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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가 생겼다-40화 (40/438)

〈 40화 〉 버스킹하는 날 (4)

* * *

12시 27분에 핫쵸코를 둘 들고 서유은이 보낸 주소로 갔다. 꽤 커다란 단독주택의 대문 앞에 서 있던 서유은이 나를 발견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걸어왔다. 네이비 트위드 블라우스와 플리츠 스커트를 매치한 투피스 룩 차림이었다. 아무래도 서유은은 옷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되게 깍듯하네. 그렇게 안 해도 돼. 근데 너 옷 되게 잘 입는다.”

왼손에 든 핫쵸코를 건네주었다. 두 손으로 받은 서유은이 내 컵을 보았다.

“헤헤. 감사해요. 선배도 핫쵸코 사신 거예요?”

“응.”

“선배도 단 거 좋아하시나봐요?”

“좋아하지. 나 설탕에 환장해.”

“오 저두요! 저 아침마다 디저트류랑 시럽 엄청 넣은 커피 마셔요!”

“근데 왜 살이 안 쪘대?”

키가 상당히 작은 서유은은 종아리도 얇았다. 힘 주고 발로 차면 부러지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저 좀 쪘는데요.”

서유은이 퉁명스레 답하면서 대문을 열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단독주택은 ㄱ자 형태여서 마당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푸르게 조경이 조금 되어 있었다. 쉬이 더러워질 하얀 외벽은 관리를 잘했는지 깨끗했다.

“집 예쁘다.”

“그쵸. 히히. 근데 저희 집 말고, 뒤에 작은 단칸방 같은 데가 연습하는 공간이에요.”

서유은이 웃었다. 조금 싸늘하게 자기가 쪘다고 말했다가 이렇게 칭찬 한 번 했다고 금방 풀어지는 게 귀여웠다. 더 골려주고 싶기도 했고.

“근데 너 지금 몇 키론데?”

“그런 걸 어떻게 알려줘요!”

서유은이 눈을 찌푸렸다. 감정이 이렇게 표면에 잘 드러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안 쪄 보여. 그럼 된 거지.”

“진짜예요?”

또 얼굴이 약간 풀어졌다.

“응.”

“근데 저 쪘어요.”

이번엔 새초롬했다. 재밌었다.

“알겠어.”

“거기서 알겠다고 하시면 어떡해요!”

웃었다.

“왜 웃어요오!”

“너 귀여워서.”

“네?”

서유은이 나를 돌아봤다. 커다란 눈망울이 나를 직시했다.

“들어가자.”

“네? 아, 네. 으아.”

도로 뒤돌으려는 서유은이 휘청였다. 넘어질까봐 왼손으로 팔뚝을 잡아주었다. 버팀목이 될 것을 잡고 싶었는지 서유은이 핫쵸코를 잡지 않은 오른손으로 내 왼팔뚝을 붙잡았다.

“감사해요...”

“응. 너 핫쵸코 손에 안 흘렀지?”

“네 괜찮아요...”

서유은이 연습실 문을 열었다. 우리는 신발을 벗었다. 녹음장비와 컴퓨터, 기타 두 대와 피아노가 있었다. 1인 녹음실이라고 표현해도 될 거 같았다. 서유은은 컴퓨터 의자에 앉고 나는 바닥에 기타를 내려놓은 뒤 등받이 없는 원형 의자에 앉았다. 서유은이 양손으로 핫쵸코를 소중히 쥐고 있는 걸 보면서 핫쵸코를 한 모금 마셨다.

“되게 잘해놨네.”

“제가 막 해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부모님이 해주셨어요.”

“왜 해명해. 내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서요...”

“누가 뒷담했어?”

“네... 저 중학교 때 친구 데려왔었는데, 그때 피아노 커버에 먼지 앉은 거 보고, 사용도 똑바로 안 하는 거 막 돈 버리듯이 쓴다고 다른 애들한테 얘기 하는 거 봐 가지구...”

“화나네. 남이사 돈을 어떻게 쓰든 자기가 뭔 상관이라고 그래.”

“그래도 걔랑 화해하고 아직 친구로 지내고 있어요... 화내지 마요...”

“그런 애랑 어떻게 다시 친구가 돼? 걔가 여전히 너 뒷담하고 다닐 수도 있잖아.”

“그래도 친구 험담은 다들 한두번 정도는 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니까...”

“와.”

“왜 ‘와’ 해요...?”

“너면 진짜 그런 애랑 다시 친구될 수 있을 거 같아서. 내가 걔였어도 실수라고 하면서 네 바짓가랑이 붙잡고 다시 친구해달라고 했을 거 같애.”

서유은이 살풋 웃었다.

“진짜요?”

“응. 안 그러면 걔는 쌍시옷발음 나오는 천하의 나쁜 사람인 거고.”

“풋. 선배 욕 안 하려고 그러시는 거 되게 웃겨요.”

“네가 친구라고 하는 애인데 대놓고 욕할 수는 없잖아.”

“오와... 선배...”

“응? 왜?”

“아뇨오... 그냥, 뭐라 해야 되지, 배려, 배려가 몸에 배신 거 같아서, 순수하게 감탄한 거예요.”

“나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데.”

“그러시니까 더 신뢰감 생겨요.”

“그냥 네가 날 그런 식으로 보려고 하는 거 아냐? 거의 콩깍지인데?”

“아뇨? 나쁜 사람들은 막 자기가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랑 비슷하게, 선배는 진짜 착한 사람이라서 자기 나쁘다고 낮추는 느낌? 그런 거 같아요.”

고개를 갸웃했다.

“꽁깍진데?”

“아니라니까요오!”

“알겠어. 핫쵸코 마셔. 다 식겠다.”

“네에...”

서유은이 스트로우를 물고 쪼옥쪼옥 빨았다. 음미는 하고 넘기는 건지도 의심이 들 정도로 열심히 빨아들였다. 그러니까, 볼이 조금 홀쭉하게 패이고 쭈읍쭈읍 흡입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서유은이 워낙 작아서 앉은 키에도 차이가 났는데, 의자 높이도 내가 앉은 게 더 커서 서유은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맛있어?”

“헤헤. 네. 엄청 달아여.”

서유은이 활짝 웃고 도로 스트로우를 물었다. 그러고 곧장 쪼옥쪼옥 빨아들여댔다. 욕심 만큼 끊임 없이 빨아들이는 소리를 듣고, 나를 올려다보는 시선과 사라지지 않는 눈웃음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발기해버렸다. 시발. 왼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어 통제하고 티가 안 나게 자세를 조금 틀었다.

“뭐 작업물 같은 거 있어?”

“저 그냥 커버 몇 개만 녹음해봤어요.”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

“옛날에 한 것들이라 조금 민망한데, 핫쵸코 사주셨으니까 들려드릴게요.”

서유은이 몸을 굽혀 컴퓨터를 켰다. 굽히니까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 작아보였다.

“근데 저희 연습은 언제 해요?”

“네 노래 듣고 나서 바로 하자.”

“네.”

서유은이 폴더를 열어 파일을 클릭했다. 서유은이 고개를 획 틀어 나를 봤다.

“저 이거 중2 때 한 건데, 뭐 이상한 짓 안 했겠죠?”

“이상한 짓이라니?”

“노래 부르는 자기에 심취해서 이상한 애드리브를 넣는다거나 그런 거요.”

“안 했겠지.”

했어도 귀여울 거 같고.

“선배만 믿을게요.”

“왜 날 믿어, 네가 녹음한 거를.”

“몰라요. 일단 틀게요.”

서유은이 커버한 곡은 Karina Pasian의 ‘slow motion’이었다. 풋풋한 고백처럼 간질간질했다. 자기도 첫눈에 반했던 사람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서 좋긴 한데, 그렇다고 막 빠르게 손을 잡고 입을 맞추려 하는 건 부담스럽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서유은은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었다. 자기가 들려주고 픈 이야기를 그에 걸맞는 목소리로 할 줄 알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ㅡWanna love you in slow motion

Why can't I?

서유은을 보았다. 얼굴이 극도로 빨갰다. 서유은이 x 버튼을 클릭했다.

“왜. 좋은데 계속 듣지.”

서유은이 컴퓨터 책상에 팔을 대고 엎드렸다.

“창피해요...”

“뭐가 창피해 진짜 좋은데.”

“너무 애처럼 불렀어요. 아니 애가 불렀어요. 지금 저였으면 저렇게는 안 불렀어요.”

“지금 너는 어떻게 부를 건데?”

“몰라요. 일단 저렇게는 안 부를 거예요.”

“나 끝까지 들으면 안 돼?”

“안 돼요.”

“틀 거야.”

팔을 뻗어서 마우스를 잡았다. 서유은이 상체를 일으켰다.

“안 돼요오...”

서유은이 양손으로 내 손목을 잡고 떼려 했다. 하지만 힘이 안 들어가는 자세인데다 서유은 자체도 힘이 없어서 나는 안정감 있게 조작할 수 있었다. 만약 서유은이 방해하고 싶었다면 밀어내는 식으로 힘을 주어야 했다. 다시 노래를 틀고 기억해뒀던 파트로 넘겼다.

“선배애...”

서유은이 손을 떼고 몸을 움츠렸다. 몸은 왜 움츠리지? 내려다보는데 얼굴이 붉었다.

“안 끌 테니까요오...”

서유은이 검지로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가라는 건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지금 자세가 내가 서유은을 안는 거나 다름 없었다.

“미안해.”

뒤로 물러섰다.

“선배는 꽂히면 자기 맘대로 하시는 게 좀 있는 거 같아요...”

“미안해. 성격이라 조절이 잘 안 돼.”

조용히 노래를 다 들었다.

“잘 불렀는데 왜 안 들려주려 했어.”

“감사해요... 저희 이제 연습해야죠...”

왠지 힘이 빠져버린 서유은이 컴퓨터를 끄고 일어서서 자기 기타를 들었다. 나도 기타를 꺼내들었다. 스트랩을 맨 서유은이 빠르게 사운드체크를 했다. 눈빛이 살아난 게 기운이 되돌아온 듯했다.

“‘내 손을 잡아’죠?”

“응. 네가 앉아서 부를래?”

“주심 앉을게요.”

“앉아.”

서유은이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서서 기타 튜닝을 체크했다.

“할까?”

“네.”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시작하는 거야.”

“넹.”

“하나 둘 셋.”

경쾌한 기타 소리와 함께 서유은의 허밍이 들려왔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벌스부터 내 목소리를 섞었다. 서유은이 눈을 마주쳐왔다. 우리는 만난지 오래 된 사이처럼 호흡이 꽤 잘 맞았다.

ㅡ사랑이 온 거야 너와 나 말이야

네가 좋아 정말 못 견딜 만큼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 언저리가 약간 뜨거워지면서 찌르르 떨렸다. 성대를 진동시키기 위해 허파에서 숨을 끌어내서 생겨난 감각은 아니었다. 원인이 불명했다. 그냥 무시하고 노래를 끝마쳤다.

“이것만 계속 연습해요?”

“아니. 솔직히 더 연습 안 해도 될 거 같애. 놀자, 노래 부르면서.”

서유은이 웃었다. 가슴이 또 찌르르 떨렸다.

“좋아요!”

큰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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