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버스킹하는 날 (8)
* * *
“감사합니다아...”
서유은에게 핫쵸코를 건네주는데 벌벌 떠는 게 눈에 띄었다. 투피스만 입었나. 일교차 탓에 아직은 밤이 되면 추워지는 때라 외투가 없으면 견디기 힘들 수 있었다. 게다가 여기는 선상카페라 바람도 많이 불었고.
“춥지?”
“아, 네. 조금 추워요오...”
“내 외투 입어.”
“아뇨 저 괜찮은...”
“아냐 유은아 내 야상 입어.”
김세은이 튀어나와서 자기 야상을 벗어주었다. 덕분에 외투를 벗어주려던 나만 이도저도 못해서 뻘쭘해졌다. 서유은이 김세은의 야상을 받아들었다.
“언니는요...?”
“나? 난 괜찮아. 너 입어. 핫쵸코 내가 들어줄게.”
“감사해요오...”
서유은이 김세은의 야상을 걸쳤다. 그리고는 핫쵸코를 돌려받아 양손으로 소중하게 쥐어서 쪼옥쪼옥 빨아들였다. 이제는 김세은이 떨었다. 김세은이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이온유. 네 옷 줘.”
“...”
순간 멍했다. 이게 진심으로 한 소리인가 의심스러워서. 상체를 숙여 김세은의 귀에 속삭였다.
“장난해?”
말하고 나니 지금 자세가 남들한테 어떻게 비춰질지가 갑자기 의식됐다. 아마 연인에게 비밀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 정도로 보이지 않을까. 제대로 생각도 안 하고 움직인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 김세은 때문이었다.
“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어?”
“소원권 지금 쓸게.”
“...”
고민스러웠다. 만에 하나 나중에 결혼하자 같은 소리를 하며 소원권을 쓴다 했을 때 내가 얼버무리려 하거나 부정하면 그 뒤로 김세은과 나의 관계는 끝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소원권을 없애버리는 게 백 번 나은 선택이었다. 말 없이 벗어서 넘겨주었다. 김세은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로 외투에 왼팔을 집어넣었다.
“나 입는 거 도와줘.”
오른팔을 집어넣기 편하게 거들어주었다.
“하... 참... 진짜 존나 지랄이다...”
백지수가 조용히 말했다.
“이건 좀 에바쳤긴 해.”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송선우가 백지수의 옆에 붙어서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이번 건 조금 그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온유랑 김세은 언제부터 사겼냐?”
드럼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나온 강성연이 백지수 옆으로 가서 씨부렸다.
“아 씨바 너 갑자기 튀어나오지 마 미친 놈아.”
백지수가 강성연을 밀어냈다. 강성연이 한 발짝 옆으로 가서 섰다.
“우리 안 사겨.”
평소의 차분한 표정을 되찾은 김세은이 말했다.
“그걸 존나 잘도 믿겠다. 그리고, 우리라고? 우리라는 표현이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왔다? 말 끝났지 이건.”
강성연이 코웃음 쳤다. 그대로 코를 때리고 싶었다.
챙, 김민우가 손으로 하이햇을 한 번 치고 다시 잡았다. 시선이 그곳으로 집중됐다.
“막장 드라마 놀이 멈춰.”
김민우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팔을 우리 쪽으로 뻗었다. 다른 선배들이 키득대며 멈춰, 라고 따라했다. 김민우가 걸어와서 모여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앗, 저두요?”
서유은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김민우가 피식 웃었다.
“아냐 넌 제외야.”
애들이 적당히 가까워졌을 때 김민우가 입을 열었다.
“너희 후배들도 있고 관객들도 있는데 뭐하는 거야. 엔터 관계자도 종종 오는 곳이라는데 안 좋은 인상 남기고 시작하고 싶어? 촌극 보여주려고 여기 온 거야? 아니잖아. 너희 사이 좋게 노는 건 좋은데, 할 거면 공연 끝내고 해. 알겠지?”
““네.””
김민우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고 화면을 켰다.
“6시 43분이다. 곧 시작하니까 준비 제대로 하고. 화장실 다녀오고 싶으면 지금 당장 다녀오고. 아니 안 마려워도 기왕이면 가둬.”
““네.””
“유은아. 같이 화장실 가자.”
김세은이 말했다. 서유은이 일어났다.
“넹.”
“나도 가.”
백지수가 말했다. 송선우가 양손으로 백지수의 어깨를 잡고 뒤뚱뒤뚱 걸었다.
“저도 꼽사리 낄게용.”
“부장아. 너만 잠만 와봐.”
네 명의 행렬을 보고 있는데 김민우가 말했다. 김민우가 밴드부와 멀어졌다. 따라갔다. 뭔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거지? 김민우가 난간에 팔을 댔다.
“야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너 김세은이랑 사귀냐? 그거 궁금해서 너희 하는 거 그냥 계속 볼까 내적 갈등 오지게 오던 거 겨우 참고 말렸다 내가.”
뭔 소리인가 했네.
“안 사겨요.”
“그래? 네가 그렇담 뭐. 알겠다. 돌아가자. 근데 너 안 춥냐? 노래 부르는데 문제 없을 거 같애?”
김민우가 난간에서 팔을 떼고 돌아서서 걸었다. 발을 맞췄다.
“괜찮아요.”
“추우면 내 외투라도 입고. 나 합법적으로 안에 들어가 있게.”
피식 웃었다.
“그럼 빌려줘요.”
김민우가 외투를 벗어줬다. 외투를 받아들어 걸쳤다.
“애들이 나 어디 사라졌냐고 물으면 모종의 사정 때문에 일정 망친 보컬 찾으러 갔다고 그래.”
“알겠어요 형.”
김민우가 카페 실내로 들어갔다. 어쩌면 김민우는 카페 안에 있는다는 게 농담이고 진짜로 그 보컬 선배를 잡으러 가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화나서 열이 나는데 덥고 걸리적거리는 외투를 쓰고 있을 수는 없으니 나한테 맡긴다는 심정으로 대충 던지고 가는 느낌인 것이다.
폰을 꺼내서 문자를 확인했다. 어머니는 답장을 보내오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전화 걸었다.
ㅡ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왜 꺼져 있지? 충전을 안 하셨나? 다시 카페 안을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시작 전에 마지막으로 점검해봐야 했으니 부장인 내가 자리를 비우는 건 직무유기였다. 그냥 어머니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했으면 꼭 지키는 사람이었으니 연락이 닿지 않아도 오기야 올 것이었다.
그런데 불안했다. 마음은 비이성적이었다. 앎은 감정을 달래지 못했다. 어머니가 눈에 보이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애들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김세은과 눈이 마주쳤다. 김세은은 언제고 지금 나 같은 심리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었을까.
“또 아이 컨택 뭔데.”
백지수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며 투덜댔다. 그러곤 무대에 있던 자기 베이스를 챙기고 자기 조가 있는 데에 가 앉았다. 누가 손으로 내 오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뒤돌아봤다.
“시작해야지.”
송선우였다. 알겠다고 답하고 기타를 챙긴 뒤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들을 스윽 훑었다. 어디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멘트를 뱉었다. 평소 하던 대로 어느 고등학교 밴드부의 아무개라는 고정된 말을 하며 부원들을 소개하고, 날씨가 춥지만 자리 지켜서 들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녹화를 하셔도 괜찮지만 어디에 업로드하신다면 저희 공식 sns 계정에 업로드했다고 댓글로 링크를 함께 남겨주셨으면 한다는 말도 했다. 더 해야 될 말이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역시 딱히 없어서, 첫 곡은 다듀의 북향입니다, 라고 말한 뒤 기타로 인트로를 쳤다. 성대를 울렸다. 악기 소리들이 쌓였다.
ㅡ내 방 창문은 북쪽을 향해 있어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어
사람들이 차츰 몰려 2층 실외의 테이블을 채워갔다. 녹화를 따려는 건지 핸드폰을 자기 눈높이에 들어 올린 사람도 조금 있었다.
ㅡ여긴 어둡고 밖은 더 화창해보여
난 창백해지고 넌 말짱해보여
잠시 아뜩해져서 눈을 감았다 떴다. 테이블들엔 여전히무대 조명 탓에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여전히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첫 곡을 무사히 끝내고 김세은과 서유은이랑 듀엣곡들을 다 마치고 난 후에도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고 난간으로 가 어머니에게 전화 걸었다.
ㅡ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다시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또 걸었다.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마지막으로 걸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폰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시야 저변에서 검은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밤바람이 볼을 스치었다. 다시 폰을 키고 메시지 아이콘을 눌렀다. 어머니는 7시에 노래 부르니까 빨리 오라는 문자에 답장도 보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게 뭐가 되었건 간에 어머니가 이곳에 오지 못할 이유가 될 만한 일이. 어쩌면 어머니는 아팠을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때로 추정되는 시기부터 어머니는 마음의 병이 몸에 드러나 종종 아픔을 호소했고, 이혼 후로도 살이 빠지고 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가 아팠다면 어디가 아팠는지를 문자로 남기셨을 것이었다. 못 가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어머니는 당신이 상처받았던 만큼 마음에 흔적이 남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아셔서 언제고 내가 마음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셨으니까. 아픈 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교통사고라도 난 건가? 말도 안 됐다. 만에 하나 그랬다 한들 그땐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연락을 하셨을 터였다. 다시 폰을 꺼내고 문자를 켰다. 엄마 괜찮아, 라고 자판을 두드렸다가 다시 지웠다. 폰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시야 저변에서 검은 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살을 에이는 밤바람이 볼을 스치었다.
누가 등 뒤에서 내 오른쪽 날개뼈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뒤돌아봤다.
“너 노래 진짜 잘 부르더라, 온유야.”
집에서도 불러주지 그랬어, 라고 하는 소리가 귀에 웅웅 거렸다. 눈앞이 까마득해져서, 윤가영이 띄운 미소가, 입꼬리만 희미하게 보였다. 먹먹해진 귀가 윤가영이 만드는 소리를 흘려냈다.
토를 쏟아내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