디 병원이요?”
ㅡ글쎄다. 간호사한테 물어서 문자로 주소 보낼 테니까 올 수 있으면 와봐라. 네 얘기는 안 하는데 보고는 싶어 하는 거 같다. 서울에 있는 병원이니까 완전 멀진 않을 거다. 오기 어려우면 막 억지로 오진 말고. 내일 월요일이니까 못 와도 이해할 거다.
“아뇨. 갈게요.”
ㅡ그래. 고맙다. 좀 이따 보자.
“네.”
전화가 끊겼다. 예감이 좋은 날이면 종종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비틀리곤 했다. 착잡했다. 외할아버지가 바로 문자를 보내왔다. 그 주소를 기입해 택시를 불렀다.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카운터에서 카드를 돌려 받은 뒤 돌아갔다. 일어난 사람이 많았다. 김민우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형 잠깐만요.”
“어? 왜.”
검지로 문을 가리켰다.
“걍 여기서 말해.”
“갑자기 사정 생겨서, 저 먼저 가봐야 될 거 같아서요.”
김민우가 어깨동무를 걸어왔다.
“부장이 가긴 어딜 가?”
“... 형.”
“어? 야. 인상 풀어. 너 그럼 존나 무서워. 애들 다 겁 먹는다?”
“형만 잠깐 나와봐요.”
“...”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래.”
같이 밖으로 나갔다.
“야 분위기 조져놓으면 어떡하냐. 무슨 일인데 그래?”
“... 저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셔서, 지금 꼭 가야 돼요. 근데 그거 애들한테 알려주기는 싫거든요.”
“... 그래. 가야지 그럼. 어떡해줄까?”
“몰라요. 형은 뭐 생각 나는 거 없어요?”
“음... 너 잠깐 갔다 돌아오는 거야?”
“몰라요. 어떤 상황인지 봐야죠.”
택시가 와서 빵, 하고 짧게 클락션을 울렸다.
“8시까지는 근방으로 돌아온다고 약속할 수 있어?”
“아뇨.”
“흐음. 그래. 가. 내가 알아서 할게.”
“고마워요. 계산은 이미 했어요.”
“어.”
택시를 탔다. 차창 너머로 김민우가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출발할까요?”
“네 출발해주세요.”
택시가 움직였다. 한숨 쉬었다. 과호흡이 올 듯해 창문을 열어 달라 하고 심호흡했다. 불길한 생각만 떠돌았다. 마음은 이미 병실에 도착해서 변명과 위로의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가 다시 쉬어지면서 갑자기 졸음이 밀려왔다. 도착하면 깨워주실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간헐적으로 차체가 떨리는 게 흔들의자처럼 안락함을 주었다. 까무룩 잠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