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새어머니가 생겼다-6화 (6/438)

〈 6화 〉 연습실 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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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으로 가면서 카톡을 들여다 봤다. 간 새벽에 어떤 신입 부원이 단합은 언제하냐고 개인톡을 보내왔다. 단합이라. 생각을 안 해봤는데. 전화가 왔다. 작년에 밴드부 부장이었던 3학년 드러머 선배 김민우였다.

ㅡ부장아 우리 오늘 버스킹 연습 언제하기로 했지?

생각해보니 이런 일정이 있었다. 까먹은 게 신기할 정도로 중요한 일인데. 시간은 오후 네 시. 장소는 학교 밴드부에서 활동하던, 이제는 유명 기성 가수가 된 졸업생 선배가 후배들이 가끔 연습할 수 있게 사용을 허락해준 연습실이었고.

“네 시에 연습실에서요.”

ㅡ어. 알겠다. 끊을게.

“네.”

한 사람 당 세 곡 씩 연주한다 해도 학년 마다 세션이 두 명 씩이고, 듀엣 곡도 학년 당 둘 씩 넣었으니 총 연주하는 곡은 열 여섯 곡이었다. 곡 하나당 소요 시간을 삼 분에서 오 분으로 잡고, 부원끼리 교대하는 시간, 곡 소개 등 짧게 코멘트 하는 시간, 거기에 앵콜도 고려하면 짧게 해도 대략 한 시간 이십 분이 공연 시간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실제로 버스킹 예약 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한 시간 반 뿐이었다. 인원에 비하면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공연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자정까지 연습하기로 했다.

사실 다음 주 토요일에 우리가 공연할 곳은 주말이면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신인을 찾기 위해 찾아오는 인기 있는 스팟이라서 남들이 갖지 못한 시간을 거머쥐고 있다는 이유로도 공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또 이번 버스킹을 끝으로 음악 쪽으로 진로를 잡지 않은 3학년은 대학 진학을 위해 유령 회원 수준으로 전환하게 되니 선배들도 다들 열과 성을 다했다. 선배들이 이렇게 빡세게 연습하는데 후배인 2학년들이라고 설렁설렁 할 수도 없었다. 정말 만약에, 물론 절대 그럴 리 없지만, 누구 하나라도 대충하는 게 보인다면, 장소 제공자한테 우리 밴드부 포트폴리오도 만들어서 설득한 내가 좆 같아서라도 그 놈을 몰아세울 작정이었다.

독립영화도 다수 상영하는 영화관으로 가는 길에 밴드부원들에게 4시에 연습실 모이는 거 잊지 말라고 연락을 돌렸다. 백지수한테는 기타가 네 별장에 있으니 그때 만나서 연습실에 같이 가자고 했다.

영화관에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리브 트와이스'와 국산 멜로 독립영화 '셋방'을 봤다. 007 시리즈의 제목을 오마쥬해 어그로를 끈 '리브 트와이스'는 망작이었다. 보다가 중간에 나오고 마침 5분 뒤 시작할 예정이던 '셋방'을 급히 티켓을 사서 봤다. '셋방'은 김승옥의 [김수만씨가 패가망신한 내력]을 각색한 영화로 꽤 볼만했다. 원작이 여섯 페이지에 불과한데 73분 짜리라길래 중언부언할 줄 알고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생각 외로 구성부터 미장센까지 좋은 영화였다.

내용은 단순했다. 어느 과부와 불륜 관계가 들통나 이혼 당하고 패가망신한 김민수 씨가 자기를 위로해준다고 만난 이에게 패가망신의 경위를 읊어주는 것이었다. 회상으로 액자식 구성을 취했고, 시간대를 점프할 때는 나레이션을 집어 넣어서 속도감을 유지했다. 아무튼.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돕던 김민수 씨는 힘겨워하는 과부들만 보면 제 분수도 모르고 도우려 들었는데, 도와주던 한 젊은 과부가 남자 또한 필요로 해서 작은 셋방에서 몸을 섞는 관계가 되었다가, 그 광경을 아내에게 들켜 이혼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신은 어투만 현대식으로 바꾸고 소설의 결말을 그대로 오마쥬했다.

‘그래서, 그럼 지금 그 젊은 여자하구 지내는 거에요?’

‘도망쳐버렸어. 아이를 친정어머니한테 맡기구 일본 무슨 요릿집으로 갔다더라.’

‘앞으로 어쩔 셈이에요? 혼자 살아갈 수는 없을 거고.’

‘아냐, 이제부터 진짜 할 일이 생겼잖아? 우리집 과부를 위해서 열심히 돈 벌어 보내는 거야. 일에 대한 의욕이 부쩍 강해지고 있단 말야, 허허허.’

길가 벤치에 앉아 곱씹어보니 묘하게 불쾌했다. 안 좋은 영화였다. 적어도 나한테는. 조금 더 언어 표현을 명확히 한다면, 나랑은 안 맞는 영화였다.

세 시간 정도 시간이 비었다. 왠지 모르게 무언가 할 의욕이랄 게 다 빠져버려서 감기에 걸리든 말든 이대로 벤치에 드러눕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백지수한테 부탁해서 내 기타도 챙겨서 연습실에 와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이대로 있다간 정말 그런 짓을 하고 말 거 같아서 벌떡 일어섰다. 맵 어플을 키고 아침에 간 떡볶이 집을 도착지로 찍었다. 백지수한테 전화를 걸어 지금 네 별장으로 걸어 가고 있다고 통보했다.

ㅡ걸어 오고 있다고?

“어.”

ㅡ얼마나 걸리는데?

“천천히 걸으면, 대충 한 시간 사오십 분?”

ㅡ한 시간 사오십부운?

통화 너머의 백지수가 기분 좋게 웃었다.

ㅡ진짜 미친 거 아냐?

“나 도착하면 너 있는 거로 안다.”

ㅡ어. 끊어.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밴드부 녹음파일을 틀었다. 듣다가 거슬리는 지점이 있으면 그곳이 더 연습해야 할 부분이었다.

걷기의 장점은 유동성에 있었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었고, 풍경에 눈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이게 핵심이었다.

사람은 무언가라도 행위하지 않으면 뇌가 재부팅을 하기 위해 멍을 때리거나 잠에 들게 되어 있다. 만약 뇌가 재부팅할 시기가 아니라면 무어라도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점이 곤란한 것이다. 생각은 때로 감정과 닮아서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다. 어떤 생각을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서 바뀌지 않고 생각이 주체가 되어 다른 생각으로 나를 이끌곤 한다. 낙관적이고 행복한 상상도 가능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이 연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까 벤치에 한량처럼 누워 있었다면 나는 내가 왜 '셋방'을 불쾌하게 여겼는지를 내 트라우마를 뒤적여가며 설명하려 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 뻔했다. 그렇게 얻어낸 한 줌의 자기 이해가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인 것일지 몰라도.

생각은 쉽게 단절되지 않는다. 지금도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듯이. 이럴 때는 대책 없이 생각에 끌려다니거나 신경을 분산할 만한 행위에 집중해야 한다. 걷기의 경우 하체를 움직인다는 것 자체로 신경이 1차로 분산되고 스치는 풍경에 집중함으로써 2차로 분산된다. 물론 금방 질리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이게 질릴 때쯤이면 멍을 때리게 되고 그 뒤에는 본래 하던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녹음 파일이 끊기고 전화가 울렸다. 이수아였다.

“왜.”

ㅡ너 점심 뭐 먹었어.

“팝콘.”

ㅡ팝콘? 팝콘이 밥이야? 아니, 일단 건 됐고. 저녁은 집에서 먹어?

“왜?”

ㅡ아, 엄마가 물어보니까 묻지!

“나 오늘 최소 자정까지 안 들어가.”

ㅡ... 뭐한다고?

“알 거 없어.”

ㅡ그럼 내가 엄마한테 뭐라 말해?

“알 거 없다고 말했다고 말해.”

ㅡ개새끼 진짜.

전화가 끊겼다. 아주 제멋대로다. 이수아는 왜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굴까. 돌이켜보면 이수아가 나를 싫어할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윤가영한테야 데면데면했지만 이수아한테는 나름 잘 대해줬다. 서면상으로라도 여동생은 여동생이니까, 초면인 사람 대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살갑게 다가갔다. 부모님을 잘못 만난 죄 밖에 없는 이수아에게 악감정은 없었으니까. 나는 오히려 이수아의 가정 환경에 일말의 동정심도 가졌다. 이수아의 목을 조른 날 이후로는 흐지부지됐지만.

대체 왜 그랬을까. 초면인 나를 미워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고민한지 두 달은 된 것 같지만 아직 그럴 듯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목을 졸랐을 때, 뒤돌아보고는 왜 웃었을까. 무엇을 이겼다는 것이었을까. 애초에 이겼다는 의미의 미소가 맞았을까? 득의양양한 미소같기도 했다. 무엇을 이뤄서 득의양양했을까? 설마 이수아는 내가 그렇게 하기를 유도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어쩌면 이수아는 나를 미워해도 될 빌미를 만들고 싶어했을 수도 있다. 이수아가 생각하기에도 나를 미워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존대를 할 때에는 내게 욕을 한 적은 없었고, 화를 내거나 나를 때리려 든 적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수아도 자기의 태도에 대해 인지하고 나름의 선을 지키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다. 그날 이후로 이수아가 고삐 풀린듯 욕을 해대고 거리낄 것 없이 나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나름의 선을 지켰다는 가설은 얼추 방증된다. 이수아는 나를 막 대해도 좋을, 그런 대우를 받아도 쌀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처음부터 싸가지 없게 굴어온 것이다. 그렇게 내 밑바닥을 끌어내고 나서 자기 벽을 조금 허물어 나를 받아들이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밑바닥 드러내기는 이수아만의 친해지기 위한 방식이자 조건일지도 모른다. 정말 터무니없는 발상이지만 돌이켜봐도 왠지 틀린 것 같지 않다.

질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수아의 친해지는 방식과는 별개로, 이수아는 왜 나를 처음부터 미워했을까.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

이 이상 이 생각을 붙잡는 건 시간낭비였다. 핸드폰을 켜서 내게 온 메시지들을 다 훑었다. 서유은한테서 개인톡이 왔었다.

[선배님]

[네 시부터 회기 연습실에서 버스킹 준비하시는 거요]

[저 그거 구경하러 가도 될까요?]

[(벽에 숨어서 얼굴만 빼꼼 내밀어보는 이모티콘)]

[안 될까요?]

내가 영화 볼 때 보낸 것이었다. 이모티콘과 마지막 톡 사이에 43분의 시간차가 나는 것을 보면 빈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답 없는 시간 동안 고민도 많이 했을 것 같았다.

톡으로 답장하면 나중에 볼까봐 그냥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꽤 여러 번 들렸다. 핸드폰을 옆에 안 끼고 사나. 다시 걸어야겠다 싶을 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ㅡ여보세요?

“여보세요?”

ㅡ... 누구세요?

“이온유. 2학년, 밴드부 부장.”

ㅡ아, 저 목소리 아는데, 죄송합니다!

“연습한다는 거는 누가 알려줬어?”

ㅡ김세은 선배 인별 보고요.

“걔가 그런 걸 올렸다고?”

걔 기획사에서 sns 못 하게 한다고 징징댔던 거 같은데.

김세은은 우리 밴드부 2학년 보컬로 1학년 때 대형 기획사 wx의 제의로 연습생이 된 애였다. 밴드부 공식 계정에 올린 버스킹 영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연락이 갔다면서 얼마나 자랑질을 했었는지. 최근에는 이제 곧 데뷔를 할 수도 있다면서 바쁜 척이란 바쁜 척은 다하고 밴드부 면접 때도 참석을 안 했다. 그래도 이번 버스킹은 한다고 했을 때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 안 한다고 했으면 머리채를 쥐었을지도 몰랐다.

“그건 뭐 됐고. 와도 돼. 위치는 알아?”

ㅡ몰라요!

“문자로 보낼게. 알아서 찾아올 수 있지?”

ㅡ네! 감사합니다!

“그럼 끊어.”

ㅡ아 잠깐만요 선배.

“응?”

불러놓고 말을 안 한다. 귀를 붙이듯이 가까이 하고 집중하니 아 왜 그랬지, 미쳤나봐, 같은 소리가 작게 들린다.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조용히 혼잣말한 건가. 이어서 심호흡 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ㅡ선배 목소리 되게 좋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어이 없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행인들이 나를 흘깃 쳐다봤다.

“너도 목소리 좋아.”

나를 보던 어떤 머리숱 적은 남자가 눈꼴 시렵다는 듯이 시선을 획 돌렸다.

ㅡ감사해요... 붙잡아서 죄송해요 선배... 끊을게요...

“응.”

전화를 끊었다. 왜 위축됐지. 웃어서? 비웃은 건 아닌데.

서유은의 목소리가 좋다고 한 것도 빈말이 아니었다. 하이텐션으로 목소리를 높이는데 핸드폰을 멀리 떨어뜨리지 않아도 됐으니, 상당히 축복받은 목소리였다. 저음도 되던데. 음역대가 넓은 메조 소프라노인가. 큰일이다. 벌써 이것저것 시켜보고 싶다. 만나서 한 번 권유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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